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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허광철 신부

5월의 말씀 묵상을 시작하며...
“내가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아직도 삶의 사순시기 중에, 깜깜한 어둠 속에 있는 이라면, 나의 부활 신앙을 되돌아 볼 일이다. 종종 우리에게는 가늠할 수 없는 십자가, 바라보기조차 힘겨운 그분 수난의 모습이 오히려 부활의 모습보다 더 쉬이 다가올 때가 있다. 지금 자신의 ‘꼴’과 ‘삶’이 부활보다는 고통과 십자가에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종종 한숨과 함께 되뇐다. “와 이리 사는 게 디노?”
이런 질문에 내가 불쌍하지도 않고, 내 삶과 믿음이 결코 ‘헛것’이 아님을 바오로 사도는 상기시켜 준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고 여러분은 아직도 스스로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이며,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 12-19 참조)

5월의 복음들은 우리의 부활신앙이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지 잘 드러내 준다. 바로 그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첫 증인들이 생전의 예수님 말씀들을 다시 떠올려 ‘부활의 빛’ 안에서 ‘이제서야’, ‘온전히’ 이해하게 된 말씀들이 5월의 복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몸소 체험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생전에 말씀하셨던 바로 그 진정한 ‘착한 목자’, ‘포도나무’이셨음을 그리고 그분의 전 생애가 ‘벗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 말씀들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깨닫고 체험한 부활의 첫 증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믿었고’, 또한 똑같은 착한 목자요 포도나무가 되어 ‘사랑과 증거의 삶’을 살았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첫 제자들에게 넘겨진 이 ‘소명’은 이제 우리의 것이다. 오소서 성령이여, 저희의 믿음과 삶에 ‘부활의 빛’을 비추소서.

 

 


5월 7일 부활 제4주일 : 요한 10, 11-18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17절) 이 한마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요약되고, 그분의 정체와 사명은 밝혀진다. 그 빛은 그분을 ‘알고’ 양들을 ‘아는’ 또 하나의 목자로 살아갈 우리 모두에게 ‘존재의 의미’와 ‘소명’을 일깨워 준다.

삯군과 목자! 이 둘의 차이는 명확하다. 양들에게 ‘관심이 있느냐’, 이리가 나타나면 ‘달아나느냐’, 한마디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느냐이다.

삯군과 이리! 이 둘은 공통점도 차이도 있다. 둘에게 양들은 ‘소유(자기 것)’가 아니다. 다만 삯군은 ‘삯’을 받고 양들을 보호할 임무가 있고, 이리는 볼 것도 없이 무조건 양들을 ‘물어가고’ ‘흩어버리는’ 존재이다. 비유말씀에서 삯군은 이리에게 무조건 진다. 그냥 ‘달아난다’.

양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특징은 목자를 ‘알고’ 목자의 목소리를 ‘듣는’ 온전히 목자에게 맡겨진 존재이다. 그들은 우리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목자가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위 등장인물 중 우리는 누구나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렇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양들’이다. 하지만, 참 목자요 착한 목자이신 ‘부활의 주님’을 ‘알고’ 고백하는 이라면, 삯군이 되어서는 안 되리라. 삯군은 이리에 맞서 싸울 용기도 힘도 없이 도망만 가는 존재이다. ‘이리’는 양들인 우리를 잡아먹는 존재, 바로 ‘죄’와 ‘죽음’과 ‘고통’이라 할 수 있다. 그분의 부활로 이 모든 것이 극복되었는데, 아직도 이리에 힘없이 무너진다면 아직 우리는 삯군일 뿐이다. 소위 현세복락 내지 축복과 은총이라 하는 ‘삯’이 없다면, 목자도 배신하고 양들도 버릴 그런 존재일 뿐이다.

착한 목자의 비유는 당연히 우리를 또 하나의 목자가 되도록 초대한다. 단 한사람이라도 누군가를 이끌어야 하고, 누군가를 보호해야 하는 모든 이는 ‘목자’이다. 한 가정이든 일터든 본당 공동체든 나라든…. 그렇다면 우리 중 예외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목자의 일로 양들에게 먹이를 준다든가 털을 깎아 준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다만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 될 때까지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을 데려와야 하는 임무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선교사명은 목자인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기본 소명인 것이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 당신 부활의 선물로 저희를 당신의 우리(교회)안에 들게 하셨음에, 목자의 사명에 초대하셨음에 감사드리나이다. 때로는 삯꾼이 되어 양들을 갈라지게 하고 스스로도 도망치려 하는 저희들, 때로는 우리 밖을 넘보며 다른 풀들을 찾아 헤매이고픈 저희를 굽어 살피소서. 혹시라도 제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될지라도, 저를 찾는 또 한명의 목자를 보내주시리라 믿나이다. 지금은, 우리 안에 있는 지금은 제가 우리에 있지 않은 양,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떠나겠나이다.

 

 


5월 14일 부활 제5주일 : 요한 15, 1-8
착한 목자의 비유가 ‘우리 안에 있지 않은 양들’을 데려와야 하는 교회의 외적 소명을 드러내고 있다면, 포도나무의 비유는 교회의 내적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포도원에서 농부와 포도나무와 가지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열매’이고, 만일 열매가 없다면 가지도 나무도 농부도 의미가 없어진다. 물론 공동작업이다. 나무는 그 가지에 양분과 수분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농부는 나무와 가지를 위해 일을 한다. 농부는 아버지 하느님이요, 참 포도나무는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실제로 열매가 달리는 곳은 가지이다. 가지는 누구인가? 당연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너희들’이라는 제자들이다. 참 다행인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 너희는 이미 아버지에 의해 ‘모두 깨끗이 손질 되어’ ‘이미 깨끗하게 된’ 가지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적으로 너희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지들이라는 것이다. 제 가지는 볼품도 없고 능력도 없다느니, 한 번도 열매를 본 적이 없다느니, 다른 가지도 많은데…등등의 핑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렇듯 비유의 핵심은 열매인데, 비유에서는 열매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단지 ‘가지가 열매 맺는 방법’에 대해서만 강조할 뿐이다. 열 번이나 ‘붙어 있다’, ‘머무르다’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먼저 나무에 ‘붙어있는 것’, ‘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5절)

그 다음 친절하게도 예수님은 ‘머물러 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이야기 하신다. 바로 ‘말씀이 자신 안에 머물게 함’과 ‘청함’이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그것이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영광은 농부이신 아버지의 것이다. 바로 가지인 우리가 열매를 맺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라 표현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요, 그것은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무름’과 ‘말씀 안에 머무름’, ‘청함’의 단계이다. 역시 기도의 최고 스승, 거룩한 독서의 원조 선생님은 예수님이셨다.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 저희에게 기도의 소명을 다시금 일깨워주시니 감사드리나이다. 당신 부활로 저희는 이미 모두 깨끗이 손질된 가지들임에도 열매가 지극히 볼품없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나이다. 당신 안에 머물러 있음을 망각하고,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못하고 살지 못하는 저희들이었나이다. 다시 손질해 주소서. 저희가 당신과 당신 말씀에 꼭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5월 21일 부활 제6주일 : 요한 15, 9-17
성경, 즉 복음서를 기름 짜는 틀에 넣어 짜면 오직 한 가지가 나온다고 한다. 바로 ‘사랑!’,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절절한 사랑이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것이고, 예수님은 마치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처럼 사랑을 속삭이시며 당신 사랑에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포도나무의 비유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다. 비유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포도나무의 열매가 무엇인지 말씀하신다. ‘사랑이라는 열매’이다. 열매로 농부와 나무와 가지가 하나가 되듯, ‘사랑’이라는 열매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 농부가 가꾸는 것도 사랑이요, 나무가 가지에 주는 양분도 사랑이요,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맺는 열매도 사랑이다. 그 사랑이라는 열매는 결국 나무가 준 것이요, 아버지인 농부가 준 것이다.

이제 가지가 열매를 맺는 방법인 ‘내 안에 머물러라.’는 말씀은 새롭게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로 구체화된다. 다시 말해 그분의 현존과 말씀에 머무는 ‘기도’는 새롭게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그 기도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도록 촉구한다.

사랑의 계명을 우리에게 건네주시는 이유는 먼저 ‘너희가 나의 친구’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내 사랑을 받는 ‘나의 친구’는 나뿐 아니라,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벗이라 하고 사랑했으니, 벗인 너희는 오직 나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우리의 이기적인 사랑법은 종종 사랑하는 사이, 자신들만의 것 안에 머물려고 한다. 그것은 분명히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경고하신다 하겠다.

사랑의 계명을 우리에게 건네주시는 두 번째 이유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시려는 것이다.”(16절) 다시 말해 열매를 맺는 방법이 기도인데, 오직 사랑의 계명을 통한 ‘청함’의 기도만이 아버지께서 들어주시는 기도라는 것이다. 바로 아버지가 주시는 것은 ‘기도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도가 아니라 사랑을 준다.” 따라서 종종 우리의 ‘사랑 없는’ 이기적인 기도가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다.

다시 우리는 우리를 벗이라 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눈을 돌려 보아야 할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와 성령과 맺고 있는 밀접한 ‘자신들만의 사랑’에 머물지 않으셨다. 친구인 우리를 사랑하시고자 직접 ‘사람이 되어 오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그 사랑의 힘은 끊임없이 ‘외딴 곳에 가시어’, 아니 매 순간 아버지와 연결되어 그분께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나왔다. 진정 사랑과 기도의 모델인 그분을 닮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그분이 주신 사랑의 계명에 다가가는 지름길이리라.

사랑이신 주님, 이토록 저희가 당신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요, 가치가 있는지요. 한없이 주시는 당신의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드릴 따름이옵니다. 저라고 왜 사랑하며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너무 어렵습니다. 그렇군요.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러 당신 사랑을 듣고 기도하지 않는 제가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제가 하는 기도도 사랑에 벅찬 속삭임이 아니라 이기적인 일방통보였습니다.

오 주님, 또 제 자신의 꼬임에 빠져버렸습니다. 제가 감히 사랑을 하고 기도를 하겠다구요? 제가 할 일은 오직 당신 사랑 안에 머물며 저를 맡겨드리는 것뿐인데. 오직 하나 청하옵니다. 그 무엇도 저를 당신 사랑에서 갈라놓고 떼어 놓을 수 없게(로마 8, 35-39) 하소서.

 

 


5월 28일 주님 승천 대축일 : 마르 16, 15-20
‘아름다운 퇴장’, 예수님의 승천을 이해하는데 꼭 맞  는 말이리라. 승천으로 그분 지상의 삶은 완성될 뿐 아니라 부활 후 직접적인 발현기간도 마감된다. 하지만 그분의 퇴장이 부재(不在)는 아니다. 바로 부활하신 그분께서 하늘로 오르시는 결정적인 이유는 ‘성령을 파견’하시기 위함이다. 이제 당신의 소명과 자리를 성령께 온전히 내어 드리기에 ‘아름다운 퇴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르코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딱 세 번 발현하신다. 먼저 한 여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9-11절), 이름 모를 두 제자에게(12-13절) 그리고는 오늘 승천의 장면과 바로 연결되는 열한 제자에게(14절) 나타나신다. 앞의 두 발현에서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다른 복음들에서처럼 음식을 나누셨는지 평화를 빌어 주셨는지, 아무 얘기가 없다. 단지 발현을 목격한 이들이 예수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그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다’고만 전한다. 그래서인지 세 번째 열한 제자들에게 발현하셨을 때, 예수님은 가장 먼저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다. 아직도 믿지 못하겠느냐?

그런데 꾸짖으신 예수님은 바로 그 불신의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신다. 왜? 너희의 선포로 ‘믿고 세례를 받는 이’가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도대체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엇을 믿고 이런 절대절명의 과제를 주셨을까?

당신 수난의 길에 소위 제자들의 중심이라는 열한 제자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다. 베드로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도망갔고, 요한만이 어머니를 모시고 십자가 아래 있었을 뿐이다. 나머지는 고향으로 가든지, 다락방에 숨어서 혹시나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 노심초사하던 그들이다. 예수님은 도대체 그들의 무엇을 보신 것일까

그 답은 바로 이어서 말씀하시는 ‘믿는 이들에게 따르는 표징들’에서 알 수 있다.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이상한) 언어로 말하고…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치유가 이루어진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이 표징들은 ‘성령의 은사들’(1코린 12장)이다.

바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상태를, 그들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곧 당신을 대신해서 아니 당신의 또 다른 인격으로 제자들에게 내려 올 ‘성령’을 믿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불신의 제자들마저 철저히 변화시킬 불길같이 세찬 ‘성령’을 믿으신 것이다. 실제로 성령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더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완전히 변화시키시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그 복음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나에게도 전해진 것이다.

하늘로 오르시는 주님, 슬픈 이별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천사들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불신의 제자들처럼 당신의 부활을 아직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저희도 꾸짖어 주소서. 그리고 당신의 협조자 성령을 내려주소서. 저도 변화시키시어 당신 복음선포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이제 하늘과 땅은 당신으로 연결되어 있고, 성령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