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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김영호 신부

4월 2일 사순 제5주일 : 요한 12, 20-33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심란하신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은 바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덧붙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시는 이 고난의 시간은 예수님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이 고난의 시간은 바로 우리를 위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이 직접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고통을 겪는 우리를 더 많이 이해해 주십니다.

물론 어떤 사람도 고통 앞에서 그리고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그곳에서 희망이 자라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통이 없는 곳에는 사랑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산모의 고통 없이 사랑스러운 아기를 낳을 수 없고, 산의 정상에 오를 때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오른다면 산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고통 없이는 진정한 사랑과 기쁨을 체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이웃들을 위해서 내 자신을 한 번씩 죽이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죽음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이 땅에 꽃피울 수가 있고, 진정한 행복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부활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진정 자기의 부활로 만들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나 자신을 죽이는 삶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4월 9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마르 14,1-15,47
오늘 복음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환호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복음 안에 등장하는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환호하는 사람 따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으로 따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환호했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한 이들의 태도가 어떻게 해서 바뀐 것일까요?

먼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군중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빠를 놓아 달라.’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였던가요?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지 그들을 만족시켜주는 분, 그들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분이셨던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환호하고 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또한 복음에 등장하는 군중들처럼 나의 만족과 내 가족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일 내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고, 내가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나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빠를 놓아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나 또한 예수님을 내 틀대로 가두어 놓으려고 하지는 않는지, 그래서 내 틀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더 나아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 주간을 보내면서 과연 나는 온 마음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 이익이 되면 반기고, 나에게 손해가 오면 부정하는 그런 관계는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이제 부활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만일 내가 후자라면 그분께 용서를 청하고 다시 일어나 기쁜 부활을 맞이하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

 

 

 

4월 16일 예수 부활 대축일 : 마르코 16, 1-8
안식일 다음날 세 여인이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에 이르렀을 때에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먼저 그들이 고민하던 무덤 입구의 돌이 미리 굴러져 있었으며 무덤 안에 들어가니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웬 젊은이가 여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여인들이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이였습니다. 그는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여기 계시지 않음을 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젊은이가 여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즉 잠시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나는 소생이나 죽은 몸이 딴 몸으로 태어난다는 환생이 아니라, 완전히 죽은 사람이 신비로운 몸을 띠고 살아나 다시는 죽지 않게 되셨습니다.

결국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참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되며, 바로 이 점이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부활을 향해서 늘 움직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우리의 삶, 즉 욕심, 나태함, 이기심 등등 우리를 다시 살리지 못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나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바꾸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팔아서 나의 이익을 챙기기 보다는, 또한 나만을 바라보고 내 것에만 갇혀 있기보다는 주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나’가 되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4월 23일 부활 제2주일 : 요한 20,19-31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토마스는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는 동료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을 합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나타나십니다. 이때는 자리에 없던 토마스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고 말씀하시자 토마스는 눈으로 보고 확인한 뒤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토마스 사도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믿지 못한 것은 인간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불가능한 것을 믿으라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있을까요? 내 안에서 ‘황당한 소리’라고 들리는데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아무 의심 없이 믿는 사람들이 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보고 믿는 것과 보지는 않았지만 믿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보고야 믿는 사람인가요? 나도 토마스 사도처럼 ‘당신의 손과 옆구리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믿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께 뭔가 징표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는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4월 30일 부활 제3주일 : 루카 24, 35-46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들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너무나 놀랐을 뿐만 아니라, 마치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아서 어리둥절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이 유령이 아님을, 죽음 이전과 같음을 제자들에게 증명해 보이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시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잡수심으로써 자신이 유령이 아님을 바로 증명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지고, 이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복음을 읽고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기보다는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안이한 생각을 하면서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는 말씀은 바로 ‘너’가 아닌 바로 ‘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활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 예수님의 말씀처럼 얼마나 부활을 증거 하면서 살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 생각해보는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