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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허광철 신부

2월의 말씀 묵상을 시작하며...
“성서를 다시 읽어야 한다.”고 갈(喝) 하시던
故 서인석 바오로 신부님!
주님, 당신 말씀에 대한 열정을 일깨워 주던
은사(恩師)의 영상을 그리며, 또한 그의 유언을
채찍 삼아 감히 말씀 읽기와 묵상을 시작하려 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에게”, 바로 나에게 우리에게 보내 주신
당신의 편지들(말씀들)은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다시 읽도록’ 재촉합니다.
봄날의 기대로 가득 찬 2월, 복음들은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를 기억하고 봄날보다
더 따뜻한 하느님 나라의 ‘징표’를 알아들으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당신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소서. 성령이여, 오소서!

     

 

    
2월 5일 연중 제5주일 : 마르 1, 29-39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고치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이다. 오늘 복음은 ‘고쳐주시는 예수님’과 복음 선포의 사명에 마음이 바쁘신(38절 참조) 예수님, 또한 그를 위해 이른 새벽에 기도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는’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고치시는 예수님’에 속하는 듯하지만, 오늘 복음 말미를 보면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듯하다.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39절)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과 동격(同格)이다.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바로 이 마귀라는 놈들이기에, 복음 선포와 더불어 그분이 하신 일은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일’이었다. 마귀들이 어떤 존재인지 오늘 복음은 자세히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특징이 “당신을 알고 있는”(34절ㄷ) 자들이며, 무조건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34절ㄴ) 침묵의 명령을 받는 자들로 그려진다.

나는 이미 예수님이,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고’있는가? 그렇다면 마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마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날 좀 괴롭히지 말아 달라.”(마르 5, 7)고, 그분과 그분이 주시는 삶을 거부하지도 말 것이며, 그 분의 치유를 받아 “옷을 입고 제 정신으로 앉아”(5, 15) 있도록 청해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는 무엇에 그리 말들이 많은가? 말로, 말들로 수없이 넘어지고 상처를 주고받는 우리, 오직 할 말은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5, 19)을 말하는 것뿐인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해 ‘모든’마귀를 쫓아 내셨는가? 갖가지 질병을 앓는 ‘모든’사람들을 고쳐주셨는가? 그렇다면 좋으련만,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그것들은 만연하다. 복음은 명확히 ‘모든’이 아니라 ‘많은’마귀들과 질병들을 해결하셨다고 전한다. 그분의 능력대로라면 한방에 ‘모든’ 악과 병들을 없앨 수도 있지 않으셨는가? 도대체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가?

결국 우리는 그 답을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분은 분명 ‘다가오는’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 ‘완성된’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지 않았다. 바로 하느님 나라는 “병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치유하고 돌보는 세상, 싸움이 없는 곳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세상, 악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도와 그 악들을 물리치는 세상 안에”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 그분은 결코 나와 우리와 세상의 ‘모든’문제들을 한번에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 그래서 고달프다. 힘겹다. 답답하다. 하지만 내가 먼저 작은 겨자씨가 될 때,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되리라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 있기를….

주님, 더 이상 교회가, 세상이, 우리 공동체가 왜 이 모양이냐고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이런 우리 안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믿습니다. 오직 제가 스스로 말과 행동으로 악을 만들어내는 마귀가 되지 않도록 깨어있게 하소서.

 

 


2월 12일 연중 제6주일 : 마르 1, 40-45
함 께 고쳐주는 세상, 그래서 다가 온 하느님 나라를 만끽하고 살아가려면 예수님의 치유 모습을 우리의 ‘모범’으로 눈여겨 볼 일이다. 오늘은 어떤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당시 나병은 신의 저주라 불릴 정도로, 온 몸을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우선 예수님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자. “당신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먼저 나병환자의 청을 예수님은 ‘들으신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측은의 마음을 가지시며’, 세 번째로 직접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신다.’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고 ‘말씀하신다.’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치유의 결과이다. 나병에 걸렸던 이는 깨끗해져서 자유롭게 되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예수님이 마을로 더 이상 드러나게 다니지 못하시고 외딴 곳에 머물게 되신다.(45절) 그냥 단순한 나병의 치유행위가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을 받아 안으신 예수님이신 것이다.

여기 한 개인 나병환자에 대한 치유에서 전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떠올려 봄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느님은 죄와 죽음과 고통으로 헐떡거리는 인간의 한계를 ‘들으셨고’, ‘측은히 여기셨고’, 그래서 몸소 사람이 되시어 세상과 ‘접촉하셨고’, ‘말씀’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다. 그 결과 그분은 죄를 용서하시려고 죄의 결과인 고통과 죽음을 십자가에서 몸소 겪으셨다.

한 개인과 전 인류에 대한 예수님의 구원행위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은 진정 ‘복음’이다. 그분은 바로 지금의 ‘아파하고 있는 나도’ 고쳐주시고자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나의 말과 아픔을 ‘들어주는’ 누군가를 통하여, 마음 아파하며 남 몰래 눈물 흘리는 누군가를 통하여, 손 내밀어 다가오는 누군가를 통하여, 진정 나를 살리는 힘이 되는 한 마디를 해 주는 누군가를 통하여 그리고 바로 그분의 구원을 믿고 희망하며 살아가는, ‘이미’ 구원의 약속을 받은 ‘우리’ 서로서로를 통하여 말이다. 깨끗해진 나병환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44절)에서 우리는 바로 내가 그 ‘누군가’가 되어야 함을 요청받는다. 네 사랑과 삶의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주님, 상처로 뒤범벅이 되어 가시로 무장한 채 철저히 고립되어 살아가는 그에게 다가갈 용기와 지혜를 허락하소서. 그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받아 안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말 한 마디, 미소 한 줌, 치유의 기도 한 자락 바칠 마음이라도 허락하소서.


 

 

2월 19일 연중 제7주일 : 마르 2, 1-12
많 은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오늘 복음에서도 계속된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예수님은 단순히 가르치시고 질병을 치유하시는 자신의 모습을 넘어서서 무언가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 주시기 시작하신다. 바로 ‘죄를 용서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처음으로 드러내신다. 복음서를 관통하는 그 비밀은 결국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밝히 드러날 것이다.

자, 그러면 오늘 복음에서는 어떻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셨는가? 중풍병자의 치유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나병환자를 고치실 때처럼, 측은히 여기시고 만지시고 하던 예수님의 ‘행위’는 없다. 오직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는 ‘말씀’이 있을 뿐이다. 치유를 위한 ‘행위’는 오히려 중풍병자를 들 것에 들고 온 네 사람이 하고 있다. 결국 중풍병자를 낫게 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들 ‘행위’의 합작품이다.

여기에서 ‘중풍병자’가 심상치 않다. 율법학자와 똑같은 의문을 우리도 갖게 된다. 그냥 멋지게 고쳐주시면 될 것을 갑자기 죄의 용서가 웬 말씀인가? 그러면 이 중풍병자는 무슨 죄가 있어서 병에 걸렸다는 말인가? 하지만 복음은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픈 것이 죄 때문인지, 또 얘야(또는 아들아) 하는 말씀에서 보듯 그가 어른인지 아이인지 아무것도 이기해 주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중풍이라는 병을 통해 왜 예수님이 ‘나아라’는 말씀이 아닌, ‘죄의 용서’를 하셨는지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풍’이란 온 몸이나 몸의 한 부분이 마비되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병이다. ‘죄’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마음을 마비시켜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바로 ‘죄’를 지었을 때이다. 결국 예수님은 중풍이라는 병에 걸린 이가 아니라, ‘죄’의 사슬에 매여 꿈적도 할 수 없는 한 영혼을 고쳐주시는 것이다.

‘하느님 한 분만이 할 수 있는’,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비밀을 처음으로 드러내시는 예수님! 하지만 그 분은 이 권한을 당신 홀로 사용하지 않으셨음에 주목하고 싶다. 복음은 분명히 전한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그분의 ‘말씀’과 사람들의 ‘행위’가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진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라는 미사경문은 마땅하고 옳으며, 교회를 통해 성자의 용서하는 권한이 행해지는 고해성사는 지극히 ‘복음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주님, 율법학자들처럼 끊임없이 고해성사에 의심을 품고 아니 당신의 권한에 대한 부족한 믿음으로 치유 받기를 두려워하는 저희들이옵니다. 죄의 사슬에 묶여 허덕이는 제 자신과 이웃들을 당신 앞으로 ‘들어 옮기게’하소서. 저희도 진정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당신의 말씀에 푹 빠져들게 하소서.

 

 


2월 26일 연중 제8주일 : 마르 2, 18-22
하 느님 나라를 보여주시는 예수님은 무언가 다르셨다.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행동’에서도 그러하셨고, ‘말씀’에서도 그러하셨다. 소위 카니발 주일이라는 오늘 말씀은 목전까지 다가온 그분의 수난을 준비 할 우리의 시선을 한 곳으로 고정시켜 주신다. 바로 ‘새로움을 보라.’는 것이다.

와, 저런 인간 같지 않은 것들(세리와 죄인)과 밥을 먹느냐고 따지는 바리사이들에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하시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2, 28) 고 하시는 말씀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 오늘 복음이다. 사람들이 많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당신은 왜 그렇게 합니까? 또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왜 그렇게 다르냐고, 튀냐고 묻는 투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 내용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말씀하시는 모양새도 무언가 다르시다. 마치 선문답처럼 알아들을 귀가 있으면 알아들으라는 식으로…. “당신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생뚱맞게 “나는 신랑이다.”하신다. 잘 모르겠나? 그러면 나는 “새 천조각이다, 새 포도주다.” 알겠나? 사실 제자들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예수님은 당신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다. 한 마디로 제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당신 자신’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는데, 그것은 ‘율법 때문’이었고, 요한의 제자들은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준비로 ‘회개를 위해’ 단식을 했다. 하지만 나의 제자들은 지금 ‘나 때문에’단식하고 있지 않고, 곧 ‘신랑이 빼앗길 날’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바로 다른 것, 새로운 것의 모든 중심엔 신랑인 당신 자신이 계시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신랑’이란 말이 모호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상징적 표현, 바로 ‘하느님 자신에 대한 형상’(이사 62, 5)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비밀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살짝 드러내는 곳이 바로 이 단식논쟁 부분이다. 그러면 어떤 하느님인가? 그것은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단식의 새로운 의미가 밝혀지듯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새 천조각과 새 포도주처럼 정말 ‘새로운 것’일 것이다.

신약 전체가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새로운 하느님’에 대한 것이다. 곧 다가올 사순은 ‘인간을 위해서 죽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완전히 새로운 하느님이다. 이젠 우리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그분의 첫 말씀에 따라 단식할 시간이다. ‘새로운 하느님’을 알게 된 우리도 ‘새로운 인간’이 되어야 할 시기이다.

주님, 우리는 끊임없이 새롭게, 다르게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리 새롭지 않은, 새로워지지 않는 나의 모습에 실망하고 무너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군요. 나의 새로움은 ‘나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에’가능함을, 당신의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의 새로움도 없음을…. 오는 사순시기, 당신의 새로움을 한껏 받아 안게 하소서. 그것이 비록 십자가와 고통의 길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