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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 순교자의 후손 김용태(마지아)·김영수(사도요한) 씨
화려하지 않은 신앙


취재|박지현(프란체스카)·본지 기자

우리를 바라보며 서있는 대구 대신학원의 김대건 신부의 동상. 아침마다 그 옆을 지나면서도 항상 그 자리에 서 있었기에 너무 당연스럽게 여기고 있듯이, 갖은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천주교를 지킨 순교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있음을 너무나 당연스레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순교자 성월인 9월, 순교성인의 정신을 다시금 새겨보며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후손인 김용태(마지아) 씨와 김영수(사도요한) 씨를 만나보았다.

아침 일찍 전라도 부안에서 출발하여 오후가 되어서야 도착한 그들. “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기도.”라며 먼저 성모당으로 발걸음을 옮겨 묵주기도 5단을 정성스레 드린 뒤에야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 1814년 순교)의 직계 8대손이며 대구의 순교자 김종한(안드레아)의 방계종손인 김용태(마지아) 씨와 그의 조카 김영수(사도요한) 씨. 충청도에 뿌리내리며 살던 김용태 씨 집안은 박해시대에 전라도 부안 산내면 불무동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힘겨웠던 박해시대가 끝나고 그의 할아버지 김양배 씨의 담배농사가 성공을 거두면서 1890년대부터 전라도 부안군 하서면 등룡리에 터를 잡게 된 그들은 우선 흩어져 살아가던 가족들을 하나 둘씩 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가족들은 한마을에 모이게 되었고, 김용태 씨가 다섯 살 무렵인 1917년, 신앙에 목말라 하던 그동안의 마음들을 모아 할아버지 김양배 씨를 중심으로 ‘부안성당’을 짓게 된다. 그리고 1926년 5월말 본당 초대 신부로 고(故) 이기수 몬시뇰이 부임하게 되면서 자유로운 신앙 생활은 다시금 시작되었다. 스스로 앞장서 성당을 지어가면서까지 신앙 활동에 열심이던 할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의 영향으로 열심히 성당을 다니던 다섯 살의 김용태 씨를 이기수 신부는 유난히 이뻐하였다. 8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그 사랑을 잊을 수 없다는 그는 성직자 묘지의 이기수 몬시뇰 묘소 앞에서 “신부님, 제가 이렇게 오랜만에야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라며 그 시절을 회상하며 눈가를 촉촉하게 적신다.

신앙 안에서 성당에 나가는 즐거움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그의 청년시절은 6.25 사변으로 인하여 많은 굴곡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마을로 들이닥친 공산당들은 치안유지의 명목으로 막무가내로 마을을 약탈하였다. 여기저기 피난을 떠나기에 정신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을 비롯한 전주교구 내 사제들은 누구도 떠나지 않았다. 당시 전주교구 김현배 주교는 “목자들은 양을 버리고 못 간다.”며 하느님 안에서 한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이 통했는지 어느날부터는 공산당원들마저도 “천주교를 따르는 사람은 모두 착한 사람이다.”라며 그들만은 잡아갔다가도 무사히 풀어주곤 하였다고 한다.

마을은 ‘천주교촌’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모여 살았고, 당시 청년회장을 맡고 있던 김용태 씨를 비롯한 마을 청년들은 항상 마을의 치안에 힘썼다. 그 과정에서 공산당원들과 싸우다가 5명(교황청에 21세기 순교자들로 보고되어 있다.)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퇴각 도중 숨어있던 공산당이 한 달간 두 번이나 마을에 불을 지르는 일이 발생하였다. 기와집 5칸으로 이루어진 성당, 사제관, 식당은 모두 불에 타 버렸지만 종가집의 족보와 제의, 미사경본, 성합 등 당시 중요한 물건들을 모셔놓은 한 칸만은 신기하게도 타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까지 그 미사경본과 제의 등을 보관하고 있다는 김용태 씨는 “이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신앙을 열심히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6.25 전에 개성에 있는 외가에서 공부하던 종손 김영수 씨는 공산당에게 붙잡혀 잠시 거제도 인민군 수용소에 있지만 미군 종군 신부의 도움으로 다행히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신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채 잡혀 있었던 그 순간이 지금까지도 조상들께 죄송할 따름.”이라며 ‘삶 속에 한순간이라도 천주교를 소홀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다.

순교자들의 박해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서조차 하느님을 향한 그 마음에 한치의 흔들림 없이 살아가던 그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나서게 된 것은 대구대교구 영남교회사연구소 부소장인 마백락(클레멘스) 씨를 만나게 된 1991년부터이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알게된 그들은 서로의 존재가 더없이 반가웠으며 그때부터 세 사람은 조상들의 행적을 찾아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4년간의 성지 답사를 통하여 조상들의 흔적을 모은 그들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 명가로서 김해 김씨 안경공파에서 2002년 독립 된 ‘성인공파’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순교자 12명, 성직자 5명, 수도자 11명을 배출한 그들만의 족보인 가승보가 완성되었다. ‘성인공파’의 이름에 걸맞게 파조에서부터 현재의 자손까지 총 11대에 이르는 가계 성원들 이름 옆에 세례명과 순교사실을 기록해 놓은 족보는 그들만의 큰 자랑거리이다.

그동안 순교자 후손임을 알리며 살기보다는 신앙에 충실하며 조용하게 살아온 김용태 씨. 한순간도 하느님을 잊은 적 없이 열심히 살아온 그이지만 “순교자들에 대한 다른 이들의 존경심에 비하여 집안에 냉담자가 많다.”며 자신의 부족함을 탓한다. 하지만 현재 ‘성인공파’의 고문위원을 맡으며 마치 자신의 큰집처럼 생각하며 가깝게 지내고 있다는 마백락(클레멘스) 씨는 “여느 집안과 비교하여 냉담자가 월등히 적은 편이지만 항상 저렇게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조차도 제대로 살고 있지는 못하지만 꼭 한 가지 전하고 싶은 건 가정에서의 신앙생활이다. 가정 안에서의 신앙생활이 잘 이루어지면 가족들은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라고 전하는 종손 김영수(사도요한) 씨.

순교자 후손으로서의 삶이 다소 부담스러웠을 법도 한 그들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단 한 번도 놓지 않은 신앙의 끈. 다양한 활동도 중요하지만 그 바탕이 되는 한결같은 마음을 잃지 않는 것,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