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힘들었던 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뒤이은 수능 실패의 충격에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대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힘들었던 고등학교 시절 내내 하느님께 매달렸고 수능 성적이 60점이나 떨어졌을 때에도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줄곧 묵묵부답이신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힘들었던 그때가 바로 하느님께서 적극적으로 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신 때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절망의 늪으로 한없이 빠져 들어가고 있을 때에 우연히 파스카 청년성서모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생겨 스스로 센터에 전화해서 창세기 공부를 시작했고 공부를 마칠 무렵 자연스럽게 창세기 연수에 참가하게 되었다. 창세기 연수에서 느낀 강렬한 느낌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내가 왜 여기 서있는지 분명히 깨우쳐 준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다.
힘든 고등학교 시절도, 수능 실패조차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시간들이었음을, 내가 하느님 안에서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시간들이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부터의 허락된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그래서 그때까지 파스카 청년성서모임이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 대학교에서 말씀의 씨앗을 퍼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 뜻이 아니라 어떤 사명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던 나는 말을 하는데 굉장히 공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거나 낯선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 등은 그 당시 나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꼭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은 나에게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같은 과 친구와 선배들 중에 천주교 신자를 파악해 전화를 걸거나 밥을 사주며 설득을 해서 이듬해 봄 학기에 대구대학교 소속으로 두 팀을 봉헌할 수 있었다. 첫 봉사를 시작으로 파스카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계기는 탈출기 연수였다.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했던 나는 내가 말을 더듬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래서 많은 상처와 두려움들을 안고 있었음에도 힘든 내색 한번하지 않을 정도로 독하게 살아왔다. 탈출기의 광야는 나를 하느님 안에서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모세가 소명을 받는 장면을 묵상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연수 내내 너무나 아프고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광야에서 나를 강하게 이끄시는 그분의 힘을 느끼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연수봉사를 통해서 ‘나를 인정하기’ 훈련이 시작되었다. 연수봉사를 할 때마다 매번 앞에 나서서 말하는 소임들은 다른 봉사자에게로 돌아가고 말을 하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소임은 나에게로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처음에는 힘들고 서러워서 혼자 눈물짓는 일도 있었지만 매 학기 쉬지 않고 연수봉사를 하면서 어느 사이엔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소임일지라도 온전히 받아들이고 하느님 안에서 기쁘게 맡은 일들을 해나가는 내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탈출기 연수 후 말씀의 봉사자로 파견 받아 캠퍼스의 복음화를 꿈꾸며 집에서 학교 기숙사로 옮겨가며 정신없이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고 팀을 만들고 봉사하는 것이 나의 일상적인 삶이 되었다.
말씀의 봉사를 하면서 결코 나의 힘이 아님을 매번 느낄 수가 있었다. 성령의 힘이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마디도 하기 힘들 정도로 부족했던 나의 능력으로 어떻게 그 많은 말을 하고 매 학기 봉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을까?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본당에서 봉사하고 있지만 후배들이 나의 뒤를 이어 캠퍼스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굉장히 큰 감사를 느낀다.
말씀의 봉사를 거듭하면서 말을 하는데 자신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경험들은 나를 교단에까지 설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말씀과 찬양 안에서 나의 광야를 함께 걸어갈 동반자를 만나게 해 주셨다. 여러 가지 상처들과 실패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받는 것에 익숙지 못했던 나에게 그는 예수님처럼 다가와 나의 상처를 감싸주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자신감과 희망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말로 하는 기도가 서툴고 힘든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목청껏 높여 찬양할 수 있는 달란트를 주시어(5년간 찬양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어느 곳에서든 주저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말씀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시련과 고통은 광야와 십자가로 탈바꿈되었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이끄심과 사랑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삶을 비관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열정적인 삶을 사는 사람으로, 전화 한 통 제대로 못하던 소심하고 상처 많던 한 청년이 당당히 하느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수많은 상처 때문에 사랑받는데 익숙지 못했던 한 청년이 마음껏 사랑을 주고 또 받을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은 하느님 말씀 안에서 일어난 작은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항상 감사드린다.
지난 6월 성령 강림 대축일에 있었던 파스카 30주년 돌잔치에서 ‘사랑의 고리(팀봉사 10회, 연수봉사 10회 이상을 한 봉사자에게 주는 목걸이)’를 받고 시간이 빠르다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지나간 6년이라는 청년시기 동안 언제나 함께 해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다.
지금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사람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항상 파견된 자라는 것을 잊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한다. 말씀을 먼저 접하고 놀라운 신앙체험을 한 선배로서 언제 어디서든 말씀을 전하는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수많은 은총에 항상 감사드리며 하루하루를 하느님의 뜻에 맞게 기쁜 삶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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