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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포항 장기, 다산 정약용 선생 유배지를 찾아서
다산(茶山) 찾아가기


정영목(아킬로)|정인한의원 원장, 한의학박사

3. 다산 숨결 찾기
드디어 우리도 장기에 도착하였다. 이제부터 다산과 함께 한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부터 두근거렸다. 장기 면사무소 앞에는 고을현감이 집무하던 근민당이 있고, 그 옆으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척화비가 먼저 눈에 띈다. 이 척화비는 1871년(고종8년) 4월에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중의 하나로,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란 글이 새겨져 있다. 이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경고의 비문이다. 다산 당시의 장기현 치소는 지금 장기면사무소 뒷산 위의 장기읍성 자리였으며, 장기현 관아는 읍성 안의 향교 바로 근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장기에서의 다산 유배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다산이 남긴 120여 편의 시를 분석하여 앞뒤를 꿰맞추며 당시 상황을 가상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도는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다산기념사업회 윤동환 회장·한동대학 국문학과 김윤규 교수 등의 저술과 장기발전 연구회 금낙두 국장 등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음을 밝혀둔다. 

<다산은 1801년 2월 28일날 서울을 떠나 사평·하담·문경을 지나 3월 9일날 장기에 도착하였다. 열흘간의 고행길 끝에 겨우 도착하게 되었으나 바로 읍성내 옥터로 끌려가 갇히게 되었다. 다음날 저녁 석양이 붉을 무렵에 다시 관리들에게 끌려나와, 성밖 동문위의 위용스러운 조해루를 지나서 읍성 동편 마을인 마산리로 내려갔다. 다산은 시냇가 안쪽 자갈돌밭을 지나 노교 성선봉(成善封)의 집에 이르게 되었고, 이곳에서 220일간의 장기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성선봉이라는 사람은 관가의 포교이면서도 틈틈이 농사도 지으며 사는 선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다산이 처음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참담하게 지내고 있었을 때, 그는 술상을 차려 와서 기분을 풀어주기도 하고 외출을 권하기도 하였다. 차츰 그의 손주들과 마당에서 어울리며 이곳저곳을 살피기도 하고, 갓 태어난 병아리를 돌보며 아이들로 하여금 참새 떼를 쫓고 솔개 후리기를 가르치기도 하며 무료함을 달래었다. 또 이웃의 노인들은 다산이 심심할 때 장기를 두러 오기도 했고, 마을의 심부름꾼 아이는 음식이 안 맞아 속병이 난 다산을 위해 조약을 전해주며 고향을 물어보기도 하는 등 다산을 가까이 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주인과 이웃의 인정 어린 응대에 힘입어 다산은 바깥나들이를 시작하였다. 귀양 죄인이 외출을 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겠지만, 그는 마을사람들의 생활을 돌아보기도 하고 장기천가를 거닐기도 했으며, 좀 멀리 가는 날은 들길이나 냇가를 따라 신창리 바닷가까지 간 적도 더러 있었다. 그가 외출했을 때 마을사람들은 보리타작을 하고 있기도 했고, 참외농사나 담배농사를 짓고 있기도 했다. 바닷가에 갔을 때는 갓 시집온 해녀의 물질을 처음으로 구경하기도 했고, 오징어를 보고 자신의 삶을 기탁한 노래를 짓기도 했다. 다산이 바닷가까지 산책을 다니며 거닐던 장기천가에는 장대한 느릅나무 고목숲이 있었고, 거기서 많은 생각을 하며 상념에 젖기도 하고 시상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당시 장기는 죄인들의 유배지가 될 정도로 살기에 척박하고 외진 곳이었다. 호랑이와 늑대가 자주 출몰하여 성에서조차 북문과 서문을 폐쇄하였고 집집마다 대문에 창을 꽂아 둘 정도였으며, 습열의 풍토병이 횡행하여 다산도 비증이 생겨 창출술을 담궈 먹기도 했다.

장기사람들의 농사짓는 일과 고기잡는 방법은 너무 비능률적이고 원시적이라 눈여겨 봐두었다가 성선봉을 통하여 문제점을 개선시켜 주기도 하였다. 한편, 지배계층의 권력을 이용한 구조적인 병폐를 현장에서 목도하게 되고, 가난한 민초들의 어려움을 애통해하며 글로 적어두곤 하였다.

심지어 중병에 걸려도 의서와 약제를 알지 못하니 무당에게 푸닥거리를 하거나 어쩌다 뱀을 잡아 먹어 보거나 아니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주민의 애틋한 청원이 있어 다산은 장기사람들을 위하여 직접 의서를 저술하게 되는데, 시골사람들이라도 잘 알 수 있게 간편하고도 유용하게 책을 지었다. 나중에 유배가 풀리면 좀 더 깊은 연구로 내용을 보완하기 위한 생각으로 우선 책이름을 《촌병혹치(村病或治)》라고 겸손하게 부쳐보았다.>

척화비를 뒤로 하고 면사무소 남쪽 길을 따라 읍성으로 올라가노라니 두근거리는 가슴보다 발이 더 분주해진다. 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동문에는 안내판만 서 있을 뿐 허물어진 돌무더기만이 지나온 세월을 가늠케 한다. 우측으로는 당시 교육기관이던 향교가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읍성 한가운데 이르니 옛 행정기관 동헌터가 널찍이 펼쳐져 있다. 이 곳 어딘가에 다산이 장기로 유배 첫 날 밤을 지새운 ‘옥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곳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제라도 찾을 수는 없을까, 하며 수소문하여 모신 80세 촌로의 뒤를 따라 본격적인 탐사에 나섰다. 동헌터 조금 동쪽인 향교 뒤편에 ‘옥터’가 있었다고 들은 적이 있으며, 그 뒤 골짜기를 ‘피묻골’이라 부른다고 말을 해준다. 아마도 ‘형장’을 이름하는 것 같았으나, 지금은 대나무숲이 우거져 사람의 발길을 막고 있었다. 우리는 ‘옥터’라고 예상되는 곳에서 다산을 묵념하며 잠시 기도를 드린 후, 나머지 아쉬운 마음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쓸어 담았다. 그런데 대구대교구 이문희 대주교님께서 벌써 수년 전에 이 곳을 살펴보시고는 바로 천주교 순례예정지로 내다보시어 부지를 매입해 놓으셨다고 하시니, 그 혜안에 감탄할 수밖에.

일행은 마무리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읍성성곽으로 올라갔다. 수려한 옛 경관이 되살아나고 있다 하여 반가웠으나 옥에 티라고나 할까, 성둑길 위를 흙과 잔디로 입힌 게 아니라 시멘트로 덮어버려 아쉬웠다. 그러나 여기에도 많은 분들의 연구와 노고에 힘입어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고개 들어 사방을 살피니 첩첩이 산이 둘러있고 동으로 시야가 트이며 장기면의 풍경이 다가오고 그 너머로 동해 앞바다가 가물거린다.

다시 읍성을 내려와 다산 사적비가 건립되어 있다는 마산리 장기초등학교를 찾았다. 이 곳에서 보는 유일한 다산의 표식이라, 오석과 화강암으로 어우러진 다산 기념비에 한참이나 마음을 내렸다. 바로 옆엔 다산보다 125년 앞선 1675년에 먼저 귀양 와서 5년간 지내고 갔다는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의 기념비가 함께 서 있었고, 한쪽에는 우암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풍상의 세월을 지키며 고목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산이 거처했었던 성선봉의 집터나 그 후손의 자취는 아무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지나가던 동네주민이 그 뒤편 산자락 언덕위에 옛집이 한 채 있다고 하여 혹시나 하며 대나무 숲을 헤치고 올라 가보았다. 거의 무너질 듯한 폐가가 한 채 있어 깜짝 놀랐으나, 자세히 보니 1970년대 초쯤에 지어졌을 법한 낡은 함석집이었다. 게다가 마당이 좁고 집 입구는 너무 가파른 것 같아 농사짓던 집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사실 ‘옥터’와 노교 ‘성선봉 집터’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고 향토사학자, 포항 문화재 관리국, 지역원로 그리고 저명한 기 탐사전문가에게도 자문을 구하여 보았으나 더 이상의 신통한 답변은 없었다. 그래서 한동대 국문학과 김윤규 교수가 국역한 다산의 120여 수 시작 속에서 언급된 집이나 거처에 관련된 부분을 전부 발췌하여, 이를 다시 마산리 지형에 대비하여 추정을 해보면 ‘성선봉의 집터’는 장기초등학교의 운동장 가운데쯤으로 추정된다.

마백락 회장님과 함께 그 운동장 한가운데를 틱 낫한(Thich Nhat Hanh) 스님의 명상걸음으로 천천히 디뎌 보았다. 어스름마저 저만큼 다가오니 다산 선생의 족적을 확인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과 기대는 어느새 안타까움과 아쉬움으로 교차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 어디선가에서 다산이 호흡을 했을 것이고, 어쩌면 내가 서 있는 이곳을 서성이며 북서쪽 하늘을 바라봄에, 선왕 정조 임금님과 형님들 그리고 가족들을 그리며 뒷짐으로 배회하지는 않았을까 여겨져 떼려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4. 다산 음미하기
다산이 장기에 머문 약 7개월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가장 참담한 고통 속에서 지내던 시기였다.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빌미로 하여 그를 제거하려는 정적들의 끝없는 질시와 집요한 모함은 혹독한 국문과 옥살이, 가까운 지인들의 죽음과 생이별 그리고 낯선 외진 곳으로의 귀양살이로 내몰았다. 그 억울한 비운에 대한 분노와 서러움은 상상을 초월하였을 것이지만, 다산은 더 이상의 실의와 좌절에 빠지지 않고 곧 감정을 추스려 새로운 생활에 순응해 나간 것이었다.

이때부터 마음을 안정하고 정신을 고요히 하여 틈틈이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다산은 장기 지방의 풍속을 관찰하고 백성들의 어려움도 살피며, 이 사람들의 삶에 어떤 문제점과 괴로움이 내재해 있고 또 무엇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에 대해 늘 궁리하였다. 다산의 학문이나 사상의 기틀은 이렇게 장기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실로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 그 당시 백성들은 가난했고 그나마 일부 몰지각한 벼슬아치들에게 착취당하고 있었으며, 부정과 불의가 만연하였고 불합리가 합리를 앞질렀다. 다산은 백성을 사랑하고 모든 정치는 백성을 위주로 행해야 한다는 민본·애민사상과 실용주의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한 다산은 장기에서 여섯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 중 《이아술(爾雅述)》·《삼창고훈(三倉    訓)》은 언어학 아니면 옛 문자학 저술로 짐작되지만 백서사건의 와중에 잃어버렸다. 여름에는 사단칠정 감정의 발로를 논한 《이발기발변(理發氣發辨)》 두 편을 지어 성리학 역사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가을에는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이란 예론에 관한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1659년 효종이 승하한 후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제에 대한 것으로 송시열의 예론을 비판하는 논변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아쉬운 저술은 바로 장기지방 풍토병을 주민들 스스로 대처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만든 눈높이 의서인 《촌병혹치(村病惑治)》이다. 의원이 없던 장기에서 본초강목 등의 의서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그 지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들로만 처방을 편집하여 구성한 향토의서이다.

또한 자식들과 약전형님에게 자신의 감정과 학문적 연찬을 드러내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며, 자신의 귀양 온 심경과 장기 풍물에 대한 시를 집필하기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시는 <기성잡시 27수>를 비롯하여 <장기농가 10수>, <고시 27수> 그리고 성호 이익이 모아놓은 속담에 운을 달아 시로 만든 <백언시> 등 120여 수가 넘는다. 이들 중 저술은 다음에 강진 유배기에 다시 보완 재편되나, 시편들은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당시 다산의 느낌과 견문을 잘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또한 문체와 운율에 있어 중국의 시풍을 닮을수록 좋은 시라고 추켜세우던 때에, 대담하게 사투리 등 토속적인 언어들을 시어로 등장시켜 우리의 정서에 맞는 생동적인 표현이 가능하도록 했던 점은 문학적 측면에서는 탈중국의 새로운 시도였다. 이에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다산의 시는 높은 수준의 예술성뿐만 아니라, 근대 우리말 연구의 실증적 자료로도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다산의 문학적 관찰력은 예술적 차원을 넘어 당시의 정치·사회·경제적인 모순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부패관리들로부터 농어민들이 겪고 있는 수탈의 고통에 대해서도 외면하지 않았다. 순박한 백성들이 사회제도의 구조적 병폐에 희생물이 되어야 하는 현실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칠 때도 시를 지으며 외로움을 달래었다.

다산은 전 생애를 통하여 총 509권의 책을 저술하여 「여유당전서」에 실어 놓았는데, 한 사람의 저술로서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방대한 분량이며 위대한 업적이기도 하다. 다산의 일생 중 장기에서의 7개월은 가장 비참한 유배시기였지만, 다산의 사상과 문학과 정신에 있어서는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 넣어준 곳이다. 또한 노동요·풍속시·우화시·비유시 등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생활 등을 적나라하게 간파하는 등 불후의 명시들을 창작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장기는 다산학에 있어서 새로운 시발점이며, 다산문학의 산실인 것이다. - 다음 호에는 <다산 사랑하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