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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읽는 대구순교자 20위 - ⑨ 김시우
김시우 알렉스


김혜영(율리엣다)|포항 대잠성당, 동화구연가

김시우 알렉스는 연산 김씨로 1782년경 충청도 청양 고을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사람들은 그를 시우재라고도 불렀지요. 김 알렉스는 성품이 착하고 어질었으며 열심한 신앙을 가졌어요. 그러나 오른쪽을 못 쓰는 반신불수의 몸이었고 살림살이도 몹시 가난하여 장가도 가지 않고 혼자 살았어요.

가난하고 몸이 불편해서 교우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살았지만, 학식이 높고 재간이 많아 왼손으로 서책들을 베껴 그것으로 생계를 도왔어요. 또 그는 십계 외에 칠극과 십사애긍 등 여러 조목을 익혔고, 기회 있을 때마다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거나 외교인들을 가르쳐 입교시켰어요.

그는 신유박해 때 포졸들의 추적을 피해 진보 머루산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충청도와 영남지역을 오가며 열심히 전교에 힘썼어요.

1815년, 김 알렉스는 부활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다른 교우들과 함께 멀리 떨어진 청송 노래산의 부활전례에 참례하게 되었어요. 한참 전례가 거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청송아문의 포졸들이 들이닥쳤어요. 많은 교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가게 되었지만 김 알렉스는 불구라고 잡아가지 않았어요. 그러자 그는 울기 시작했어요. 포졸들이 영문을 몰라 물었어요.

“어째서 우느냐?”
“나도 천주교 신자인데 불구라고 잡아가려고 하지 않는군요.”
“뭐라고? 네가 정 함께 가고 싶다면 가자.”
김 알렉스의 얼굴은 다시 환해지며 기쁜 마음으로 교우들의 뒤를 따랐어요. 경주진영에 끌려가서 불구의 몸으로도 여러 번 형벌을 당해야 했지만 그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믿음을 증거했어요.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관원들조차도 칭찬을 하게 되었지요.

대구로 이송되어 처음에는 영장 앞에 다음에는 감사 앞에 끌려 나가 심문을 받았어요. 경상감사 이존수는 정통사대부로 유교를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을 아주 싫어했어요. 감사가 그에게 물었어요.
“네가 예수를 흠숭한다고 하는데 그 예수라는 자가 저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매에 죽은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 맞아 죽은 사람을 흠숭할 이유가 무엇이며 그의 죽음이 어째서 그리 훌륭하단 말이냐?”

감사의 물음에 김 알렉스는 중국의 고전을 들어 당당히 말했어요.
“9년 동안 장마가 졌을 때에 하우 임금은 나라를 끊임없이 두루 다니시며 백성을 구하려고 갖은 일을 다 해보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자기 궁궐 앞을 지나치면서도 궁궐에 들어가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훌륭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하기에 자기 백성의 물질적 구원밖에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하우 임금님이 고금을 통해 이름을 날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려고 온갖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이렇듯 세계 만방에 은혜를 베푸신 주님을 섬기지 않는 자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감사님도 예수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경상감사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어요.
“뭣이라고? 이런 건방진 놈을 보았나, 오히려 나를 보고 사학을 믿으라고? 여봐라, 저 놈이 더 이상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도록 만들어 줘라!”
경상감사는 화가 나서 김 알렉스의 턱을 부수어 말을 못하게 하고 고문을 한층 더 심하게 하라고 명령했어요. 모진 고문이 계속되었지만 천주의 존재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김 알렉스의 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했고 그 누구보다도 강했어요. 그는 끝까지 천주를 증거하였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지요. 그는 자기가 받은 선고에 서명을 한 후 감옥으로 돌아가 처형의 날을 조용히 기다렸어요.

 

감옥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고문을 받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몰라요. 천주교인들은 다른 죄수들보다 더 심하게 다루고 먹을 것조차 주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신자들은 짚신을 삼아 팔아서 먹을 것을 구하여 겨우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한쪽 손을 못 쓰는 김 알렉스는 그 일마저도 할 수가 없었지요. 오래지 않아 그가 가진 것이 하나도 없게 되자 먹을 것을 갖다 주던 사람이 그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주지 않았어요.

형벌로 인해 몸이 쇠약해진데다 굶주림까지 겹쳐서 결국 김시우 알렉스는 감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이는 그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온 지 두 달이 지났을 때였고, 그의 나이 34세였어요.

비록 불편한 몸이었지만 재간과 재능이 뛰어났고, 동정으로 살며 천주님만을 사랑했던 김시우 알렉스. 그는 굳건한 신앙심과 풍부한 학식으로 신앙의 씨앗이 제대로 뿌려지지 않은 영남지역에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열성적으로 노력했어요. 또 관원들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리스도를 변호한 용기는 그 당시는 물론이고 후대에까지 신앙의 본보기가 되었고, 우리는 그의 이름을 교회의 영광 중의 하나라고 칭송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