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말씀 묵상을 시작하며
‘피로 세워진 교회!’ 보편교회와 한국교회의 역사를 볼 때, 이 말은 지극히 맞는 말이리라. 우리 교회의 ‘근본’이 그러한 피로 세워진 교회임을 기억하며, 목숨을 바쳐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한 성인성녀들을 바라보고 본받고자 하는 ‘순교자 성월’이다.
그래서인지 9월의 복음들도 우리의 근본을 건드리는 말씀들로 다가온다.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인간의 한계들. 그것은 당연히 극복하고 치유 받아야 할 우리의 ‘근본’이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 자신이 ‘위선자’로서의 어두운 부분(첫째 주일)을 지니고 있음을 바라보라 하시며, 또한 ‘귀먹은 반벙어리’로서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신다.(둘째 주일)
또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우리의 ‘근본’들, 바로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할 우리와 우리 교회(셋째 주일) 그리고 꼴찌요 종이요 어린이로서 살아가야 할 ‘제자 됨’(넷째 주일)에 대해서 다시 일깨워 주신다.
곧 붉어지고 떨어질 낙엽들처럼, 겸손되이 고개 숙여 우리의 ‘근본’을 묵상해 보는 9월이었으면 좋겠다.
9월 3일 연중 제22주일 : 마르 7,1-8.14-15.21-23
왜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느냐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직접 그들에게 “너희 위선자들”이라 호칭하신다. 위선자! 인간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호칭이다. 진짜 위선자들이란 스스로 가식의 탈을 쓰고, 위선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그런 자신의 ‘꼴’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이들일 것이다. “누군가 온전히 깨끗한 두 손을 가지길 원한다면, 그에게 두 손은 없는 것이다.”(Charles R guy)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그들이 ‘위선자들’인 이유를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을 빌어 말씀하신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멀리 있다.’ 그리고 풀어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만을 지키려 한다.’ 또한 (생략된 바로 뒷부분들에 의하면)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 하느님의 계명까지도 저버리고’(9절)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마저도 폐기’(13절)한다고 말이다. 결국 입만 하느님과 관계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람의 것들’에 온통 사로잡혀 있기에,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마저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거나 폐기하기에’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13절)
복음은 늘 예수님 ‘부활의 빛’ 안에서 다시 읽혀지고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할 때, 우리에게도 ‘위선자들’이라 칭하시며 호통 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기쁜 소식’으로 다가온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람의 전통과 법’, 나아가 모든 ‘사람의 것들’ 위에 그것들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것’을 보여주셨다. ‘너희는 이미 깨끗이 손질되어 있는 가지이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장 참조) 바로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것’이 위선자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디딤돌이리라.
주님, 당신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사랑으로 저희를 이끄십니다. 전통과 율법과 계명이,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끈끈한 정이나 관계가 저희를 온전히 당신께로 이끄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소서. 사랑이라는 ‘당신의 것’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육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이들(갈라 5,13-26)이 되게 하소서. 입술뿐 아니라 온 마음과 삶으로 당신을 섬기고 당신의 영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9월 10일 연중 제23주일 : 마르 7,31-37
외 국생활을 조금이라도 경험한 이들은 누구나 ‘귀먹은 반벙어리’의 답답함을 체험한다. 귀가 열려 알아들어야 말을 하고 대화를 하고 그래야 사람들과도 함께 살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은 그리 쉽게 오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자기가 사는 세상과 사람들과 단절되어 홀로 견디어 내야 하는 이방인 반벙어리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진짜 어려움은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혼자 버려졌다는 소외감과 외로움이다.
비단 외국생활만이 아니다. 나 살기에 바빠, 혹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증오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이들 역시 귀먹은 반벙어리로 살아가게 된다. 세상과 다른 이들의 요구를 더 이상 듣지 못하고, 혹은 철저히 외면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결과는 스스로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혼자됨’의 체험이다. 이러한 영적인 귀먼 반벙어리의 삶에서는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하다. 있는 그대로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 그 누군가가 말이다.
얼마나 오랫동안인지는 모른다. 그가 귀먹고 반벙어리로 살아 왔는지. 하여간 그는 오랫동안 세상과 사람들과 단절되어 외로움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께 데려 온다. 그 ‘사람들’에게는 정확히 예수님께 드릴 청이 있다.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다른 치유이야기처럼 낫게 해달라든가 살게 해달라든가 하는 청도 아니요, 아무 말 없이 예수님께 알아서 처분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이 사람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익명의 이 ‘사람들’은 귀먹은 반벙어리의 진짜 어려움을 알고 있는 듯하다.
예수님 역시 사람들의 청을 알아듣고, 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을 보신 듯하다. 사람들의 청대로 손만 얹어 주시면 될 것을, 아니 말 한마디면 끝날 것을 오늘 예수님은 몇 단계를 거쳐 ‘꼼꼼히’ 그와 ‘접촉하신다.’ 일단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일대일의 시간을 만드시고, 당신 손가락으로 그의 두 귀와 혀에 접촉하신다. 바로 치유 받아야 할 부분을 직접 만지신다. 또한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내 쉬시며 당신과 하느님을 연결하고, ‘에파타(열려라)’라는 선언으로 당신의 ‘말씀’과 그가 접촉하게 하신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제 그가 다시 세상과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바로 ‘예수님과의 접촉’을 통해서이다. 더욱 자세히 말한다면 치유받는 이는 치유 하는 이를 통해 ‘하늘’과 ‘말씀’과도 연결되고, 나아가 함께 사는 ‘사람들’과도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이제 그는 결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주님, 당신은 오늘 서로가 서로를 치유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저희들에게 ‘꼼꼼함으로 접촉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그를 위해 기도할 때도, 그의 아픔과 외로움을 어루만져 줄 때도 말입니다. 청하오니 귀와 입이 닫혀버린 저희를 당신의 손길과 영으로 다시 어루만져 주소서. 그리하여 제 귀도 입도 마음도 다시 열려 당신 말씀을 듣고 아버지를 찬미하게 하소서.
9월 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 루카 9,23-26
“오늘 우리는 19세기 한국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 그리고 약 백여 명의 남녀들이 복음 전파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순교했음을 기억한다. 하느님의 기쁜 소식은 기묘한 방법으로 한국에 다다랐고 평신도들을 통해 현저히 확산되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그들에게 신앙을 증거 하는 길을 걷도록 힘을 주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한국에서 굳센 믿음이 꽃피도록 하였다.”
독일의 사제들을 위한 매일 미사에 나오는 9월 20일자 내용이다. 이날 전 세계의 교회는 의무기념일로 한국의 순교성인들을 기억하며 또한 한국교회와 한국의 신자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한다. 매년 이날 그 누구보다 더 정확한 발음으로 ‘김대건’과 ‘정하상’을 부를 수 있는 것은 한국인 사제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란 ‘내가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극복해야 할 과업이지 십자가는 아니리라. 예수님도 당신이 어찌 할 수 없는 그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 들이셨고, 그 ‘어찌 할 수 없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과 부활을 가져다 주셨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십자가가 의미 있어짐은 먼저 예수님처럼 그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일 때이리라.
한국교회보다 더 오래된 성당에서 매일 미사를 하며, 종종 성당 벽면에 부조된 천사들보다 적은 숫자가 참례하는 미사를 지내며, 오매불망 젊은 사제는 한국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우리 교회의 위기를 이야기한다. 특별히 ‘복음화’되지 못한 우리의 거품 신앙, 그래서 곧 유럽교회의 위기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2000년 교회의 역사상 교회가 위기에 처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위기를, 그 위기의 십자가를 끊임없이 지고 살아 온 교회가 바로 약 1500살 유럽교회이다. 지는 교회, 망하는 교회로 이야기 하지만, 이들과 함께 사는 나는 그들 신앙과 삶의 무게에 고개를 숙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십자가를 생각해 본다. 우리 교회의 역사는 200년, 아니 제대로 틀을 갖추어 살아온 시간들은 길게 잡아야 100년, 짧게는 해방 후 60여 년이라 할 수 있다. 인생으로 따지면 아직 제대로 죽어 보지 않은 나이, 젊어도 한참 젊은 교회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젊음도 십자가가 되고, 그 안에서 진정한 ‘복음화’를 위한 모든 노력과 시행착오도 때론 십자가가 되리라. 당연 붉어지는 여러 ‘위기들’도 우리 교회가 받아 안아야 할 십자가이리라.
우리가 우리 교회의 위기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살려는 자 죽을 것이요, 죽으려는 자 살 것이다.’(24절 변형)
한국의 103위 성인 성녀들이여,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와 저희 교회를 위해 빌어 주소서.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 마르 9,30-37
예 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가운데에 세우신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논쟁하던 제자들 앞에 말이다. 카파르나움의 한 집안. 누구의 집인지, 그 집에 사는 아이인지, 모두가 잘 알고 귀여워하던 아이인지 복음은 전혀 이야기 하지 않고 있다.
오직 영상 하나가 그려진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쪽엔 ‘자신들의 주제’와 높아지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엔 (예수님께 안겨 있는) 한 어린이를 그려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한쪽엔 아직 예수님의 일과 사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소위 ‘그분의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엔 그저 예수님께 자기를 맡기는 한 어린이가 있다. 예수님의 기준은 명확하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다.”(마르 10,14 참조)
어느새 ‘어린이’는 제자들, 바로 ‘그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존재로 변화된다. 어떤 어린이인가? 바로 직전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어린이는 ‘꼴찌 중의 꼴찌’, ‘모든 이의 종’을 표상한다. 그것도 예수님께 그저 품을 맡기며 안기는,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겨드리는 자’이다. 바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한 어린이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이 아니리라. 어린이로서, 꼴찌로서, 종으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스스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리라. 그것이 바로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나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인가? 사제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자신이 받은 소명 안에서 늘 되묻게 되는 질문이다. 벌써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살아 왔음에도 인간적인 열망과 판단을 버리기 힘들다. 때로는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며’ 내 문제에만 몰두하여 살아가게 된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다시 한번 일깨워주신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너의 자리는 꼴찌요, 종이요, 어린이의 자리라고. 사실 참으로 모호하고 어렵게 다가오는 예수님의 요청이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에겐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더 많은 선을 행하십시오.”(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라는 성인의 가르침이 더 쉽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주님, 일등만이 최고인 세상에서 당신은 꼴찌가 되라고, 모든 이의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함을 지향하면서도, 저희 몸과 마음은 어느새 모든 것의 중심이 되려고 몸부림치고 있음을 반성합니다. 저희가 다시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저희가 진정한 ‘당신의 사람들’로 살게 하시고, 작은 자, 봉사자로서 온전히 누리게 될 자유와 기쁨을 깨닫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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