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청도입니다.” 탁 트인 곳,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일까 푸른 녹지를 이루는 산과 들이 눈이 시리도록 들어온다. 푸른 자연에 매료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는 동안 기차는 어느새 청도에 도착했다.
옛 시골의 정취를 맘껏 풍기는 이곳 청도에 삼한제국의 소국(小國) 이서국의 왕이 머물던 자리에 ‘옹달샘 가족피정의 집’을 짓고 은퇴 후 또 다른 삶을 보내고 있는 김상목(다미아노) 신부를 찾아 뵈었다.
4대째 내려온 구교집안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상목 신부를 어머니 마리아 여사는 미사에 참례할 때면 새끼를 품고 다니는 캥거루처럼 늘 데리고 다녔다. 김상목 신부는 “그래서 어릴 때 별명이 캥거루였다.”면서 “어머니는 나의 신앙의 본보기였으며 동반자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며 단 한번이라도 아침·저녁 기도를 빼 놓는 날이면 불호령이 떨어졌지만, 항상 자식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었다. 그런 영향 탓인지 김상목 신부의 마음에도 성소가 싹텄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오늘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44년 사목생활 중, 절반은 군종 신부로 군사목에 앞장섰고 나머지 절반은 본당 사목에 힘썼던 김상목 신부는 “지난 삶을 뒤돌아보면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은 복 많은 사제였다.”며 “개신교와 불교가 독식했던 해군 군종감을 해군 역사상 처음으로 가톨릭 사제로서 올랐고 무엇보다 성당 하나 없던 해군에 성전이 건립된 일 등 어렵고 불가능했던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늘 함께 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감회를 밝혔다.
군종 신부로 사목하던 시절, 미사를 봉헌할 장소가 없어 개신교의 예배당에 얹혀서 미사를 드렸던 일, 성모님을 모실 공간이 변변치 않아 사제관 마당에 모신 일, 신자들과 함께 성모님께 9일 기도로 성당을 청했던 일,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어 국가 예산으로 성당을 마련하게 된 일 등 군종 신부로 복음화에 매진했던 22년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은혜로운 은총을 받은 때였고, 특히 성모님의 전구를 크게 깨달은 때라고 회고한다.
본당 사목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충실한 삶을 살아온 김상목 신부는 “전역을 하고 처음으로 본당 사목을 나간 윤일성당에서 주일학교 아이들과 기타 반주에 맞추어 부르던 노래들, 사제관을 놀이터 드나들 듯 했던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어른거린다.”며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 뒤로도 사목지를 옮길 때마다 겸손을 배우고, 말씀의 은혜로써 신앙의 성숙을 기뻐할 수 있었던 일 등 다채로운 기억이 생각난다고 한다. 또한 마지막 사목지인 청도성당은 노사제의 모든 것을 수용하며 사랑으로 감싸주었던 신자들의 마음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본당사목을 했던 22년 중, 일분 일초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없을 정도로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은 컸다고 한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가정이 해체되는 등의 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대화가 사라지고, 사랑이 사라지고, 신앙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김상목 신부는 “기회가 되면 가족들을 위한 피정의 공간 또는 휴식의 공간, 대화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차 하느님의 은총으로 기회가 빨리 찾아왔다.”며 ‘옹달샘 가족 피정의 집’의 탄생비화를 들려준다.
‘옹달샘’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김상목 신부는 “새 사제들의 첫미사에서 강론을 할 때면 항상 옹달샘에 빗대어 신자들의 맑은 물이 되어 달라고 해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옹달샘이란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면서 “깊은 산 속의 맑은 물, 때가 묻지 않은 상태로 하느님의 은총을 뜻하기도 하며 한평생을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다.”며 가족 피정의 집 이름도 또한 그래서 ‘옹달샘’이다.
깊은 산 속 아무도 닿지 않는 옹달샘처럼 세속에 찌든 때를 벗기고, 하느님 안에서 작은 휴식처가 되었으면 하는 노사제의 마지막 소망처럼 우리도 다시 한번 신앙을 되돌아 보고, 주어진 일에 욕심을 부리기 보다는 내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한다.
* 옹달샘 가족 피정의 집 : 문의 054) 371-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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