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평화를 위해 애쓰며 ‘여기애인(如己愛人, 타인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뜻)’의 삶을 몸소 실천하여 살았던 나가이 다카시 박사(1908-1951). 그의 정신을 기리고 전쟁이 없는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인 한·일 ‘여기회(如己會)’ 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8월 19일(토) 대구 남산동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대강당. 한국 여기회(총재:이문희 대주교, 회장:김규동) 초청, 2박 3일의 여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일본 여기회 회원 37명을 포함한 150여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영애 쯔쯔이 가야노(65세) 여사의 강연이 있었다.
“나의 아버지 나가이 다카시 바울로”라는 제목의 이날 강연에서 가야노 여사는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사람에게는 좋은 것을 주어라. 혹시 네가 그것이 필요하다면 하느님께서 너에게 그것을 채워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서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작은 것 하나도 더 가지려고 하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가야노 여사는 “어린 시절 제 기억에 있는 아버지는 항상 묵주기도를 참 많이 바쳤던 것으로 남아있고, 또 저에게도 묵주기도를 많이 바치라고 하시면서 어린 저에게 노래까지 만들어 불러 주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50년도 더 되었는데 아직까지 기억나는 노래라며,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언제나 묵주기도, 무엇이든지 묵주기도, 곧바로 묵주기도, 모두가 묵주기도”라는 노래를 강연하는 도중 잠시 들려주었다.
원폭 투하로 폐허가 된 자신의 집 앞마당에 1평(다다미 2쪽) 남짓의 ‘여기당(如己堂)’이라 이름 붙인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글을 쓰고 나눔의 사랑을 실천하며 전쟁이 없는 세계 평화를 호소하며 살다간 나가이 다카시 박사. 그런 아버지를 추억하는 일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고 말하는 가야노 여사는 “많은 성인을 배출해 낸 한국을 방문하게 되어 대단히 기쁘다.”면서 “일본에 돌아가면 곧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게 될 텐데, 바다 건너에서도 오늘을 기억하며 여러분들을 위해 함께 기도할 것.”이라고 했다.
가야노 여사에 앞서 강연한 이는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친손자인 나가이 독사부로(40세).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현재 나가사키에 있는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의 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강연에서 “비록 할아버지를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할아버지를 찾는 이들과 함께 할아버지 얘기를 하고 사진을 보고 그림을 보며 할아버지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고 몸으로 익혀가고 있다.”고 말하며 “세계의 평화를 소원하는 마음,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은 비단 할아버지만이 가진 특별한 감정은 아닐 것이다. 이는 전 인류가 살면서 느끼고 가지고 있는 감정으로, 모두가 나가이 다카시의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행사는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의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생애에 관한 저서 《사랑으로 부르는 평화의 노래》(2000, 가톨릭출판사) 한국어판을 2001년 일본어판으로 출판하면서 일본 여기회와의 인연을 맺는데 도움을 준 스스키다 노부루(예수회 소속으로 일본 여기회 지도신부) 신부와 그 관계자들도 함께 하여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평소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의 생애를 소개하는 책까지 펴낸 이문희 대주교는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어떤 부분에 감흥을 받았냐는 질문에 우선 “사랑.”이라고 짧게 답했다. 그런 다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살다간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사랑과 죽을 때까지 평화를 위해 애쓰면서 단 1평짜리 쪽방 여기당에서 살다간 그의 모습은 신앙인으로서 본받을 만한 모습.”이라며 “사랑은 모든 이가 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여기회에 이어 한국에서 ‘여기회’가 설립된 것은 2004년 일본 나가사키 여기당 성지순례를 다녀온 신자들에 의해서이다. 처음에는 ‘여기회 자문위원’으로 모임을 시작하다가 2005년 1월 정식으로 창단된 한국 ‘여기회’는 현재 350여 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창립 이후 매월 한 차례의 모임을 갖고 있다. 특별히 이번 행사는 강연을 통한 한·일 여기회 회원들의 문화 교류와 더불어 첫 만남의 장으로 마련하게 된 것이다.
방문 첫 날인 19일(토) 대신학원 대강당에서의 강연과 소성당에서의 미사 그리고 교구청 내 가톨릭교육원 사제관 식당에서 가진 한·일 여기회 교류 만찬의 시간을 보낸 일본 여기회 회원들은 이튿날인 20일(일) 이른 아침 대구 성직자 묘지를 참배하였다. 묘지 참배를 통해 스스키다 노부루 신부는 일행들에게 “과거 한국에는 슬픈 비극의 역사가 있었다.”고 설명하며 “이제 더 이상 슬픈 역사가 없도록 우리 모두 세계 평화를 위해 다함께 기도하자.”며 평화를 비는 묵주의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제3대 대구교구장 하야사카 구베에(이레네오, 1888.12.15-1946.1.6) 주교의 묘역에서도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성직자 묘지 참배 후 일행은 관덕정 순교기념관을 방문한 다음, 주교좌 계산동성당에서 이문희 대주교의 주례로 주일미사를 봉헌하였다. 셋째 날인 21일(월), 일본 여기회 한국 방문단 일행은 2박 3일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을 떠났다.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로 사랑하는 아내 미도리가 한줌 재로 변해가는 상황에서도 원폭 피해 환자들을 돌보느라 아내를 찾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잿더미 속에서 아내의 유골과 엉겨 붙은 아내의 묵주를 찾은 나가이 다카시 박사. 핵의학 박사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았던 그는 백혈병으로 어린 남매를 두고 195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반전·반핵운동을 위해 애쓰며 ‘여기애인’의 삶을 몸으로 살아냈다. 원자탄의 참상을 그린 《나가사키의 종》으로 일본 전역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묵주알》, 《영원한 것을》, 《이 아이를 남겨두고》 등의 저서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한 사람의 삶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음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다간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깊은 신앙과 사랑의 삶, 곧 ‘여기애인’의 삶 때문일 터. 그가 나가사키에 남기고 간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는 많은 이들의 가슴에 오래토록 기억될 것이며, 나아가 그 사랑을 살게 할 것이다. “사랑은 모든 이가 행해야 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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