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 예수님! 저는 경주 성동성당 빌기공소에서 신학생 복음화 과정을 지내고 있는 여현국 디모테오 신학생입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올해 3월부터 시작된 신학생 복음화 과정도 벌써 11월을 맞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열심히 복음화 삶을 살았는지 다시금 되돌아봅니다.
이 곳 빌기공소는 단석산 끝자락 내남면 비지리에 위치한 곳으로 3대, 4대에 걸쳐 내려온 신앙이 공소 신자 분들의 삶을 이끌어 가고 있는 곳입니다. 공소에는 ‘요리강령(要理綱領)’이라고 하는 아주 오래된 교리책이 한 권 있습니다. 이 책의 첫 부분은 이런 말로 시작됩니다. “천주 우리를 조성하심은 당신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다가 영생을 누리기를 위하심이니라.” 이 곳의 신자 분들은 이 책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신자 분들의 삶을 보면 일이나 현세의 삶보다는 기도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사시는 듯합니다.
이 글을 쓰게 되면서 <빛>잡지 애독자 여러분들께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릴지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신학생 복음화 과정을 살고 있는 신학생들은 모두 ‘신학생 복음화과정 일지’를 씁니다. 하루하루를 살며 느낀 점들과 그 삶을 통해 만난 예수님의 모습을 글로 남기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특별히 여러분들을 그 일지 속으로 초대할까 합니다. 저를 따라 오시겠습니까?
이야기 하나
드디어 앞으로 남은 올 한 해를 보내게 될 빌기공소에 도착했다. 공소 앞마당에 깔린 예쁜 잔디밭과 공소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예수 성심상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가져온 옷들과 이불, 책 등을 정리하고 깨끗이 청소도 했다. 많지도 않은 짐이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다. 저녁때 공소회장님 댁으로 가서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가 잃었던 아들을 다시 맞아들이듯 무척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신학생 복음화 과정의 세 번째 추억을 만들어가게 될 이 곳에서의 생활이 벌써부터 기대된다.(1차 파견은 죽도본당 기계공소, 2차 파견은 빌기공소인데 사정상 고령본당 운수공소에서 2개월가량 있었습니다.) 기계공소나 운수공소, 어느 곳 하나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이 곳 빌기공소에서의 생활도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어느덧 밤은 깊어졌고 공소 제대 위에 있던 독서대를 가져와 방에 기도상을 꾸미고 하느님께 나를 맡기는 마음으로 성무일도 끝기도를 바쳤다.
이야기 둘
오늘 처음으로 빌기공소에서 공소예절을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말끔히 정장을 입고 넥타이까지 맸다. 그런데 좀처럼 아무도 오시지 않는다. ‘너무 일찍 일어났나?’ 그러는 와중에 한두 분씩 오시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이셨다. 몇몇 분들은 이미 얼굴이 익은 분들이셨다. 며칠 전에 이미 공소에 불이 켜져 있기에 “학사님 왔나 보네.” 하시며 불편한 것은 없는지 들여다보고 가신 분들이셨다.
공소 예절서를 보며 공소예절을 진행하고 얼떨결에 준비하지도 못한 강론까지 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주보 1면에 나와 있는 한 신부님의 강론을 읽어드렸다. 그럼에도 “학사님이 오셔서 강론까지 해 주니 너무 좋다.”고들 하신다. 다음 주 강론은 열심히 준비해야겠다. 공소 예절 후에는 신자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소에 학사님이 와가 예절도 같이 하고 공소도 깨끗하이 참 좋네예.”라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관심 가져 주시고 신경 써 주시니 내가 감사할 따름이다.
이야기 셋
오늘은 한 형제님의 논에 가서 벼 타작하는 일을 도와드렸다. 원래 시골 출신인지라 자신만만한 마음으로 갔었는데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을답지 않은 뜨거운 햇볕에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얼굴과 목, 팔은 날리는 볏짚 가루에 가려워 죽을 지경이다. 때마침 “참 먹고 하이소!”라고 하는 자매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시원한 얼음물과 사과는 세상 어떤 음식보다 달고 맛있었다. 휴식은 잠시, 일은 끝날 생각을 안 한다. 형제님은 무릎 관절이 좋지 않으시고 자매님도 허리 디스크가 있으시지만 힘든 내색이 없으시다.
문득 어린 시절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힘든 벼농사, 참외 농사 가운데 나와 동생의 말썽에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그때 난 비 오는 날을 싫어했었다. 밖에 나가서 놀지도 못 하고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낮잠을 주무셨기 때문에 집에서도 시끄럽게 장난을 치면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들었었다. 하지만 내일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에 은근히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오늘은 부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해야겠다.
이야기 넷
오늘은 공소예절 때 묵주기도 성월을 맞아 손수 만든 묵주 팔찌를 신자 분들께 선물로 드렸다. “뭘 이런 걸 다 사주시노?” 하시길래 직접 만들었다고 말씀드리니 무척 좋아하셨다. 경주에서 서문시장까지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했던 것과 다리 저려가며 만든 고생이 한꺼번에 씻겨져 가는 느낌이었다. 한 할머니께서는 기도해 주신다며 내 이름과 세례명을 적어가셨다. 작은 선물 하나에 내가 얻은 기쁨과 보답은 오히려 내 정성이 무색할 지경이다.
공소예절 후에는 기타 반주를 하며 신자 분들과 성가 연습을 했다. 가톨릭 성가 ‘주 예수 따르기로’와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를 가르쳐 드렸다.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묵주 팔찌 성원에 용기를 내어 했던 것인데, 반응은 너무 좋았다. “우리도 되네. 아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하신 한 할머니의 탄성이 아직도 머리 속에서 떠나지가 않는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 1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 능력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인 것 같다. 내친김에 다음 주 강론은 기타 반주에 노래로 준비해 봐야겠다.
이야기 다섯
오늘은 구름 한점 없고 햇볕은 따뜻한, 너무 좋은 날씨다. 이런 날은 나들이 가기에도 좋은 날씨이지만 젖은 옷가지들을 말리기에도 참 좋은 날씨다. 그래서 오전에는 빨래를 했다. 이제 더 이상 손빨래도 힘들지가 않다. 예전에는 두 시간이나 걸리던 것이 이제는 요령이 생겨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끝난다. 여름에 이 곳을 둘러보러 왔을 때 공소 앞개울에서 이불 빨래를 하시던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이 생각난다. 그만큼 이 곳은 공기 좋고 물도 좋은 곳이다. 개울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빨래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지만, 현실은 조금 힘들 것 같다. 10월에 이 곳에 온 이후로 그 모습은 다시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요즘은 집집마다 세탁기가 다 있을 것이고, 가을이라 물도 차기 때문이다. 그 날은 날씨가 무척 좋았거나, 아니면 특별한 날이었나 보다.
오후에는 마을 뒤에 있는 단석산에 올라갔다. 그리 높은 것 같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구불구불한 길은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시 내려갈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햇빛을 가리던 나무들이 사라지고 마침내 정상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그 곳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이었다. 호수와 산책로, 넓은 평원…. 근처에 사진 찍고 있는 분이 계시기에 여쭤보니 ‘OK목장’이라고 하셨다. ‘아, 여기가 말로만 듣던 그 OK목장이구나!’ 무척 평화로운 곳 같았다. 날이 저물어가고 있어 서둘러 내려와야 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엔 도시락 하나 싸들고 여유롭게 돌아보고 와야겠다.
어떠셨습니까? 제가 ‘신학생 복음화 과정 일지’에 썼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해서 써 보았습니다. 사람은 어디를 가나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끼곤 합니다. 이 글이 <빛>잡지에 실릴 무렵이면 올해 신학생 복음화 과정이 끝났거나 막바지쯤일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것들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의 은총과 좋은 경험할 수 있도록 관심 가져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언제, 어느 곳을 가게 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기쁘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