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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복음 묵상을 시작하며…
화가인 한 스승에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왜 그림을 그리십니까? 스승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쳐다보며 답하길, ‘그림을 그리는 일이 이미 내 삶이 되어버렸는데, 제게 왜 숨을 쉬고 사냐고 묻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한 해를 시작하며 소망해 본다. 당신은 왜 신부로 사느냐고, 당신은 왜 성당에 다니느냐고, 당신은 왜 성경을 읽느냐고, 당신은 도대체 왜 이 일을 하고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 어떤 이유나 목적도 아닌, 그저 숨쉬는 일처럼 삶이 일상이 되어버렸노라고 말할 수 있기를, 또 그렇게 살아내기를.
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 2,1-12
1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4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에피파니아(공현) 축일, 성탄의 신비 안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나신’ 날, 즉 세상이 드디어 그분을 알아보기 시작하였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복음은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찾고 알아보고 경배해야 하는지 초대한다.
두 임금이 등장한다. 하나는 현재 유다인의 왕인 헤로데, 또 하나는 태어날 ‘유다인들의 임금’이며 ‘메시아’인 한 ‘아기’이다.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기에 비해,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현세의 왕 헤로데. 그런데 상황은 다르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는 말에서 보듯, 약속된 메시아의 탄생은 헤로데에게조차 ‘경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마음 없는 그의 ‘거짓 경배’는 무죄한 아이들의 피로써 이루어지고(16절),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던 그의 능력은 살인이 한계였다.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한 아기는 모든 것을 영원히 살리는 생명을 가져다준다.
장면을 바꾸어 보자. 그저 ‘그분의 별’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에까지 이른 동방박사들은 어려움에 봉착했음인지 도움을 얻고자 했는지, 현세의 왕인 헤로데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현세의 왕을 통해, 그의 도움으로 새로운 왕인 ‘한 아기’를 드디어 발견하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헤로데의 지시’가 아니라, 새로이 태어난 아기가 중심이 되는 지시(꿈을 통해)에 순응하며, ‘자기 고장으로 돌아간다.’
헤로데를 중심에 두고 이처럼 두 가지를 묵상해 볼 수 있으리라. 먼저 마음 없는,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그의 ‘거짓경배’는 무죄한 이의 피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한 그런 극악무도 반대자요 살인자인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왕의 생명을 처음으로 위협하는 인물인 헤로데 그리고 마침내 그 아기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빼앗아가는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동방박사들의 ‘메시아 찾아가기’ 여정에 도움을 주고 있다니…. “악에서조차 선을 이끌어 내시고, 죽음에서 조차 생명을 이끌어내실” 새로 난 구세주는 당신의 탄생에서부터 이미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일까.
한해를 시작하며, 혹 그분께 대한 나의 경배가 어떤 나의 이익이나 목적만을 위한 ‘거짓경배’는 아닌지 꼼꼼히 되돌아 볼 일이다. 나의 그 거짓경배의 삶을 통해 ‘피 흘리며’ 아파하는 이들이 주변에 있는지, 없는지도…. 하지만 너무 상심말기를, 그러한 나일지라도 그러한 나를 통해서조차도 그분께서는 누군가를 당신께 인도하는 도구로 만드실 수 있다는 것. 혹 스스로 판단하기에 내 주변에 수많은 헤로데 같은 이들이 있다고 여기는가?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악에서조차 선을 이끌어내시고 죽음에서조차 생명을 이끌어 내시는 분”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나는 그들을 통해서조차 그분께 나아가는 ‘길’을 끊임없이 발견해야 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의 삶과 믿음 안에서 늘 새로이 태어나시는 ‘생명이신 그분’께 향하는 길을 말이다.
주님, 새해의 첫 주일, 당신 성탄의 신비에 다시금 빠져듭니다. 저희의 매일이 새 생명이요 새 질서인 당신의 탄생을 기리는 나날이 되게 하소서. 거짓경배의 헤로데가 아니라, 보석처럼 빛나는 진솔하고 겸손한 삶의 예물로 당신께 경배드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 역시 당신을 ‘드러내는’ 또 다른 별이 되게 하소서. 나날이….
1월 14일 연중 제2주일 : 요한 2,1-11
1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2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3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4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5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6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7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8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9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10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11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복음, 희한한 혼인잔치이다. 새로운 하나의 가정이 탄생하는 혼인잔치에서 신부는 보이지 않고, 새로운 부부도 탄생하지 않는다. 복음 말미에 탄생하는 것은 ‘그분의 영광’과 ‘제자들의 믿음’이다. 진정 예수님이 드러내시는 ‘표징’(11절)으로 알아들어야 할 혼인잔치이지, 소위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마치 마술 같은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복음말씀이리라.
직접적인 설명이 아니라 표징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서인지, 카나의 혼인잔치는 더욱 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누구의 혼인잔치였는지, 왜 예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졌음에 관여를 하는 것인지, ‘때가 오지 않았다.’던 예수님은 왜 갑자기 일꾼들에게 이런저런 명을 내리시는지, 갑작스레 혼인잔치에 왜 제사(정결례)를 위해 쓰이는 물독이 등장하는지, 물독의 포도주가 정말 모두 다 포도주로 바뀌었는지, 변한 포도주를 모든 사람들이 다 맛보고 즐거워했는지, 이런 모든 질문에 복음은 그저 ‘철저히’ 침묵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표징이고, 무엇을 드러내는 표징인지?
(그래서 복음이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꿈속을 헤매듯 공상하며 묵상해서는 안 될 말씀 중의 하나이다. 예컨대 어머니의 말 잘 듣는 아들로서 예수님, 그러니 우리는 더욱더 성모님께 간구해야 할 것이다? 나도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들어야겠다? 제발, 별 상관이 없다! 구태여 그분의 어머니에 대해 묵상을 하려면, 십자가 아래로 가볼 일이다. 요한복음에선 딱 두 번 ‘예수의 어머니’가 등장하는데, 바로 오늘 카나의 혼인잔치와 십자가 곁(19,25~)이다. 그것도 마리아라는 이름은 없고, 그저 ‘그분의 어머니’로 호칭될 뿐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첫 ‘표징’의 자리에 계셨던 ‘그분의 어머니’는 그분이 보여주신 마지막 표징 중의 표징인 ‘십자가’ 아래까지 동행하신다. ‘그분의 어머니’마저 요한복음에선 무언가 드러내는 표징들 중 하나가 된다.)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시작에서 보듯, 이미 카나의 혼인잔치 전체는 ‘예수님의 부활’에 휩싸여 있는 표징들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물에서 포도주로 ‘건너가는(Exodus)’ 새로운 질서, 구약의 정결례를 위해 물을 담던 물독에는 이제 새로운 (신약의) 포도주가 담기게 되고, 좋은 포도주로 칭찬받는(들여 높여지는) 신랑. 그러한 표징들을 목격한 제자들의 반응은 놀라움이나 찬사가 아니라 바로 ‘믿음’이었다.
‘첫 번째 표징’이라는 말을 원어에서 보면 ‘표징들의 시작(아르케, arche)’ 내지 ‘표징들의 처음’이라 해석할 수 있기에, 이 카나의 혼인잔치와 요한복음이 드러내는 다른 표징들은 모두 하나의 거대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표징들의 덩어리’인 요한복음 전체는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드러내는 ‘표징들의 복음’이다. 요한복음사가의 말을 빌린다면 그것은 오로지 ‘믿도록’, ‘믿어서 그분 이름으로 생명을 얻도록’(20,30-31 참조)하는데 있다.
무엇에 대한 믿음인가? 한마디로 부활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분께 대한 믿음이다. 결국 복음전체는 ‘믿음’이 목표이지, ‘기적자체’, ‘표징자체’가 목표가 아닌 것이다. (카나의 혼인잔치 다음을 한번 쭈욱 읽어본다. 성전정화사건의 말미(2, 22)에서도 그 다음에서도(2, 23),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3, 12절~) … 계속해서 ‘믿음’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나날과 세상은 때로 그저 기적만을 바랄 정도로 힘겹고 막막하다. 그럼에도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삶도 하나의 거대한 프로그램이라 할 때, 우리가 그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찾고자 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니라, 바로 그분께 대한 ‘믿음’이어야 하리라. 나의 삶의 자락자락에서 드러나는 많은 사건들, 만남들, 희로애락들…그 안에서 우리가 오로지 하나, ‘믿음’을 제대로 발견하고 산다면,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기쁨과 생명은 ‘그리 멀지 않은 현재’일 것이다.
주님, 말씀 안에서 말씀하시는 당신의 영은 찬미 받으소서. 저희가 저희 삶을 통해 그 무엇도 아니라, 오로지 당신께 대한 ‘믿음’을 발견하게 하소서. 그 믿음으로 저희를 ‘다시 살게’하소서. 저희가 당신을 두고 누구에게로 떠나가겠습니까?(요한 6,68)
1월 21일 연중 제3주일 : 루카 1,1-4·4,14-21
1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2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3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14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책 을 읽어야 하는 요즘, 책의 서문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왜냐하면 그 책의 서문에는 그 책이 담고자 하는 것 그리고 담는 방법 내지 목표가 잘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제의 첫 강론, 선생님의 첫 수업, 첫 만남 데이트에서의 말마디들은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모두 떨리는 기분 좋은 체험이다. 그 안에 이미 그가 들어 있기에.
오늘 우리는 두 가지 시작을 접한다. 하나는 루카복음서의 시작, 다른 하나는 어른이 된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활 시작이다. 두 개의 시작처럼 보이지만, 하나는 다른 하나를 증언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를 자세히 밝혀준다.
첫 붓을 드는 루카복음사가를 상상해보라. 아마 그는 벅찬 감동과 확신으로,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에 밀려 복음서를 시작했을 것이다. 바로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이 ‘진실’하다고, 우리가 ‘전해 받은 것들’이 확실하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에 대해 외치지 않을 수 없었을까? 그것을 루카는 자신의 서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서문이라 할 수 있는 공생활의 시작에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직접 선포한다. “주님의 영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는” 예언자의 사명이 바로 예수님 자신, 그분의 ‘행적과 가르침’(사도 1,1)을 통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반추하는(‘듣는’/‘기억하는’) 루카에게 그분의 말씀과 삶은 과거에 한 번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이루어지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의 복음서를 통해 그분의 말씀과 삶을 다시 듣는 / 읽는 이에게도 그 말씀은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로이 다시 이루어지는’ 사건이 된다. 그래서 루카는 복음서의 수신자로 ‘하느님께 친근한 자’, 바로 ‘하느님의 친구’라는 뜻을 가진 ‘테오필로스’란 이름을 택했는지 모른다. 루카도, 이제 그의 복음서를 읽는 테오필로스도, 나아가 하느님의 친구요 자녀인 우리도 모두 ‘그분 말씀 안에’ 하나가 된다.
주님, 루카는 자신이 ‘전해 받은 것(복음)’을 자신의 것으로만 간직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 본’ 뒤 그 모든 것이 ‘진실하다고’ 다른 이에게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저희 역시 저희의 공이 아니라, 당신의 자비로 전해 받은 복음을 자신의 것만으로 간직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 마음은 기쁨에 넘치고 내 혀는 즐거워하며 희망 속에 살게”(사도 2,16) 하소서.
1월 28일 연중 제4주일 : 루카 4,21-30
21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지난 주일에 이어 계속 예수님의 첫 선포 장면이 이어진다. 오늘 복음을 보며, 루카는 상당히 꼼꼼한 ‘말씀의 종’이었음에 경탄해 마지 않는다. 바로 예수님의 첫 선포의 장면 안에서 이미 많은 것들, 예수님 전 생애의 프로그램들을 떠올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예수님의 첫 설교를 들은 고향사람들의 반응이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선언에 즉시 그들은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며’ 감탄한다. 하지만 당신 자신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예언자로 칭하시며, ‘그들만의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는 예수님의 발언에 그들은 또한 즉시 돌변한다. ‘모든 사람들’이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고’, ‘벼랑에서 떨어뜨려’ 죽이려는 폭도들로 변한 것이다. 그분의 구원계획 전체에 대한 군중들의 지극한 몰이해가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첫 선포 장면 안에서 자연스레 예수님의 마지막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호산나를 외치며 열렬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던 군중들이 그 똑같은 입으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것을. 선포와 죽음! 이미 그분의 첫 선포 안에서 그분의 운명(십자가의 죽음)이 예견되는 것일까? (그분의 구원계획 전체에 대한 우리의 몰이해, 소위 우리의 ‘냄비신앙’내지 ‘냄비근성’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묵상해 볼 수 있으리라.)
둘째, 예수님은 왜 첫 선포에서 엘리야, 엘리사 예언자를 선택하셨는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를 위해 그들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열왕기를 찾아 죽 읽어본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성경에는 성경구절안내가 빠져있지만, 신약성서를 묵상할 때 제시된 구약의 자리로 끊임없이 돌아감은 필수이다. 묵상의 풍부함을 위해 열왕기 상권 17장 이하부터 하권 13장까지 읽어보기를 권한다.) 드라마틱한 구약성경의 풍부함속에서, 흥미로운 제왕들과 예언자들의 이야기에 빨려든다.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 드디어 손뼉을 치게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탁월한 선택에 감탄하게 된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마지막을 보자. 엘리야는 구약에서 하늘로 승천하는 예언자(2열왕 2,11)요, 야훼께서 점지하신 그의 후계자 엘리사의 마지막 이야기에는 이미 부활의 그림자가 짙다. 바로 엘리사의 무덤 속에 던져진 한 주검이 죽은 ‘엘리사의 뼈에 닿자 다시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섰던’(2열왕 13,21) 것이다.
이미 승천과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는 구약의 두 예언자 이야기를 통해, 루카는 우리의 눈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루카 24장; 사도1장 참조)에로 자연스레 옮겨짐을 기대했던 것일까.
셋째, 그러면 예수님은 왜 두 예언자의 여러 이야기들 중에서 유독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 대해서만 언급하시는가? 이것 역시 예수님의 전 생애 프로그램 중의 하나를 밝혀주고 있다. 먼저 둘다 모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과는 적대관계에 있는 소위 이방인들이다. 바로 이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원행위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만 국한되는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나아가 온 인류로 확산되는 구원임을 이미 드러낸다 하겠다.
그분의 선포는 혈연과 지연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를 뛰어넘는 것, 바로 보편적인 것임을. 아울러 이제 그분의 선포 안에서는 ‘과부’ ‘나병환자’로 대표되는 ‘가난한 자’, ‘작은 자들’이 언제나 중심이 된다.
주님, 성경 안에서 늘 새로이 말씀하시는 당신의 영은 찬미받으소서. 당신 전 생의 프로그램이 인류의 구원을 향한 하나였듯이, 죄와 고통과 죽음의 사슬에서 허덕이는, 그래서 ‘가난한’ 저희 모든 이를 위한 하나였듯이, 저희와 당신 교회의 프로그램도 하나이게 하소서. 눈앞의 뜨겁고 차가움에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박고 그 터 위에 굳건히 서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도록”(콜로 2,7)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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