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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한시간 가량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이 김천역, 김천역에서 시외버스터미널로 자리를 옮겨 장전리로 들어가는 하루 네 번뿐인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골 마을의 정겨운 정취가 남아 있는 버스는 승객의 대부분이 동네 어르신들이었다. 아흔 아홉 고개를 넘고 졸다 깨기를 반복하면서 1시간 30여 분을 달려 목적지인 서무터 공소가 있는 장전리에 도착했다. 서무터 공소에 도착했다는 기쁨도 잠시, 공소는 보이지 않고 공소를 표시하는 비석이 가야 할 곳을 나타내고 있었다. 알음알음 물어 산꼭대기로 향했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꼬불거리는 길은 산 속으로 이어져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길을 따라 무작정 40여 분을 올라가니 마침내 집이 한 채 보이더니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공소 마을이 나타났다.
서무터 공소는 130여 년 전 김천 지역의 천주교 발상지로서 천주교 신자인 안주원이 병인박해(1873년)를 피해 피난와 정착하면서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원래는 착함을 전하는 곳이라 하여 선무기(善武基)라 하였으나, 훗날 서무터로 변경되어 부르게 되었단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안인환 할아버지는 안주원 공사가의 4대 종손이다. 지난해까지 안씨 일가가 공소회장직을 맡아 교회 일에 앞장섰지만 올해는 공소회장도 안씨가 아닌 다른 성씨가 맡았다. “10년 가까이 공소 회장을 하시던 안병출(마티아) 형님이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우리 집안에서 쭉 공소 회장직을 이어 왔지만 점점 신자수가 적어지는 공소에 나 같은 늙은이보다는 앞으로 공소에 많은 활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젊은 사람이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병인박해 시절 30가구가 넘는 신자들이 살았지만, 현재 공소에 적을 둔 세대는 9가구, 그 중 4가구가 신자지만 1가구는 외지에 나가 살고 있어 사실상 3가구만이 미사나 공소 예절에 참례한다. 미사는 한 달에 한 번, 지례성당에서 이재희(베네딕도) 신부님이 오셔서 함께 드리고, 한 주씩은 공소예절을 올린다.
깊은 산중이라 밤은 길고 낮은 짧다는 말처럼 산골짜기에 위치한 서무터 공소의 아침은 유난히 어둡다. 형광등 불빛 아래 앉은 안인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침기도를 드리고 묵주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네야 이 생활이 어릴 적부터 몸에 배인 습관이 되어 버린지라 하루라도 안 하면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요.” 서무터 공소와 성주 사이에는 하나의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다. 그 산을 넘으면 바로 성주, 성주가 고향인 박마리아 할머니는 중매로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머니 집안 역시 구교우 집안으로 신앙심 하나는 할아버지 못지 않게 깊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물을 길어다 쓸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던 공소는 이제 물도 잘 나오고, 전기도 들어오고 전화도 된다. “전기가 없어 촛불로 생활하던 시절에도 하루에 한 줄이라도 성서책은 꼭 읽었지요.” 6남매 또한 부모님의 신앙심을 이어받아 다들 출가하고 바쁜 사회생활 속에서도 주일만은 지키며 살고 있다.
병인박해의 참담함에도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택한 선조의 용기와 사랑에 늘 감사하며, 하느님을 섬기며 사는 삶이 너무도 충만하다는 안인환 할아버지. “공소에 현재 안씨 성을 가진 자는 나밖에 없어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큰아들이 이곳으로 돌아와 선조의 뜻을 모시고 살겠다고 했지만 시대가 변하고 있으니 그때가 되어 봐야 알겠지요.” 혹시라도 자신이 서무터 공소를 지키는 마지막 안씨가 될까 두려운 할아버지는 아들이 약속을 지킬 거라는 믿음을 가지며 죽는 날까지 선조의 뜻을 받들어 하느님을 공경하며 사랑으로 살겠다고 한다.
일상에 주어진 작은 행복에 감사하고, 늘 ‘주님’을 조심스레 마음속에 담고 계신 할아버지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잘 살고 있는지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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