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학부 1학년을 마친 신학생들은 겨울 방학 일정으로 한 달간의 필리핀 어학연수를 간다. 2007년 1월 4일, 해외에 가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설렘과 기대감을 가지고 필리핀 바기오로 향하였다. 한 달간 필리핀 바기오에 있는 어학원에서 영어 공부를 하며 그곳 신학교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현지 신학생들과 생활을 시작하면서 과연 현지 신학생들과 함께 잘 지낼 수 있을까란 의구심과 더불어, 연수를 시작하는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의사소통을 위한 외국어 능력이었다.
어학원의 생활이 시작됨과 동시에 금요일 오후부터 주일 저녁시간 전까지 조별 여행시간이 주어졌다. 어학원에서 만난 현지인 선생님들과의 수업은 외국인과의 대화의 두려움을 벗어나게 해 주었고, 조 인원들과 함께 떠난 여행들은 필리핀의 모습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가톨릭 국가여서 그런지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쉽게 성당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성당을 가 보아도 주일 미사시간이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신자들이 많았다.
한 달여 시간동안 조별로 네 번의 여행 기회가 있었다. 여행을 떠나면서도 그 곳에서 보고 느낀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때 당시는 조금 지쳐 있었던 것 같다. 필리핀 북부 지역은 대부분 산지를 이루고 있고, 도로 또한 그 산 지형에 맞추어 있다 보니 쉬운 여행길이 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차안에서 보낸 여행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여행을 무사히 다닐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많은 현지인들은 우리를 맞아 주었고, 특히 가톨릭 국가여서 그런지 한국 신학생이라는 신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여행 중에 만난 현지인들은 우리에게 친절했다. 한 청년은 내 또래 나이로 해안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안내하는 일을 하였다. 조 인원 중 나와 한 형제를 안내하여 시장에서 장보는 일을 도와주는 등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는 그의 도움으로 필리핀에서 처음으로 무사히 장을 볼 수 있었다. 또 한 사람은 벤 운전기사였는데, 여행비 충당을 위해 흥정을 해가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돈에 못 미치는 데도 운행을 해주면서도 여행지에 대한 유익한 정보를 알려주었고, 관광객들이 조심해야 할 것들을 지적해 주었다.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필리핀의 아름다운 관광지, 곳곳에 있는 여러 수도회나 성당도 보았다. 어느 차를 타든지 거의 대부분 차안에 성물이 하나씩 꼭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필리핀 사람들. 바기오 시내만 나가보아도 볼 수 있는 많은 필리핀 젊은이들과 학생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이들 그리고 어린이들과 가난한 이들. 그러면서 이방인으로 비춰지는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그저 잠시 왔다가는 그런 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나의 모습은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이지, 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행 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바기오 신학생들과의 친밀함도 더해 갔다. 함께 전례를 거행하고 식사를 하고, 식사 시간동안 하루의 일과를 나누면서 정을 더해 갔다. 처음에는 말 몇 마디 못 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여서 서먹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우리는 같은 형제였다. 짧은 시간에 영어가 잘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서투른 솜씨로 말을 전하고, 내 뜻을 온 몸으로 표현하면서 서로의 의사를 전할 수 있었다. 또한 함께하는 운동 시간은 함께한다는 그것만으로 즐거웠다.
이 곳 생활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외국어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것보다 더욱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다가감이었다. 그냥 제자리에서 바라보기만 하였던 여행들, 눈으로 보고 새로움을 많이 체험했지만 그 이상으로 느끼지 못한 많은 것들은 다가감이 없는 나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름의 남은 시간은 다가서기 위한 시간을 가지고자 했다. 그래서 마지막 여행으로 신학생 부모님들과 신학생들이 함께 하는 바기오 신학교 축제에 함께 하였다. 부모님들을 위한 작은 공연들과 연극, 합창, 율동 등 하나하나 정성을 기울여 준비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신학생들이 지니고 있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덧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고 바기오의 신학생들과도 작별인사를 하였다.
필리핀에서의 한 달은 필리핀을 알아가는 계기도 되었지만, 형제들을 알아가는 계기도 되었다. 1년을 함께 살면서 지낸 동기들이지만, 같은 방을 쓰고 여행을 함께 다니면서 서로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또한 우리 형제들뿐만이 아니라, 잠시나마 함께 지낸 바기오 신학생들을 통해 새로운 형제를 만날 수 있었다. 좀더 다가서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내게 한 달이라는 시간은 결코 잊지 못할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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