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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지순례 동행 취재기
사랑과 순교의 발자취를 따라


취재|김명숙(사비나)·본지 편집실장

죽는 순간까지 하느님을 찬미하며
늦가을이라 해야 할까, 새봄의 기운이라 해야 할까. 일본 열도의 최남단 규슈 후쿠오카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이 그러했다. 1월 17-20일까지 대구대교구장 이문희(바울로) 대주교와 대구 가톨릭문인회(지도:이정우 신부, 회장:김정길)의 일본 성지순례 여정에 기자도 함께 하였다. 인구 1억 2천만 명, 국민소득 4만 달러 그리고 신자 수 110만(그 중 순수 일본인은 45만) 명의 일본.

일행을 태운 버스는 공항을 출발하여 첫 순례지인 방호원(放虎園)으로 향했다. 방호원, 뜻 그대로 호랑이를 들에 풀어놓아 사람을 물어죽게 했다는 곳이다. 205명의 복자들 가운데 조선인도 13명이나 순교했다는 방호원에 한국말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어느 열심한 한국인에 의해서이다. 일행은 이문희 대주교의 설명을 듣고 기념비 앞에서 기도를 바치며 순교자들의 넋을 기렸다.

방호원을 출발하여 두 번째 들른 곳은 시마바라반도 운젠산700미터에 위치한 운젠지옥.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르고 또 오르니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일본에서 첫째가는 휴양지라 할 만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갖춘 운젠이 지옥으로 불린 까닭은 유황온천이 지옥을 연상하기도 하지만, 수많은 순교자들이 죽어간 곳이기 때문. 봄이면 진달래꽃이 온 산을 핏빛으로 물들인다 하니, 마치 순교자들의 핏물과도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젠지옥에 이르자 유황냄새가 코를 찌르고 뜨거운 온천수는 콸콸 솟아오른다.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천주교 탄압으로 운젠지옥은 1627년부터 5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의 고문과 처형장소로 이용되었다. 배교를 거부한 16명의 신자들은 펄펄 끓어오르는 온천수에 얼굴이 처박힌 채 죽어갔고, 그들 중 7명은 시복되어 그 기념비가 산속에 세워져 있다.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 뜨거운 온천수에서 숨진 순교자들의 용기를 오늘을 사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본받고자 찾은 운젠지옥을 뒤로 하고 첫 날 숙소인 시마바라를 향해 달렸다.

콜베 기념관과 오우라성당
이튿날, 시마바라를 떠나 나가사키로 향했다. 언덕배기에 자리한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1894-1941) 신부의 기념관에 들러 콜베 성인의 삶을 담은 영상물을 관람하고 그곳 수사신부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한 성인. 동료를 대신하여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어간 성인의 삶을 기억하며, 일행은 콜베기념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성인의 삶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콜베 기념관을 떠나 찾아 간 곳은 국보로 지정된 고딕 1호의 오우라성당. 나가사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오우라성당은 1864년 12월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의 프티잔 신부에 의해 건립된 성당이다. 성당건립 이듬해인 1865년 2월, 성당축성식을 마친 프티잔 신부에게 15명의 교우들이 찾아왔는데 그들 중 한 부인이 다가와 세 가지 질문을 한다. ‘교황청에서 보낸 사람인가? 독신인가? 성모님을 모셔 왔는가?’ 프티잔 신부가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부인은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당신과 같은 마음이다. 우리는 우라카미 사람들로, 우라카미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며 신자임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 우라카미와 그 일대에 숨어 있던 천주교 신자들은 다시 성당에 나오게 된다.

사제없이 250년 동안 신앙을 지켜 온 그들의 처절하고도 열정적인 신앙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성당을 돌아나오는 발걸음 발걸음이 아프게 와닿았다.

 

우라카미 주교좌성당과 여기당 그리고 26성인 기념비
일행은 오우라성당을 벗어나 점심식사를 하고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을 둘러본 후 우라카미 주교좌성당을 찾았다. 금교령과 함께 시작된 박해는 신자들로 하여금‘후미에(예수님과 성모님의 초상을 발로 밟게 하는것)’를 강요하였다. 처형당하지 않기 위해 후미에를 해야만 했던 신자들은 밤마다 사제에게 찾아가 고해를 했다. 그 고해의 내용이란 신자이면서도 후미에를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벽과 벽 사이 어둠속에 숨어 지내는 사제에게 고해하고는 자신의 발을 씻은 그 물까지 마셨다. 사제는 캄캄한 벽 사이에 너무 오래 숨어 지냈던 탓에 그만 눈이 멀고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박해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에도 자손들에게 오직 하느님의 존재를 잊지 않도록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었던 우라카미 사람들의 믿음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러한 아픈 사연을 안고 있는 우라카미성당에 원자탄이 투하된 것은 1945년 8월 9일의 일. 우라카미성당 500미터 상공에 떨어진 원자탄은 미사를 봉헌하던 우라카미 1만 2천여 명 신자들 중 8천 5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성당의 종탑마저 무너뜨렸다. 성당 입구에는 원폭을 맞은 성상들이 세워져 있고, 성당 뒤로는 피폭 당한 종탑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예수님의 성상을 밟던 그땅을 신자들의 힘으로 사들여 성전을 짓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 봉헌한 우라카미 주교좌성당. 신자수 9,000명으로 현재 일본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기록되고 있다. 성당을 나선 일행은 나가이 다카시(1908-1951) 박사가 생을 마감했던 여기당(如己堂)과 그의 기념관으로 향했다.

핵의학 박사로 세계평화와 원폭피해자들을 위해 사랑의 삶을 실천하다 그 자신마저도 결국 백혈병으로 죽어간 나가이 다카시 박사. 원폭에 자신의 아내를 잃고 죽어가는 순간까지 글을 쓰며 두 자녀와 함께 살았던 1.5평 목조건물 여기당과 그를 추모하는 기념관에는 그의 작품과 사진, 원자탄에 녹아버린 묵주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당에서 나와 나가사키역 맞은편 26성인 기념비가 있는 니시자카 언덕을 향해 걸었다. 예수회 수사 바오로 미키와 동료순교자들 그리고 조선인 3명을 포함한 26성인 기념비가 청동으로 조각되어 있고, 뒤로는 기념관이 있다.

순교하기 위하여 1597년 1월 교토를 떠난 26명의 순교자들은 추위 속에 한 달이나 걸어서 니시자카 언덕에 도착, 1597년 2월 5일 하느님을 찬양하며 십자가형을 당했다. 그들이 성인품에 오른 것은 1862년의 일.

기념비 뒤에 있는 기념관에는 천주교가 일본에 상륙할 때부터의 역사 유물들과 박해를 피하기 위해 불교의 관음보살상 모양으로 만든 성모상, 순교자의 유해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앞 26성인 기념성당에는 하느님의 성령과 성모님을 상징하는 두 개의 탑이 우뚝 솟아 있고, 26개의 창으로 이루어진 성당의 스테인드글래스는 순교자의 피를 상징하듯 붉은 색으로 만들어져 있다. 26성인 기념비를 뒤로 하고 니시자카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바람결에 그들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일본 최초의 가톨릭 전래지, 히라도
셋째 날, 구로사키성당에서 이문희 대주교의 주례로 아침 미사를 봉헌하였다. 미사강론에서 이문희 대주교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똑같은 날들이지만 내 마음은 얼마든지 바뀌고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더욱더 새로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으로 바뀌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활기차게 사실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당부하였다.

미사 후 나가사키시 북서부에 위치한 소토메바닷가 부근에서 소설 《침묵》의 작가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엔도 슈샤쿠(1923-1996)의 기념비를 보고, 엔도 슈샤쿠 문학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에서 그의 육필원고와 사진, 작품 그리고 삶의 흔적들을 둘러본 후 히라도로 향했다.

1550년 포르투갈 선박이 닻을 내림으로써 가장 빨리 개항하여 동서양 문화의 발상지가 된 히라도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 신부가 1549년 8월 가고시마를 통해 입국하여 최초로 천주교를 포교한 곳이다. 언덕길을 올라 히라도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상이 있는데, 이곳에서 성인이 180명 신자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하느님께 신자들을 봉헌하였다. 일행은 성인상 앞에서 기도를 바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히라도 시가지에서 30분쯤 떨어진 이키츠키는 ‘가쿠레 기리시탄(숨은 그리스도인)’들의 본산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박해를 피해 성화를 벽장 안에 넣어두고 새벽녘 아무도 몰래 벽을 향해 기도하며 대를 이어 내려오는 동안, 가쿠레 기리시탄들은 그리스도의 존재는 온 데 간 데 없이 벽만 보고 절하는 그야말로 ‘벽신’을 믿게 되었다.

이들 가쿠레 기리시탄들은 아직도 숨어서 기도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질 못한 채, 오랜 세월 속에 변질되어버린 벽신을 하나의 신으로 받들고 있어 유독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낮은 곳이다. 이곳 이키츠키 출신으로 니시자카 언덕에서 처형되어 26성인의 반열에 오른 토마스 니시의 기념비가 있는 야마다성당 역시 신자 수 300명 정도로 그 수가 적다.
야마다성당에 부임한 주임신부는 안타까운 마음에 마을의 숨은 신자들을 세상 속으로 불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형형색색 나비의 날개를 이용하여 칠성사 교리를 모자이크 그림으로 표현하여 성당 안을 장식하였다. 그림을 보며 쉽게 교리를 익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닫혀버린 가쿠레 기리시탄들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400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나 긴 시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자들의 영혼이 깃든 그곳을 떠나올 때는 앞으로 더 많은 신자들이 어둠이 아닌 빛의 세계로 걸어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죽음으로써 영원한 삶을 얻는 길을 일찍이 깨달은 이들. 그리스도만이 삶의 전부이며 자손들에게 물려줄 유일한 재산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던 이들.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마음만은 하늘에 두고 살았던 이들의 사랑과 순교의 삶은 가슴 아리게 다가왔지만, 한편으로는 충만한 기쁨의 시간이자 삶의 길잡이가 된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 일본 성지순례 : 나가사키와 운젠, 히라도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성지순례 프로그램은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와 관덕정 성지순례팀의 오랜 답사와 연구의 결과로 개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인들이 천주교를 믿고 박해를 당하며 순교하기까지 그 역사적 고증을 통하여 현재와 같은 순례 코스로 정착하게 된 것. 일본 성지순례는 각 본당별 혹은 단체별 신청이 가능하며 개인적으로도 신청할 수 있다.
문의 : 가톨릭신문 투어 053-428-5004, 428-5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