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열쇠는 ‘주고 받는데’ 있다. 누구나 ‘주는 자’이면서 동시에 ‘받는 자’이다. ‘주는 자’이면서 동시에 ‘받는 자’가 아니라면, ‘받는 자’이면서 동시에 ‘주는 자’가 아니라면, 그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이다.” - 랍비 이츠학 Jizchak Eiski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사순시기, 3월의 복음들은 ‘복음들 중 복음’이라 할 수 있는 말씀들로 우리를 초대한다. 대부분의 ‘나’는 열매를 맺는 나무이기는커녕, 꽃도 못 피우고 듬성듬성 잎사귀 몇 개만 남은 볼 품 없는 나무는 아닌지….
그럼에도 그 나무에 다시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 꽃이 피고 열매가 맺기를 기다리는 농부가 있으니(사순 3주), 그분 얼굴을 뵙기까지(사순 2주) 우리의 회개보다 더 큰 ‘그분의 자비’에 ‘나’를 맡기며(사순 4,5주), ‘나’의 ‘믿음과 삶’에 새싹을 돋게 하는 그런 사순시기이기를 기도합니다.
3월 4일 사순 제2주일 : 루카 9,28ㄴ-36
28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얼굴 좀 보여 주셔요!” (시편 27,8 참조) 시편작가의 노래처럼 구약의 백성들은 야훼를 뵙고자 하는 희망 속에 살았고, 우리 신약의 백성들 역시 ‘얼굴을 맞대고’ 그분을 뵐 지복직관을 꿈꾸고 있다. 그 누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싶지 않겠는가?
이러한 청을 아시는지 오늘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놀라운’ 얼굴을 보여주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얼굴을 보여주셨는지 이야기하고, 그 얼굴이 바로 우리의 얼굴이 되기를 희망하며 살도록 초대하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 ‘예수님의 변모 사화’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는데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은 하얗게 번쩍였다.’(29절) 첫줄부터 심상치 않다. 예수님의 변모는 ‘예수님의 기도체험’이 아닌가. (그렇지, 기도는 우리의 얼굴을 변화시키지, 이거 오늘 묵상 끝!? 거룩한 독서가 ‘말씀 안에 머문다.’하여, 밤이 새도록 말씀하지 않는 - 아니, 스스로가 못 듣지만 - 말씀을 붙잡고 있기보다는 다른 복음들로 자연스레 건너가 봄도 좋으리라. 다른 복음들과의 차이가 당연 복음묵상의 풍부함을 더해줌은 말할 나위없다.)
예수님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변모사화. 뭔가 마태오(17,1-9)와 마르코(9,2-10)와는 달리 루카만이 전하는 변모사화의 새로움이 있다. 첫째, 다른 복음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변모가 ‘그분의 기도 중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다른 곳에는 없는 모세 엘리야와의 대화내용(‘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이 들어있다. 셋째, 구름 속의 소리가 다른 곳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선택한 아들’이라 호칭한다. 넷째, 베드로와 제자들이 ‘잠을 자다가 깨어나’ 그분의 영광을 본다. 다섯째,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이 침묵명령을 내리지만 여기서는 제자들이 스스로 ‘침묵을 지킨다.’
무엇보다 두 번째, 세 번째를 통해 볼 때, 그분의 변모는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이야기’ 이전에, 그분이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31절), 바로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보여 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름 속의 소리도 마치 고통 받는 야훼의 종처럼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선택한 아들’임을 드러낸다.
그분의 변모가 수난을 먼저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데서 자연스레 우리의 눈은 겟세마니 동산으로 옮겨진다.(루카 22, 39-46)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을 오르신 모양이나, 누군가 나타나는 모양이나(여기선 천사), 잠자는 제자들의 모습이나 두 개의 사화가 마치 동일한 영상처럼 그려진다. 오직 하나 다른 것은 예수님의 얼굴일진데, 영광에 빛나는 얼굴이 아니라 “땀이 마치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지는”(44절) 얼굴이다.
결국 (수난과 부활이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의 사건이었듯이) 두 개의 이야기를 합치면, 그분 ‘고통의 얼굴’과 ‘부활의 얼굴’이 다르지 않다는 것, 인간을 끝까지 연민한 하느님의 ‘하나의 얼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구름 속의 요청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는 말로 대치된다.
‘잠을 자다가 깨어난’ 제자들. 수난의 길에 무서워서 꼭꼭 숨어있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 한 후에 마치 ‘잠을 자다가 깨어난 듯’, 더 이상 ‘침묵하는 자들’이 아니라 죽기까지 부활을 외치는 사도가 되었다. 부활체험과 성령 안에 선물 받은 ‘굳건한 믿음’이, 예수님의 진짜 얼굴을 알아보게 하였고, 자신들 스스로도 똑같은 얼굴이 되어 살았다. 죽기까지, 부활하기까지.
주님, 이제 아무리 힘들어도 더 이상 ‘얼굴 좀 보여주세요!’, ‘나의 고통을 해결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지 않겠나이다. 말씀 안에 이미 보여주신 당신의 얼굴. 고통과 부활의 얼굴이 하나였듯이, 저희 역시 지금 고통스런 나의 얼굴이 부활을 이미 보여주는 얼굴이 되어야 함을 믿나이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 속에’ 고통스런 나의 얼굴도 마음도 당신 안에 변화되어 감을 믿겠나이다.
3월 11일 사순 제3주일 : 루카 13,1-9
1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인간에 의한 무고한 이들의 살해사건, 천재지변이나 불의의 사고들…. 도대체 왜?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이런 우리의 질문과 답답함처럼 오늘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묻는다. 예수님의 말에서 유추해보면, 그 ‘어떤 사람들’은 갑작스레 변을 당한 이들이 ‘더 큰 죄인이라서’, ‘더 잘못을 해서’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우리도 혹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살아가든가.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의 죽음은 ‘우리’와 상관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회개’와 상관이 있다.
귀를 쫑긋거리는 사람들 앞에 (우리 역시) 예수님은 단호히 두 번이나 말씀하신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망할 것이다.” 여기서 잘 들어야 할 것이다.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무고한 이들의 죽음)과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은 열여덟 사람(인재 또는 천재지변) 하나하나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떤 평가도 하시지 않는다. 오직 그들의 죽음과 불행이 ‘너희들’의 회개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만 촉구하신다.
분명 ‘너’가 아니고 ‘너희들’이다! 즉 ‘그들의 죽음’은 ‘우리의 회개(공동체/교회의 회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실망이다. 인간적 바람으로 여기서 뭐라 딱 한 마디 하셨으면 좋으련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예수님도 불의하게 죽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혹 다른 어떤 이의 불행을 들을 때, 나 역시 그 어떤 판단도 하지 말라는….)
‘회개하지 못하는 우리’는 복음의 두 번째 부분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로 표현된다. 즉 ‘회개하지 않으면’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으로 그대로 바뀐다. ‘삼 년째’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가 나무는 곧 잘릴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도 포도원 재배인이 나선다.
한 해만 더 참아주시면 안될런지… 제가 ‘둘레를 파서’ 거름도 주고 물도 주고 한번 가꾸어 보겠습니다…. ‘내년에도’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때 잘라 버리십시오. 무화과나무는 잘리지 않는다,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 때문’이 아니라 ‘포도원 재배인의 청’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것도 일 년 안에….
두 부분이 겉도는 듯 보이지만, 정말 커다란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너희들의 회개’를 촉구하시며, ‘참아주시는 하느님’을 비유로 알려주신 예수님은 그냥 권위 있는 명령권자처럼 명령만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포도원 재배인이 무화과나무를 그냥 내버려 두고 열매를 맺으라 하지 않듯이, 예수님 역시 ‘우리의 회개’를 그냥 우리에게만 맡겨 놓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름을 주고 물을 주듯, 당신의 모든 생명과 영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아직도 망하지 않은 이유, ‘일 년’이 훨씬 지나 2000년이 지났는데도 교회가 아직도 살아 있는 이유, 그것은 우리 (교회) 스스로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때문’이고, 어디에선가 열매를 맺고 있는 ‘무화과나무들’ 때문이리라. 하지만,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곧 ‘일 년 안에’ 망하리라.
주님, ‘회개하라’ 하시며, 저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 영으로 함께 일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역시 포도 재배인처럼 다른 이들의 불행과 아픔을 위해 청을 드리며 기도하고, 무엇보다 그의 회개를 돕는 당신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3월 18일 사순 제4주일 : 루카 15,11-24
1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복음서가 전하는 가장 아름다운 비유, 퍼내어도 퍼내어도 그 의미가 소진되지 않는 말씀 중의 하나이다. 첫 읽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 온” 세리와 죄인들은 자연스레 ‘잃었던 작은 아들’과 교차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와 율사들은 ‘큰 아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자비로운 아버지’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 (너무나 유명한 말씀일수록 할 말도 많고 들은 말도 많아서 소위 ‘새로운 묵상’을 하기가 오히려 더 쉽지 않을 수 있다. “알아들을 단순한 귀를 주십사” 청하며 비유말씀에 빠져들어야 하리라. 집을, 고국을 떠나 있어서인지, 오늘따라 자꾸 작은 아들에게로 눈이 돌아간다. 나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끊임없이 ‘돌아가야 할’ (‘회개해야 할’) 나의 상태는 어디쯤인지, 작은 아들의 ‘돌아가기’ 여정을 떼어서 다시 꼼꼼히 돌아본다.
먼저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재산을 낭비할 때”는 돌아갈 생각이 아예 없다. 누구로부터 받은 생명이요 재산인지 완전히잊고 살 때이다. “모든 것을 탕진 했을 즈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근까지 들어” 궁하게 되었다.
이때 아마 처음에는 “땅을 파자니 힘도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데….”(루카 16, 3 참조)하며 이리저리 여러 궁리도 해 보았겠지만, 이때까지도 별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하다. 왜? 아직은 ‘스스로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여기기에. 그래서 돼지 치는 집에 더부살이로 들어간다.
비유에 따르면 결정적으로 “제 정신이 든 것은” 배가 고플 때로 고파서 거의 “굶어죽게 되었을 때”이다. 바로 ‘배고픔’과 철저히 ‘낮아짐’은 작은 아들을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는 첫 번째 동기가 된다. 비유는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지만,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 말씀드려야지” 할 때까지, 작은 아들의 고민은 결코 작지 않았으리라.
부끄러움과 후회, ‘그냥 죽어버리고픈’, ‘그냥 모든 것을 잠재워 줄 것 같은’ 자살의 유혹인들 왜 없었겠는가? 이러한 아무도 이해 못할 아픔과 고민 끝에,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면 무엇이 결정적으로 작은 아들의 몸과 마음을 “일으켜” 아버지께 돌아가게 했을까?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아서’도 아니요, ‘품꾼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리라. 또한 아버지가 나를 받아들여 주실지, 아닐지도 두 번째 문제였으리라. 작은 아들의 ‘돌아감(회개)’은 무엇보다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고’, 오로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작은 아들이 ‘돌아온 후’ 아버지 앞에서 한 고백에서 ‘배고픔과 일자리’에 대한 고백은 사라지고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은 아들의 이 한 마디 고백으로 ‘아버지와 하늘’은 연결이 되고, 더 이상 아들의 ‘돌아옴’은 한 집안의 가정사를 넘어서서 (아버지의 말처럼)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것처럼”(24절. 32절) 종교적인/신앙적인 영역의 ‘돌아옴(회개)’으로 ‘높여진다.’
하늘과 연결된 이 아버지의 자비는, 이제 비유를 듣는 ‘죄인들’로 하여금, ‘돌아오기만 하면’ 무한히 용서하고 받아들여주실 ‘하느님의 자비’로 ‘높여진다.’ 결국 아버지의 자비에 대한 ‘믿음’만이 우리들 회개의 결정적 근본 동기가 되도록 이끌어 준다.
작은 아들의 ‘돌아감’보다 더 큰 것은 ‘돌아옴’을 언제나 기다린 ‘아버지의 자비’이다. 또한 죄의 상태가 ‘죽음’과도 같은 상태라면, 몸을 ‘일으켜’(신약에서는 거의 부활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인다.) ‘돌아감(회개)’에는 이미 ‘부활의 빛’이 비추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이미 부활의 시작이다.
주님, 아직도 당신께 온전히 ‘돌아가지’ 못하는 저희를 용서하소서. 아직도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저희를 용서하소서. 아직도 당신의 무한한 자비를 깨닫지 못하고,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저희를 용서하소서.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지금도 저희의 회개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비로운 아버지’ 당신이 계시다는 것만은 결코 잊지 않게 하소서.
3월 25일 사순 제5주일 : 요한 8,1-11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도대체 예수님은 땅바닥에 무엇을 쓰셨을까?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는 ‘율사들과 바리사이들’, 그들을 중심으로 돌덩이를 이미 혹은 곧 들고 던지려는 ‘백성들’, 자신의 죄보다는 죽음의 공포 앞에 벌벌 떨고 있을 한 ‘여인’, 이들 속에서 예수님은 태연하게 ‘두 번이나’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시며 이 모든 팽팽한 긴장들을 가라앉히신다.
우리의 여러 관계들이 종종 이러한 긴장 속에 놓여 있다. 때로는 누군가를, 누군가의 행위를 판단하려 하고, 때로는 더 이상 그와 관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미움과 복수의 돌덩이를 집어 들고 있다.
때로는 나의 허물과 잘못들이 밝히 드러날까 노심초사 걱정하며, 때로는 나의 모든 것이 이미 드러나 처절한 고립과 절망 속에 죽음과도 같은 상황에 쳐해 있다. 이런 상황들 속에서 우리는 그분을 애절히, 혹은 의심 속에 불러 보려 하지만, 그분은 (아마도) 여전히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계시리라.
도대체 무엇을 쓰셨을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는 한마디 말씀으로, 모두가 스스로 죄인임을 일깨워 주시는 예수님. 이제 ‘스스로 죄가 있다고 인정하는’ ‘죄인들’은 하나 둘 나이 많은 이부터 떠나가고 (이 부분에 좀 머물고 싶다. 지당하고 마땅한 예수님의 한마디에 순응하는 이들, 과연 오늘날 같으면?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옳은 소리’를 외면하고, 벌써 돌덩이를 여인에게 던져 버렸으리라. 물론 돈과 권력에 이글거리는 눈을 가진 어떤 한 이(者)가 먼저 시작하겠지만…. 돌에 맞아 다 죽어가는 여인을 보며 하는 말, “쟤가 먼저 던졌어요!”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우리들. 끊임없이 핑계 대는 우리들. 그들을 스스로 움직이게 한 예수님 말씀의 권위가 놀랍다.) 오직 “예수님과 여인”만이 남는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단죄하지 않는 예수님! 하느님은 무섭고 심판하는 분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끝까지 연민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몸소 드러내신다. 그것도 모자라 그분은 끝내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 ‘모든 인간들의 용서’까지 구하신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옵니다.”(루카 23,34)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보여준 예수님의 전 존재를 통해 교부들(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누스, 예레니모)은 땅바닥에 긁적이신 예수님의 ‘표징적 몸짓’의 의미를 구약성서 안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 (그의 모든 죄) 먼지 위에 쓰여지리라.”(예레 17, 13)는 성경말씀을 기억하셨고, 유대인들이 하나 둘 스스로 떠나간 이유 역시, 예수님의 몸짓에서 이 성경말씀을 떠올렸기 때문이라 해석한다.
이제 예수님이 정말 무엇을 쓰셨는가, 그 내용은 더 이상 그리 중요치 않게 된다. 바로 그분은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는 말씀뿐 아니라 무언가를 긁적이시는 ‘당신의 몸짓 전체’로도 이미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 저희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죄하고플 때, 때론 스스로의 죄악에 억눌려 허덕일 때, 땅바닥에 무언가를 긁적이신 당신의 ‘몸짓’을 기억하게 하소서. 오로지 ‘먼지 위에’ 그것을 쓰시며 ‘다시 죄를 짓지 말기를’ 끊임없이 기다려 주시는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먼저 저희가 스스로 지은 죄에 억눌려 당신을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깨닫고 당신께로 다시 돌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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