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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루카 22,14-20
14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17 그리고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이르셨다.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19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
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오늘 복음은 최후의 만찬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이 잡히시고 갖은 조롱과 억지 재판을 통해 십자가에 처형되어 묻히시기까지의 예수 수난 과정을 얘기합니다. 세상에서의 마지막 파스카 음식을 나누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밝히고 앞으로 닥칠 일들을 제자들에게 예고하며 앞날을 준비시킵니다. 그러나 철부지 같은 제자들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도 죽은 이를 위한 향료와 향유를 마련하고 옛 관례로 돌아갑니다.(23, 55-56 참조)
22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이는 여러분을 위해 내어주는 내 몸입니다.”라고 말씀하신 뒤에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나’를 기억하라, ‘이’를 행하라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이 전하는 ‘나’인 예수님을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모습 곧, 섬기는 자와 통치자인 왕의 모습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섬기는 자의 궁극적인 모습이 ‘여러분을 위해 내 몸을 내어주는 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먼저 섬기는 자로서의 ‘나’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 쓰인 대로 살펴볼까요?
‘나’는 고난을 거쳐야 하는 자(22,15), 스스로 남을 위하여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는 자(22,19-20),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배신을 겪는 자 (팔아넘김을 받고 22,21;47-48;외면 당함 22,34.56-60),섬기는 자(22,27), 하늘 천사의 위로 이외에는 자신의 고뇌를 함께 나눌 사람이 없는 자 (22장 40절- 46절), 집단에 의해 거짓 고발과 모함을 받는 자 곧 자신들의 이익에 위배된다고 하여 왕따 당하는 자(23,4-5), 죄목을 찾을 수 없음에도 집단 고발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자(23,4-5; 13-25), 다수의 폭력에 희생된 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을 자신에게 가한 사람들을 하느님께 옹호하며 용서해주기를 기도하는 자입니다.(23,34) 이 모든 것들이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는 자’의 모습이며(22,27), 바로 “여러분을 위해 내 몸을 내어주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나’는 아버지로부터 당신 나라를 위임 받고, 그 나라를 위해 시련을 함께 견디어 온 제자들에게 당신 나라를 맡기며, 그들을 옥좌에 앉혀 이스라엘12지파를 심판할 통치권을 부여할 왕 중의 왕의 모습을 가진 분이기도 합니다.(22,28-30)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두 모습의 ‘나’는 먼저 시련을 겪는다는 것입니다.(22,28) 왕이지만 시련을 겪는 왕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나를 기억하고 행하여라.”라는 말씀에 앞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라는 말씀을 먼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여러분’을 위해서 ‘내 피’를 쏟는 분입니다.(22,20) 한마디로 ‘나’예수는 <남을 위해 ‘나’를 몽땅 밥으로 내어놓은 또는 내어놓는 자> 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곧 영광의 ‘나’를 기억하기에 앞서, 너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내 몸을 내어주고 피를 쏟는 ‘나’, 섬기는 자로서의 ‘나’를 먼저 기억하고,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란 <내가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너희가 고난을 겪을 때에 너희 스승인 내가, 하늘의 왕인 바로 내가 그 깜깜한 죽음의 강을 건너야 했음을 기억하고 절망하지 말라는 위로의 약속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습관처럼 이 만찬 예식을 행하고 성체를 모십니다. 그 때에 우리는 오로지 하나의 예절로 그치거나, 혹은 옥좌에 앉아 통치할 영광만을 꿈꾸는 것은 아닌지요?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밥이 되셨는데, 그분의 제자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서로 밥이 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또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 ‘쏟는 피’임을 기억하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이익에 맞게 자기 방식대로 예수님에 대한 무수한 허상을 만들어 놓고, 자신이 만든 허상에 맞지 않으면 기대에 어긋난 그 모습에 실망하고 외면하고 맙니다.
성지가지를 흔들며 “왕으로 오시는 이 호산나!”를 외치던 예루살렘 백성들이 순식간에 마음을 바꾸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이익에 따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그들의 변덕 논리에서 나온 것이며, 이것은 또한 세상사가 잘 안 풀릴 때마다 보이는 나의 모습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복음을 읽는 이 날 우리는 더욱 이 말씀의 의미를 되씹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빵은 여러분을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 여러분을 위하여 쏟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마다, 이 말의 의미를 깊이 깨우쳐 새겨듣지 않는 한, 우리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며 그 죽은 신앙을 위해 향료와 향유나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4월 8일 예수 부활 대축일 : 요한 20,1-9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부활의 환희로 기뻐 용약해야 할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이 아니라 빈 무덤 앞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사라진 빈 무덤. 우리 신앙의 갈림길입니다.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절망할 것인가? 부활하셨음을 믿고 우리의 삶을 그분에게 통째로 걸 것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몸이 사라진 빈 무덤이 말씀을 듣는 자리이며, 우리 신앙의 산실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부활의 흔적을 단계적으로 살피면서, 빈 무덤을 대하는 세 명의 행동 유형을 관찰해 보기로 합시다.
-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앞에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무덤 안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바로 추측을 하고 (2절: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알립니다. (2절: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그들의 힘을 빌려 예수님의 시신을 되찾으려는 것이었을까요?
- 그녀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보다 뒤에 도착했지만 그보다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가 아마포와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따로따로 정돈되어 놓여져 있음을 봅니다.(6절) 이것을 확인한 후 베드로의 반응에 대한 해설은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몸이 놓여 있었던 흔적과 그 몸이 없어진 것만을 점검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 다른 제자는 무덤에 먼저 도착했지만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밖에서 보고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들어가 점검이 끝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8절)고 성경 말씀은 전하지만, 무엇을 믿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상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실 그들은 아직도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9절)이라는 오늘 복음 저자의 해설에 비추어 보면, 이 믿음을 부활 신앙과 연결시키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일 복음에는 빠져있지만 빈 무덤 이야기가 “그 제자들은 다시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다.”(10절)로 끝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다른 제자’의 믿음을 부활 신앙과 직접 연결시키기에는 아직 모호한 점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빈 무덤을 대하는 세 인물의 공통점은 빈 무덤과 성경 말씀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한 그들은 스승 예수님의 몸에만 집착해 있습니다. 빈 무덤이 죽음을 이긴 예수부활의 증표이며, 그들을 성경 말씀과 스승이신 예수님의 말씀에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빈 무덤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보아야 하는 하나의 표지 또는 신호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이 세 인물의 행동 유형에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비추어 묵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사라진 빈 무덤은 우리가 그 안에서 실제로 예수의 몸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성경에 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불신앙, 불안, 불확실의 상태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 사람의 태도를 통하여 성경 말씀과 마주한 우리의 태도를 비추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막달라 여자 마리아형 : 성경을 읽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지식이나 상식으로 이러니 저러니 상상하는 유형. 그는 무덤 앞에 돌이 치워진 것을 보고, 누가 주님의 시신을 다른 곳에 옮겨 갔다고 생각하고 곧장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가 알리며 자기 생각을 말합니다. : 1-2절 참조.(그러나 이후 세 사람 중, 막달라 여자 마리아만이 홀로 무덤가에 남아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합니다. 요한 20,11-18)
둘째, 베드로형 : 성경을 읽되, 말씀을 경청하기 보다는 단순히 이야기의 사건들이나 사실들, 그 흔적들을 조급히 점검, 검토하듯 읽는 형. 베드로는 무덤으로 들어가 예수님의 몸을 쌌던 것들이 잘 개켜져 놓여져 있는 것을 보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 6절-7절 참조. (베드로 사도는 후일 우리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장엄하게 순교하십니다.)
셋째, 다른 제자형 : 시간을 갖고 성경을 읽으며 검토가 아니라 말씀이 보여주는 것을 통하여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는 형. 그는 베드로보다 더 먼저 무덤 앞에 도착하지만 먼저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의 점검이 끝난 후에 들어가 보고 믿습니다. : 4-8절 참조.(이 제자는 요한복음 안에서 언제나 부활한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보는 통찰력을 가진 분입니다. 요한 21,7참조)
그렇다면 이 복음을 읽는 ‘나’는 어떤 형에 속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빈 무덤’은 부활 신앙의 시작이며, 성숙한 신앙에로 이르는 관문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어떤 유형에 속하든, 현재의 나의 모습을 아는 것이 더 발전된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는 첫 걸음일 것입니다.
이야기 시작에서 “주간 첫 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1절)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무엇인가가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는 나에게 예수님의 몸, 눈에 보이는 현존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을 그리고 내가 나의 이익에 맞게 예수님에게 만들어 씌운 허상을 무덤에 묻고 더 이상 집착하지 말고 새 출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일 것입니다.
빈 무덤이 제자들을 그리고 오늘 성경을 읽고 있는 나를 성경 말씀에로 초대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현존이 보이지 않는 우리의 현실 안에서의 불안이나 고통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 안에서 길을 찾도록 초대하는 초대장이 아닐까요?
빈 무덤은 부활 신앙에 이르는 관문이지만,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빈 무덤에서 우리는 아무런 현실적 해답이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죽음의 확인밖에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말씀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세상에서 우리는 빈 무덤 밖에 보지 못할 것입니다. 말씀 안에 머문다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과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믿음 안에서 진리의 길로 나아감을 말합니다.
4월 15일 부활 제2주일 : 요한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부활 제2주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토마스가 부재한 제자들 모임에 발현하신 예수님, 토마스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그리고 맺음말입니다. 이 세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복음은 두려움과 자기 문제에 갇혀 있는 제자들을 해방시켜 믿음의 길로 초대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둘째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왜 문제가 된 토마스 사도에게만 따로 발현하지 않고, 그를 포함한 제자들 모두에게 발현하셨을까?’라는 질문으로 독서를 시작하겠습니다. 복음 말씀을 천천히 읽어가면서, 세 가지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주의해서 살펴본다면 둘째 이야기가 결국 첫째 이야기와 맺음말의 연결점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 이야기에서 부활한 예수님은 유다인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모여 있는 제자들 한가운데에 나타나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씀을 두 번에 걸쳐 하십니다. 첫 번째는 제자들이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그고 두려움 속에 갇혀 있을 때이며, 두 번째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는 장면에 이어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파견 말씀 서두에 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죄의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두려움, 평화의 인사, 파견과 용서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먼저 “평화가 너희와 함께”(19절)라는 말씀과 함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그들을 두려움에서 풀어주고, 그들의 닫힌 마음이 열리게 합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당신의 부활을 입증하는 동시에 제자들에 대한 용서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뵙고 기뻐했다.’(20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평화의 인사는 마치 두려움으로 질식해 있는 제자들에게 하는 인공호흡과 같습니다. 기쁨은 이제 겨우 숨을 회복한 자의 안도의 표시일 것입니다. 그러나 동료(막달라 마리아)의 증언(20,18)을 믿지 않고 귀와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는 그들의 마음과 생각의 질식 상태가 워낙 심각한지라 활동하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그래서 또 한 번 인공호흡을 합니다. :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파견 명령을 내립니다. 마음을 여는 것, 남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 용서 받는 것, 이것이 파견을 실행하기 위한 첫 조건인 셈입니다.
그러나 파견을 실행하기 전에 필요한 사항이 더 있습니다. 두 번의 인공호흡으로는 아직 부족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도움>과 <여러분의 용서>입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22절)”, (이는 창세기에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 창세 2,7참조) 행동을 하기 전에 곧 파견 임무를 실행하기 전의 마지막 인공호흡인 셈입니다. 이어서 “성령을 받으시오.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들은 용서 받을 것이요,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23절)” 이 말씀은 문을 잠그고 여는 것이 ‘여러분’ 손에 달렸듯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고 안하고는 ‘여러분’ 각자에게 달렸음을 일깨워주면서 동시에 이 용서의 힘, 두려운 마음, 나의 이웃과 나 혹은 다른 공동체와 나의 공동체를 차단하는 마음의 빗장을 열 수 있는 힘이 성령의 도움에 기인하는 것임을 또한 일깨워 주시는 것은 아닐까요?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토마스 사도는 다른 동료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하는 말을 믿지 않고, 십자가 처형의 흔적을 지닌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져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을 수 없다고 고집합니다. 토마스의 이 행동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를 거부하기 보다는 동료들의 말을 듣는 것과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들을 귀를 잠그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내가 보아야 하고 내가 만져봐야 하고 내가 믿어야 하며, 너희들이 아니라 내가 해야 돼.’라는 자기 영웅심의 표출이기도 할 것입니다. 첫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두려움 속에 갇혀있었다면 토마스는 지금 자기 고집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여드레 후 예수님이 토마스와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나타나서, 제자들 한가운데 서시며 “여러분에게 평화”라고 말씀하신 후, 토마스에게 당신의 십자가 상처들을 보고 만져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토마스는 즉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이라는 신앙 고백을 합니다. 토마스의 이 고백을 통해 다른 제자들의 믿음 상태가 토마스보다 더 열악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 이야기에서 그들이 부활하신 스승 예수님을 직접 보고 성령을 받고 파견 명령까지 받고서도 여전히 문을 잠그고 모여서 움직일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중증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인공호흡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숨만 쉬고 있었지 스승 예수님의 파견 말씀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합니다. 움직일 조짐이 안보입니다. 아직은 무엇인가가 좀 부족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확실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분을 보고 기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토마스가 한 것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절대적인 신앙 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토마스가 이른 이 믿음의 길보다 더 복된, 아마도 더 성숙한 믿음의 길로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 “보지 않고서 믿는 이들은 복됩니다!(29절)”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처음에 던졌던 질문, ‘왜 예수님은 동료들의 말을 믿지 않는 토마스에게만 발현하지 않으시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셨을까?’의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곧 부활한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토마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자들 모두의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토마스의 부족함을 통해 믿음의 정수에로 다른 제자들을 이끄시는 예수님. 보지 않고 믿는 믿음, 그것은 또한 <듣기>에로의 초대입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곧 <말씀에로의 초대>를 말합니다. 귀와 마음의 빗장을 열고서 말씀을 경청하는(읽는) 것. 그것은 안도의 기쁨을 넘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최고의 믿음에로 이르는 길 아니겠습니까? 요한 사도의 말씀을 빌리자면 바로 이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따라서 말씀 듣기는 곧 <영생>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맺음말에서는 이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기록된 것은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하려는 것이고, 또한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절)
끝으로 필자는 이 긴 복음 해설을 읽지 않고서도 성경 말씀을 직접 읽고 (부활한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하느님이심을) 올바로 깨닫는 사람들은 진복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주간 첫날 저녁”(19절), 성경을 펼쳐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아집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것이 영원한 삶을 사는 첫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4월 22일 부활 제3주일 : 요한 21,1-19
1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번 주 복음은 지난 주 복음에 이어지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세 번째 발현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뵙고 상처자국까지 확인하고 또 파견 말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자들은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한데 모여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3절) 하면서 다시 이전 일상의 일로 되돌아갑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를 따라 갑니다. 이 세 번째 발현은 이러한 상황에서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상한 점들로 가득해서, 마치 엉성한 논리의 전개로 청취자들을 살짝 살짝 기만하는 연속극의 한 단편을 보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오랜 날을 함께 먹고 자며 지낸 스승을 알아보지 못한다든가, (물가에 서 있던) 모르는 사람이 다 큰 어른인 그들을 보고 “아이들아!”하며 부르는데도 순순히 그에게 대답하고 그의 말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겉옷을 입고 물속으로 뛰어들고, 제자들이 모두 힘을 합해도 끌어 올릴 수 없었던 그물을 혼자서 뭍으로 끌어 올리는 베드로의 초인 같은 모습, 또한 제자들은 그들을 아침식사에 초대하는 분이 “주님”이심을 어떻게 알아보았으며, 이어지는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앞의 이야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 이야기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이야기 진행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풀어나가도록 합시다.
먼저 고기잡이의 실패가 성공으로 반전된 것과 모두 힘을 합쳐도 끌어 올릴 수 없었던 그물을 베드로 혼자서 뭍으로 끌어 올릴 수 있게 된 것은 각각 예수님의 말씀 이후입니다.(6절, 10-11절 참조) 이러한 사실은 물고기와 그물이 베드로와 그 일행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에 복종한다고 해석할 수 있게 합니다. 또한 잡은 물고기들은 그들이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크기를 가늠하고 숫자를 헤아리기 위해 있는 것 같습니다. 복음 말씀은 잡은 물고기의 크기와 수량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며(11절), 제자들이 먹은 것은 방금 잡은 물고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에게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음식을 위해 그들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음식은 무상의 선물입니다. 이러한 관찰들은 제자들이나 독자인 우리에게 복음에서 들어야 할 것,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엿보게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던 일이 실패를 거듭하다가 성공으로 반전될 때, 우리는 거기서 하느님의 손길을 읽을 줄 알아야 하며, 자신이 이루어낸 일에서 어떤 것도 자기 몫으로 끄집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자기 영광, 자만, 자기 과시 등) 왜냐하면 제자들이 먹은 ‘아침’은 그들이 수고한 것이 아니라 예수인 ‘내’가 ‘너희’에게 <선물>로 준 음식(12절, “와서 아침을 먹어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먹은 ‘아침 식사’는 <선물>의 상징이며, 이 선물은 <사랑>의 증표입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은 뜬금없이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면서 그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이나 묻습니다.(15-17절) ‘베드로’란 이름은 예수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며(1,42) 그의 특별 사명과 관련된 것이라면 ‘요한의 아들 시몬’이란 이름은 그의 출생 곧 본성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은 “나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내 제자로 삼겠다.”란 의미이며,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후 하신 말씀, “내 양들을 돌보시오.”(15-17절)에서 예수님은 ‘되어야 할’ 베드로 사도의 직무 곧 양들을 이끌고 돌보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양은 너 시몬 베드로의 것이 아니라 ‘내 양’ 곧 예수님의 양입니다. 이것은 너의 양이 아닌 양들을 네가 이끌고 먹여 돌보는 것은 바로 사랑의 행위이며, 네가 갈 길은 바로 이 사랑의 길 위에 있다는 것, 즉 네가 나에게서 받은 선물을 나 예수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 양들’에게 주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는 <사랑의 요청>입니다.
고기잡이 이야기가 “아침을 먹은 후에”(16절)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로 이어지면서, ‘사랑’의 증표인 선물 이야기가 결국 내어주는 삶,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삶을 위한 사랑의 요청에로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암암리에 보여 줍니다. 음식을 먹고 나면 소화를 해야 하듯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받아먹은 음식, 곧 받은 선물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네가 내게서 받은 선물을 나에게가 아니라 다른 이에게 주면서 소화하라. 바꾸어 말하자면, 이런 말이 될 것입니다.
<내 양들을 이끌고 돌보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네가 할 줄 아는 모든 것, 네가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점차적으로 네게 소용없어졌을 때, 무상으로 네게 음식이 주어졌음을 잊지 말라. 네게 위탁된 양들을 돌보아야 할 때, 네가 먹기 위해서 잡으려 했던 물고기를 잡던 식으로 너의 지식과 너의 힘에 의존하려 하지 말 것이며, 너 역시 나에게서 받았던 선물인 그 양식(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입은 모든 은혜를 함축함)을 그들에게 먹이(생명의 양식)로 주어라. 네가 수고해 얻은 양식인 것처럼 하지 말라.>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에서의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된 사랑의 길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의 행동과 결정과 관계되는 변화의 여정을 얘기하면서 그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곧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던” 베드로가 종국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의 허리끈을 묵고 그가 원치 않은 곳으로 끌려가게 될 것(18절)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자리를 나 아닌 다른 이에게 양보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양을 돌보게 될 요한의 아들 시몬이 가야 할 베드로의 길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어주는 삶, 그분의 뒤를 따르는 삶이며 단 한 번의 사랑의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코 만족될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이 가능할 때까지 계속 발전해 나아가게 하는 사랑에의 요청입니다. 이 요청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죽음의 모습에서 완성됩니다.(19절)
마지막 절인 19절의 말씀에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하는 이야기에 이어서 “나를 따라라.”하십니다.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 그것은 곧 사랑의 요청을 따르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들에 내가 저항하는 순간이 바로 나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 내가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본 복음묵상은 제 은사이신 쟝 드로름므 (Jean Delorme) 신부님의 강의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4월 29일 부활 제4주일 : 요한 10,27-30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부활 제4주일인 오늘은 성소주일, 특별한 부르심과 관계되는 날입니다. 이번에는 이 부르심이 무엇으로 또는 어디에로의 초대인지 나름대로 답을 생각하면서 오늘 복음을 함께 읽어 볼까요? 오늘 복음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에게 맡겨진 양들과 관련된 <듣기>, <따르기>, <선물>, <일치>의 상관관계와 <선물>인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일치에는 두 종류의 일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와 ‘나의 양들’간의 일치이며, 또 다른 하나는 ‘나’와 ‘아버지’사이의 일치입니다. 이 네 가지에 대한 구체적인 복음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 <듣기> 27절 :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
- <따르기> 28절 :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일치> : 27-28절,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나’와 ‘나의 양들’간의 일치)
- <선물> : 28절,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 <일치> : 30절,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나’와 ‘아버지’간의 일치)
양들은 목소리를 듣고 자기 목자임을 식별할 줄 알며 그를 따릅니다. 그러면 목자는 이 양들에게 조금 더 연장되었다가 다시 죽을 목숨이 아니라, ‘영원불멸’하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줍니다.(28절) 이 선물은 일치의 증표이기도 한데, 여기서 일치란 듣고 따르는 두 행위를 모두 포함하고 또한 따른다는 것은 이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곧 양들은 자기 목자를 알고 따르며, 그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알고 이끄는 상호 인정과 상호 일치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생명’은 ‘영원불멸’하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하는 어떤 상태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내 손’이라고 했을까요? 단순히 ‘나에게서’라고 해도 될 터인데 말입니다. 육신의 한 기관인 손을 언급하면서, 구체적이고 더욱 밀착된 양과 목자의 관계나 상태를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요?)
아무튼 이 상태는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떼어놓을 수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목자인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 속에 온전히 함께하는 머무르는 상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이 목자에게는 양들을 맡겨주신 <아버지>가 계시며, ‘나’와 ‘내 양들’간의 절대 불가침의 결속은 ‘내 아들’과 ‘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유효합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위대”하신 분입니다.(29절)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인 목자 ‘나’는 <하나>라고 합니다.(30절: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아버지’와 ‘나’와의 완전한 일치입니다. ‘나’와 ‘나의 양’들이 일치하고 ‘나’와 ‘나의 아버지’가 일치하니 ‘나의 양들’과 ‘나’와 ‘나의 아버지’는 당연히 일치 속에 있습니다. 곧 그들(‘나의 양들’)도 아버지와 하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나’와의 일치의 증표라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내 양들’이 하나인 상태가 바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양들 중의 하나인 내가 예수님과 일치 안에 있으면 그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 안에 있는 것이며 그 일치 안에 있으면 그 누구도 예수님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결속의 상태에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영원히 계속되는 현재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내가 현재를 산다면 그것은 이 세상 삶이 끝난 후가 아니라 내가 지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현세에서 이미 <영생>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이것이 바로 성소주일인 오늘 이 복음을 읽는 우리가 받은 초대장의 내용입입니다.
복녀 삼위 일체의 엘리사벳 수녀는 이렇게 얘기 합니다.
“저의 스승님께서는 저의 존재를 당신과 결합하여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영원한 현재에서 살라고 하십니다.” - <침묵하는 영혼> 한국관구 재속 가르멜회역, 27쪽.
* 박순자(세실리아·형곡성당) 님은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에서 성서기호학을 전공하였으며, 언어과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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