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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심탁(클레멘스) 신부

5월 6일 부활 제5주일 : 요한 13,31-33ㄱ . 34-35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문맥> 요한 13-17장은 체포직전(18장)의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남기시는 고별사(유언말씀)에 해당된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13,1-20)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신다.(13,21-30) 이어서 오늘의 복음인 고별사(유언말씀)를 하시며 ‘새 계명’을 주신다.
‘새 계명’은 ‘예수님의 부활에 도달하기 위한 길이요 수단’이다. 주님의 당시 제자들과는 달리, 현대의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부활 신앙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바라보며, 그 말씀과 의미를 해석한다. 동시에 ‘승리한 부활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의미를 발견하며 새 생활에 실천한다. 또한 이러한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삶 속에서 주님의 뜻과 말씀이 이루어짐을 재발견한다.

 

<31-32절> :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곧 아버지의 영광’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은 서로 상통한다.’는 예수님 말씀이다. 서로 주고받는 인격적 상통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아버지와 아들은 존재론적으로 뿌리가 같으며, 시작과 끝의 궁극적 추구방향이 같다. 아들의 정체성과 사명이 아버지의 뜻과 일치한다. ‘상호존중’과 ‘비움’ 그리고 ‘수용’이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존재론적 뿌리와의 단절, 자기 자신의 시작과 끝에 대한 인식부재, 자기 인생의 정체성과 사명 추구의 방향상실, 하느님 우선적인 존중 대신 ‘자기중심(욕심)’과 ‘신비수용 거부’ 그리고 ‘자기 비움의 부재’현상이 잘 나타난다.
성공하는 개인이나 기업이나 공동체는 서로의 바탕과 비전을 최대한으로 공유한다. 서로 다른 바탕과 비전을 조화롭게 통합하고 일치시켜 나감으로써, 자신이 목표한 바를 성공적으로 성취한다.
자신과 공동체의 문제를 분석만 할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구체적인 삶 안에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뜻을 가지고 멋지게 분석하고 기획(Input)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확실하고 구체적인 목표 의식으로 매진하고 몰입하여 실행(Execution)할 때 비로소 결실(Output)을 맺을 수 있다.

 

<33절> :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 -육적인 어른들- 을 ‘젖먹이나 어린 아이’로 대하신다. 젖을 떼거나 부모의 슬하를 떠나는 것이 곧 위험이요 두려움인 ‘아이들’이다. ‘예수님의 현존’은 어린 아이의 어머니 현존과 같다. 그러나 젖을 떼야 밥을 먹고 성장하며, 부모 곁을 떠나야 학교를 가고, 넓은 세상에서 자기의 인생 공부를 한다.
예수님은 어버이처럼 제자들을 탄생시키시고, 그들을 젖먹이시고 기르시며 교육하신다. 더 큰 교육을 위해 예수님께서 영적 아이와 같은 제자들 곁을 떠나주신다. 그 대신 광야의 삶을 이끌어 가는 ‘성령의 이끄심’을 준비하고 계신다.(일찍이 ‘예수님의 광야 여정과 악마의 유혹 퇴치’도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신 것이었다.) 

 

<34-35절> :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구약의 모세오경의 가르침과 613개의 세부 조항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새 계명을 주신다. 은혜롭게도 신앙의 삶이 얼마나 단순해지는지 모른다. 한 가지 계명에 집중하도록 복잡한 것을 하나로 모아 수렴해주시고, 하나로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고 전체를 보는 눈을 갖게 하신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하느님을 사랑함과 하느님께 사랑받음)에 바탕을 둔 ‘내리사랑’이다. 하느님이 종 되시고 사람 되시는 ‘강생사랑’이요, 자신을 십자가에 죽음으로 바치는 ‘희생사랑’이다. 그것은 ‘아가페 사랑’이요, ‘십자가 사랑’이다.
우리의 모임과 공동체가 바로 이 사랑을 닮고자 하지 않으면, 우리 공동체의 모임은 그저 사회 속의 또 다른 ‘패거리’요, ‘계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과 계명에 무지한 채로, 우리 공동체는 성장하지 못한다.(주님의 자녀로 탄생했으되, 말씀의 영적 양식을 먹으려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영양실조 걸린 아기와 같다. 그런 신앙인은 결코 성장되지 않는다. 죽음만이 눈앞에 있다.)
만약 그런 채로 ‘사랑’을 논한다면, 그것은 입으로만 꾸미는 ‘미사여구’이다. 그래도 ‘사랑’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동네 패거리의 동질감’에 지나지 않는다. ‘참 사랑’을 알고 그것을 살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5월 13일 부활 제6주일 : 요한 14,23-29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3절>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함’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과 같다. 또 <인생의 성공적 목표>로써,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면’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성부와 성자의 현존 안에 사는 것이다.’

 

<24절>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아버지의 말씀’이 일치한다. ‘부자간의 일치관계’와 ‘사랑과 순종의 일치 관계’를 대원칙으로 말씀하신다.

 

<25절>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이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중에 삶 속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주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26절>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 ‘아버지의 파견’과 ‘아드님의 이름’으로 오신다. 성부와 성자와의 일치와 연속성 안에 있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바로 그 성령께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기억시켜’恪笭킴? 성령의 가르침과 상기시킴으로 <말씀은 계속된다.>

 

<27절>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남겨주신다. 이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 산란함도 두려움도 극복하는 평화이다. 그 평화는 근본에 입각한 평화이다. 즉 말씀을 통한 평화이다.(상대적이고 불완전한 미봉책의 평화가 아니다.) 그 평화는 아버지와 처음부터 함께 있는 원초적인 평화이다. 그 평화는 태초에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평화이다.(요한 1장 참조)
그 평화는 인간과 세상의 죄와 나약함으로 파괴되고 손상된 것들도 원초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창조와 사랑의 평화이다. 혈과 육의 평화가 아니라, 말씀과 영의 평화이다. 그 평화는 그리스도께서 목숨 바쳐 얻어주신 평화이다. 세상의 어떤 존재나 세력도 그 평화를 흔들 수 없다.

 

<28절>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한다. 혈과 육의 차원(감정)으로는 ‘예수님의 떠나심’이 제자에게 힘겹지만, 말씀과 영의 차원(신앙) 안에서는 아버지께로의 복귀이므로 근원적인 기쁨이다. ‘아버지께로의 돌아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이다. 아버지는 근원이시면서도 목적이시다. 인생의 완성이므로 아버지께로의 복귀는 최고의 행복이며, 기쁨의 극치일 수밖에 없다.


<29절>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말씀해 주신다.’ 즉 주님의 말씀 안에는 ‘미래를 위한 비전’이 담겨있다. 신자들 가운데서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점집을 드나들고, 사주팔자, 궁합, 관상 등을 본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 안에 살지 않으므로 ‘이미 주어진 말씀 안의 비전’을 볼 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미리 알려주시는 목적은 일이 일어날 때 ‘믿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면, 인생의 비전뿐만 아니라 비로소 ‘믿음’이 생긴다. 새로 입교하여 믿음생활에 입문하는 사람들이나 성당에는 오래 다녔으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믿음이 생기고 성장한다.
확고한 믿음을 가지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그러면 비전이 열리고 미래가 밝아진다.

 

 

 

5월 13일 부활 제6주일 : 요한 17,20-26
20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20절>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직전 마지막 기도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우리 같은 신자들)을 위해서도 기도드리신다. 그 기도내용은 다음과 같다.

 

<21-23절>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성부와 아드님 성자의 일치 관계를 바탕으로, 예수님의 직제자들뿐 아니라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하나가 되기를 기도드리신다. 그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아버지이시다.(21-22절) 일치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항상 일치를 위한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기도하실 정도로 제자들 간의 일치는 우리 신앙생활을 완성하는 주제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현존하시는 아버지의 현존을 제자들에게 주신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영광이 제자들 안에도 현존한다.(22절) 제자들 안에 예수님의 현존은 제자들의 완전한 일치를 지향한다.(23절)
이 일을 위하여 부자간의 ‘일치’와 아버지의 아드님 ‘파견’을 믿게 하고(21절), 아버지의 아드님 ‘사랑’과 그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이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기도 주제이다.(21.23절) 우리 신앙의 증거생활은 성부와 성자의 일치와 파견 그리고 사랑을 세상이 믿고 알게 하는 것이다.

 

<24절>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현존’ 안에 ‘성자 예수님과 그 제자들 모두’ 함께 현존하게 되기를 기도하신다. 즉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 안에 모두 함께 공존하기를 기도하신다. 그리하여 제자들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과 영광을 눈으로 직접 뵙게 되기(지복직관 至福直觀)를 바라시는 기도이다. ‘말씀을 듣고 순종함’은 곧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현존(사랑과 영광)을 눈으로 직접 뵙는 신앙의 완성’과 직결된다.

 

<25-26절>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명의 완수와 미래의 과제와 비전이 기도 속에 담겨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 주셨다.(과거시제) 그리하여 아버지의 현존과 아드님 파견을 세상이 알게 되었다.(25절) 아버지의 현존(‘이름’)을 앞으로도 알려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현재와 가까운 미래)
그리하여 아버지의 성자 사랑이 제자 사랑으로 확대되고, 성자의 현존이 제자들 안에 머무는 미래 지향적 목적이 성취되게 하려는 것이다.(26절) 이것은 지상에서 제자들(교회) 사이의 일치를 초월하여 하느님 나라에서의 궁극적 일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신앙 안에서 지상적 일치와 천상적 일치는 하느님 안에서의 완성인 신비적 일치를 지향한다.


 

 

 

5월 20일 주님 승천 대축일 : 루카 24,46-53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49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50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51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52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53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46절>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란 ‘성경에 예언된 그대로’라는 뜻이며 동시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주 하느님께서 보내 주시기로 약속하신 그분’이며, ‘죽기까지 말씀에 순종하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 그 결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다. ‘그리스도 부활의 영광’은 아버지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신 결과’이다. 우리 인생의 영광과 성공은 하느님께 순종하는데서 온다는 것을 기억하자.

 

<47-48절>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순종으로 죽음’을 맞은 그 자리에 ‘부활의 꽃’이 핀다. ‘예루살렘’은 그 자체로 지리적 중요성을 띤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곳이 순종과 죽음의 현장이며, 부활 증거의 현장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순종으로 죽은 현장에 부활의 증거가 꽃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부활 체험의 증인으로 삼아, 당신 이름으로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도록 선포하게 하신다. 부활이라는 결과를 체험한 입장(결과에 대한 확신)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시작과 과정에로의 초대)는 것이다.
 
<49절> 49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그런데 필수적인 조건이 있다.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약속 말씀’대로, ‘성자 그리스도의 파견’으로 오신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힘’이시며, 그 힘으로 제자들을 입혀주신다. ‘성령의 힘으로 옷 입고서야’ 제자들은 선포할 것이다. ‘순종의 완성 장소인 예루살렘’에서부터 모든 민족들에게 ‘순종의 열매인 부활 증거의 장소’에서 회개와 죄 사함을 선포한다!

 

<50-53절> 50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51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 가셨다. 52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53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예루살렘 밖 베타니아까지 데리고 나가셔서 강복하시고 하늘로 오르시는 장면은 엘리야가 엘리사를 떠날 때의 장면과 흡사하다.(2열왕 2,1-18) 주도권을 쥐신 ‘예수님의 강복’을 제자들이 받았다면, 엘리사는 ‘스승의 영(靈)의 두 몫’을 청하여 받았다.(2열왕 2,9.15) 그런데 예수님의 강복은 동시에 성령의 오심을 약속하는 것이다.
제자들을 떼어 놓고자 하는 엘리야를 엘리사가 뒤따랐다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당신 제자들을 데리고 거기까지 나가셨다. 지상에 남은 엘리사와 제자 일행이 예리코로 되돌아 왔다면(2열왕 2,17),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을 경배하며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 자리 잡는다.
루카복음 시작 부분(1,8이하)이 즈카리야의 성전 기도로 시작하여, 제자들의 예루살렘 성전 기도 생활로 끝맺는다. 성전에서 바치는 하느님 찬양 기도는 큰 응답을 받는다. 즈카리야는 아들 세례자 요한을 얻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힘으로 옷 입음’ 받을 것이다. 성공적인 성전의 기도를 부활의 증거자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5월 27일 성령 강림 대축일 : 요한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점차 구체화된다. 당신의 두 손, 당신의 옆구리가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기본적 현존과 말씀에 귀 기울이면 ‘평화’가 찾아오고(19절), 급기야 그리스도의 구체적 실체가 드러나며, 한없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20절) 내 인생에 기쁨이 필요한가?
점차 그리스도의 ‘평화는 강화’된다. 그리고 우리를 ‘파견’한다. 더욱 강한 평화로 무장한 자는 파견된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얻고, 실제적 기쁨으로 평화가 강화되지 않은 사람은 파견 받을 수 없다. 기쁨과 평화를 잃은 봉사자는 파견되어서는 안 된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숨과 말씀으로 ‘성령’을 받는다. 그리스도와 같은 호흡을 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성령의 오심을 맞을 수 없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누리는 자는 용서하는 권한과 능력을 갖는다.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숨결과 말씀에 순종할 때 가능하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항상 내주하시는 성령의 현존으로 용서하는 권한과 능력을 가졌으되, 진실로 나는 원수나 형제를 용서하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숨결과 말씀에 나의 호흡을 맞추고 순종하자.
나에게 한(恨) 맺히게 한 원수도 ‘그리스도의 숨결과 말씀에 순종함’과 ‘성령의 내주하심’가운데서는 용서할 수 있다. 용서는 결국 원수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다.

 

* 대구대교구 사제로 1991년 사제서품, 현재 용계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