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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허광철(요셉) 신부.독일 유학

예수 성심 성월의 복음묵상을 시작하며
몇 해 전 지금도 살고 있는 독일 본당에서 맞았던 첫 예수 성심 대축일의 일이다. 사제성화의 날이면서 또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축일이기에, 조금 정성을 모아 준비를 했다. 주일도 아닌데, 더듬더듬 몇 마디 독일말로 강론도 준비하고, 영성체 후 묵상 곡으로 한국말 생활성가도 한곡 뽑을 예정이었다. 평일에는 스스로 제대를 차려야 하기에, 성작도 한번 더 닦고 제대 위에 먼지는 없는지 이리저리 살폈다. 드디어 시간이 되어, 입당 종이 울리고 성당으로 들어갔다.

이 날 미사는 무려 한 시간이나 걸렸다. 봉헌을 한 것도 아니고, 영성체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고 고개를 들어 보니, 아무도 없었다! 너무나 당황스런 첫 경험이라 한동안 제대 위에 멍하니 혼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곧 내 마음 한켠에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오셨다.

여전히 외로우시고,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고자 피 눈물을 흘리고 계실 ‘그분의 마음’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감히 그분의 마음을 위로하겠다는 생각으로 성당 천장에 부조된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나의 작은 눈물을 보태어 한 시간 축제의 잔치를 올려 드렸다. 이 후, 종종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미사를 봉헌해도 더 이상 슬프지 않다. 늘 위로받는 것은 그분의 마음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기에.

그분 사랑의 마음을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 삼위 하느님의 이름도 ‘사랑’이요, 그분의 성체성사도 ‘사랑의 성사’요,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오직 사랑’ (연중 11주일 묵상 참조) 일진대….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과 신앙 안에서 그분의 마음을 발견하고 그 사랑에 감복(感服)하는, 그래서 그 마음에 하나 되는 6월이기를 …. 기도합니다.

 

 

 

6월 3일 삼위일체 대축일 : 요한 16,12-15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하느님이 스스로 보여주신(계시하신) ‘신비 중의 신비’인 삼위일체의 신비! 그 신비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오늘 복음에다가 그것의 바로 앞부분(16, 4ㄴ-11)의 내용을 보태어 묵상을 시작해 본다. 요한복음 전체 안에서 오늘 말씀은 다른 복음들의 ‘최후만찬’ 후 고별사를 대신하는 자리,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난 예수님’(13장)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고별사(14-16장)에 해당한다.(고별사의 주요 내용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다시 주시며, ‘성령의 파견을 약속’하시는 말씀임을 잊지 않는 것도 전체적인 묵상에 도움이 되리라.)

예수님은 오늘 ‘당신의 떠남’과 ‘성령의 파견’을 말씀하시는데, 흥미로운 두 가지가 발견된다.
먼저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신 분’(5절)에게로 ‘되돌아간다’는 말씀으로, 당신이 ‘성부’로부터 ‘보내어진 분’임을 드러내신다. 그러면 ‘보호자’(7-8절)요 ‘진리의 영’(13절)이신 성령은?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7절)는 말씀에 따라, 성령을 보내시는 분은 (오늘 말씀에 따르면) 일단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한마디로 ‘파견 받은 분’이 이젠 ‘파견하시는 분’이 된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내가 떠나야’(7절)만 한다는 것이다. 어디로? 바로 성자인 ‘내가 아버지께로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은 자신을 ‘보내신’ 성부께로 다시 ‘돌아간’ 성자에 의해 ‘보내어지는’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결국 성령은 하나이신 성부와 성자에게서 ‘보내어지는’ 것이다.(여기에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의한 도그마(교리)적인 숙고가 조금은 이해된다. :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또 하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15절)이라 하시며, 파견된 자신은 파견한 분의 ‘모든 것’을 갖고 있음을 밝히신다. 그리고 오실 성령께서는 ‘나의 것’을 받아 알려 주실 것(15절)이라는 말씀으로, 성령이 가지고 계시고 알려 주실 모든 것은 ‘나의 것’, 즉 그것은 ‘아버지의 것’,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다. 결국 성부 성자 성령 한분이요 셋이신 그분의 소유는 ‘같은 것’이다.

 

역시 어렵다. 짧은 말씀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다 알아듣겠다는 것은 진정 어불성설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함을 오늘 말씀을 통해 조금이라도 확인함은 기쁜 일이다. 앞에서 발견한 두 가지에 근거하여, 우리의 눈높이에 맞춘 두 가지 묵상을 더 해 볼 수 있으리라.

첫째, (성부께는 ‘파견하시는’ 분, 성령께는 ‘파견되시는 분’이라는 주 역할이 두드러지는 반면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자께는 성부로부터 ‘보내어진’, ‘파견된’ 수동적인 역할과 성령을 ‘보내고’, ‘파견하는’ 능동적인 역할 두 가지가 다 두드러진다. 다시 말해 ‘파견된’ 자신의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파견하는’ 능동적인 역할까지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되시어 우리 눈에 확실히 사셨던 그분은,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 바로 교회의 역할에 ‘모범’이 됨은 두말 할 나위 없다. 그렇다 할 때,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의 모습으로 변해야 하는 한국 교회의 사명은 예수님의 모범에 기인하는 절대절명의 과제이다. 또한 ‘받은 신앙’에 머물지 않고 ‘주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하는 선교적인 모든 신자들의 사명 역시 그러하다 하겠다.

둘째, ‘같은 것’이라는 성부·성자·성령의 소유는 무엇인가? 두말 하면 잔소리, 그것은 그분의 ‘사랑’(1요한 4장)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이 그분이 가진 것의 모두이기에, 바로 그분에게 ‘소유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종종 물질적인 소유(예컨대 돈) 내지 인간적인 명예나 감투를 자신의 존재인 양 여기고 착각하는 우리. 그러므로 우리가 오로지 갖고자(소유) 하는 것은, 그래서 되고자(존재) 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이신 ‘하느님’이 되어야 하리라.

주님,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라 하더라도, 그 신비를 당신 ‘말씀’과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요한 14,26) ‘성령’의 도움으로 묵상함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좋아하는 독일 말 생활성가를 당신께 감사의 선물로 노래합니다. “Hast du was, bist du was! Was du hast, ist nur die Liebe! …”(“네가 가진 것, 그것은 바로 너! 네가 가진 것, 그것은 오직 사랑! …”)


 

 

 

6월 10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루카 9,11ㄴ-17
11 그러나 군중은 그것을 알고 예수님을 따라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세밀한 독서’를 강조하는 ‘거룩한 독서’가 경계하는 묵상의 첫 자세는 자기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 안으로 끊임없이 다시 돌아가도록 ‘거룩한 독서’는 요청하는 것이다. 매우 부족하지만 ‘거룩한 독서’로 십여 년 묵상기도를 해 오고 있는 필자는 요즘, 아주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바로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되는데, 완전 자기 멋대로의 상상이 아니라, ‘신약성서의 언어’가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 그러니까 스스로 ‘기억하고 있는 것’에 대한 상상 말이다. 최후만찬과 더불어 ‘먹이시는’ 기적중의 기적인 오늘 복음은 나에게 자연스레 이런 상상, 아니 묵상의 세계로 초대한다.

<방금 전 성찬례 예식에 참여한 루카가 집으로 돌아 와 아직도 떨리는 마음으로 펜을 든다. ‘빵을 나누기’ 전 공동체에서 늘 그렇게 해 왔듯,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요셉(가칭) 선생으로부터 들었다. 요셉 선생은 예수님을 직접 본 제자 필립보(가칭)의 직제자로서 예수님에 관한 모든 얘기를 그 제자로부터 ‘들은’ 자이다.

오늘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였다. 요셉은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던 필립보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하며 ‘말씀 선포’를 시작했다. 필립보는 자신이 바로 그 현장에 있었던 자라고 이야기 하며, 아주 놀라운 ‘자기 고백’을 했다고 한다.

“제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정말 대단했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참으로 거대한 식사시간이었지요.

그런데 들어 보시오. 예수님과 나는 3년 동안 동고동락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리는 매일 그분과 ‘식사’를 했답니다. 그분은 참으로 ‘식사의 자리’를 즐겨하셨어요. 죄인이든 바리사이든 세리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시며 ‘말씀’으로 ‘행동’으로 우리를 가르치셨지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 많은 식사의 자리를 함께 했었는데, 예수님과 함께했던 그 많은 식사의 의미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는 거.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식사의 의미를 말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그렇게 무참히 ‘돌아가신 후’ 우리들은 뿔뿔이 헤어졌고, 몇몇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고향에나 가려고 짐을 싸고 있었지요. 어떤 제자는 이제 그저 다 잊고 싶다고, 예수님과 함께 한 모든 시간을 기억 속에 지워 버리고 싶다고 하며 떠나갔지요.

그런데 우리를 도와주던 몇몇 여인과 고향으로 가던 제자들이 다시 돌아 왔어요. 정말 놀라운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지요. 예수님은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정말? 우리는 다락방에 다시 모였답니다. 유다인이 무서워서 벌벌 떨던 절망의 그 장소에. 그런데 부활하신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고, 숨을 불어 넣어 성령을 주셨고, 예전처럼 빵을 다시 나누어 주시더군요. 그리고 그분은 다시 아버지께로 가셨어요. 이제 우리 중 그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었답니다.

사실 이때부터 우리는 너무 바빠졌었답니다. 우리의 가슴은 성령으로 불타올랐고, 문을 박차고 나가,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고(제자들이 제일 먼저 전한 원복음: 1코린15,3-8) 동네방네 선포하며 다녔지요. 하지만 저녁엔 반드시 다시 모여서 식사를 했답니다. 지금 바로 오늘 우리 공동체가 하는 이 식사와 꼭 같았답니다. 우리는 이 식사시간을 통해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의 ‘말씀들’과 하신 수많은 ‘행적들’을 ‘기억’하고 ‘이야기’ 했답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 주셨지요.

자, 무엇보다 우리가 이 식사를 통해서 기억해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며 그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말씀처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신 그 분은,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하신 바로 이 식사 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제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냐구요? 저희도 그분 부활 후, 그분이 그리스도요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을 가진 뒤에야 이 기적을 다시 ‘기억’해 내었고, 그 의미를 깨달았답니다. 최후만찬 때도, 죄인들과의 식사에서도, 그 수많은 말씀과 기적을 하실 때도, 그분의 지향은 오로지 ‘아버지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였답니다. 굶주린 수많은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배불리시듯, 영으로 생명으로 사랑으로 굶주린 우리를 배불리시고자 그분이 사람으로 오셨고, 사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모일 때마다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에서의 그분과 함께 할 ‘영원한 식사’를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 완전한 식사를 그리워하라고 그분은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최후만찬에서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보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이라 시야를 조금 넓게 하여 묵상을 해 보고 싶었는데, 조금 길어진 듯하다. 무엇보다 거룩한 독서에 도움이 되는, 아니 거룩한 독서의 근본바탕이 되는 내용을 되새겨보고자, (완전 새로운 모양으로) 묵상을 해 보았다. 

한마디로 ‘신약성서의 언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의 언어’이며, 그분께 대한 ‘믿음의 언어’라는 사실이다. 즉 그 언어 안에는 먼저 그분을 ‘믿었던’ 이들의 ‘기억’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언어가 ‘말’(선포)되어진 첫 자리는 바로, 제자들 ‘식사의 자리’였음엔 이견이 없다. 이 ‘식사의 자리’는 결국 예수님 부활 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우리 미사와 같은 ‘예배의 자리’로 변화되어 간 것이다. 그리고는 그 기억의 보전과 자기 공동체의 예배를 위해 ‘글’로 쓰인 것이 바로 신약성서이다.

따라서 ‘기억과 믿음’의 산물인 신약성서를 읽는 우리의 첫 자세는 그 ‘제자들의 기억과 믿음’에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리라. 또한 성체와 성혈 안에 모인 우리의 미사에서 우리는 그 ‘기억과 믿음’을 더욱 완성시켜 나가야 하리라.


 

 

 

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 루카 7,36-8,3
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1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만이 전하는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 벌어진 죄녀에 대한 이야기(7,36-50)와 열두 제자와 함께 다니며 시중 든 많은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8,1-3)이다. 구태여 두 부분의 공통점을 이야기하자면, 유일하게 루카에게서만이 복음의 중간에 벌써 예수님을 따르는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파견을 받은 여성’인 죄녀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죄녀를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 마리아’(8,2)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들이 종종 있었는데, 궁금하여 찾아보니 큰 관련이 없어 보인다고 성서학자들은 이야기 한다.)

죄녀를 통해 ‘죄’와 ‘용서’와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그 관계에 대해서 멋지고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묵상을 시작해 본다.

먼저 바리사이와 죄녀에 대해서 살펴보자. 바리사이는 ‘시몬’이라는 명확한 이름을 가진 자이며, 예수님을 ‘초청한 자’ 그리고 지금 그분과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 자’이다. 그에게 예수님은 ‘예언자’, ‘스승님’으로 지칭된다. 한마디로 그는 ‘예수님을 알고’ 그분과의 관계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자’이며,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이다.

죄녀는 먼저 이름도 없는 자이고, 한마디로 ‘죄인’으로 규정되어 스스로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자’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말은 한마디도 없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시몬도 사람들도 예수님도 복음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죄인, 그 어떤 죄이든 죄를 지은 ‘말 그대로의 죄인’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요 ‘죄인’인 그녀가 예수님께 무언가를 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된다. 그녀는 먼저 예수님을 ‘찾아’ 왔고,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그것을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마침내는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른다.’(38절)

여인의 이러한 행위 후 이제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바리사이 시몬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44-46절)가 되어 버리고, 그녀가 한 행위는 곧 ‘용서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한 행위’로 바뀌어 버린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제기 된다. 죄녀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믿음을 인정 받고 파견 받은 것”(48-50절)은 오로지 그녀의 행위 자체 때문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새 번역으로 묵상하다가 큰 함정에 빠져 버렸다. 47절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에 따라,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에 큰 사랑을 드러낸 것’, 즉 ‘이미 용서받은 여인’을 중심으로 묵상을 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이상하여 원어와 독일어 성경을 찾아보았다. 새 번역이 틀렸다! 그런데 이것은 작은 실수가 아니다. 완전히 의미가 달라지는 번역이다. 200주년의 “그는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많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라는 것이 더 맞다. 바로 ‘사랑이 용서의 이유’이다. 그 다음 문장은 번역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이 문장도 미래형을 옳게 해석한 200주년이 맞는 것으로 보여진다. “적게 용서받는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 즉 이제부터는 다시 ‘사랑이 용서의 결과’, 다시 말해 이제 그녀는 자신의 사랑으로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랑 때문에 용서받고, 그 용서는 다시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으로 이 말씀을 해석할 수 있다 하겠다.)

질문을 바꾸어야 하겠다. 여인이 용서받고 믿음을 인정받고 구원받은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바로 행위로 드러난 여인의 ‘사랑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의 행위에서 ‘그녀의 사랑’을 발견한 ‘예수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200주년의 번역에 따라) 죄와 용서와 믿음에 대한 오늘 예수님 말씀의 명확한 기준이 밝혀진다 하겠다. ‘너를 구원한 믿음’은, 또한 ‘너에 대한 용서’는 오로지 ‘많이 사랑했기 때문’(47절)이다.
“내가 너의 사랑을 보아주마. 사랑만 하여라, 사랑만 하여라, 그러면 너는 용서받고 구원받으리라.” 예수 성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주님, 그러면 그렇지요. 사랑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됨을 당신께서는 다시 한 번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인정해 주실 주님, 말씀대로 저희의 ‘죄’가 아니라 저희의 모든 몸짓과 눈물과 행위 안에서 드러나는 ‘저희의 작은 사랑’을 보아주십시오.
그리하여 저희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을 보아주시는 당신 때문에 저희가 이리 살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지금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 루카 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66절)라는 놀라움과 소문 속에 세례자 요한은 태어난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고, 드디어 (히브리말로)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는 뜻의 이름인 ‘요한’이 된다. 바로 오늘 말씀에선 그의 탄생과 그의 이름을 짓는 것에 대한 에피소드가 소개되는데, 그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이미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인 그의 앞날을 예견할 수 있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그의 탄생은 하느님 측면에서 보면 이름의 뜻처럼 ‘그분의 자비’(58절 참조)로 이루어진 것이고, 인간의 역할을 이야기 하라면 아버지 즈카르야의 ‘침묵의 대가’로 이루어진 것이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 20)

가브리엘 천사의 이 말에 따라 즈카르야는 오늘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열 달 동안,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며 천사에게 받은 ‘요한’이라는 이름(1, 13)을 아기에게 ‘그대로 전해주기’까지 그는 침묵 속에 살아야 했다. 바로 예수님의 성탄이 그러하듯, 요한의 탄생도 ‘하느님의 계시’와 ‘인간의 순종과 협력’으로 이루어지는데, 차이가 있다면 마리아의 순종은 즉각적이나 즈카르야의 순종은 ‘침묵의 시간’을 지나 완성된다는 것이다.<또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성령에 가득 차 마니피캇을 노래(1, 46-55)하였듯이, 오늘 교회의 독서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즈카르야도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성령으로 가득 차” ‘찬양의 노래’(1, 67-79)를 부른다.>

바로 즈카르야에게 ‘침묵의 시간’은 ‘온전한 순종과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 꼭 필요한 시련의 시간이었고, 비로소 그 침묵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온전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침묵의 대가’로 태어난 세례자 요한은 더 이상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역사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루카 3, 4)가 되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최고의 예언자가 된다. 바로 ‘침묵이 소리’가 된 것이다.

주님, 이제야 알겠습니다. 제가 아직도 온전히 찬미의 기도를 드리지 못하는 이유를, 온전히 당신에 대해 ‘외치는’ 소리가 되지 못하고, 당신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그래서 온전히 믿지 못하는 그 이유를 말입니다.
지금 저의 시간은 ‘침묵의 시간’, 입을 닫고 기다려야 할 시간. 온전히 당신을 드러내는 ‘소리’가 될 때까지, 이 시간 먼저 침묵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