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 연중 제18주일 : 루카 12,13-21 재산의 증식과 생명의 가치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예수님께서 두 번에 걸쳐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고(루카 9,22.44-45),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루카 9,51 이하) 이어서 세 번째 수난 예고(루카 18,31-34)를 하시고 예루살렘 입성하시기까지(루카 19,28) 여러 가지의 설교 말씀을 하시는데, 이 달의 복음은 모두 그간의 설교 내용들입니다. 점점 더 긴박한 상황으로 접어드는 시기입니다.
<본문읽기> 루카 12,13-15 :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 생명을 지킴이 근본이다.
군중 가운데 어떤 사람이 형제간의 유산상속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을 ‘스승님’이라 부르며 그분을 뒤따른 것이 고작 자신이 집안의 유산을 더 많이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열심히 부르면서, ‘돈벌이’나 ‘현실 문제 해결’만을 청하지는 않습니까?
사실 가족 간의 유산 분배는 작은 문제는 아닙니다. 많은 가정이 돌아가신 부모님 영전에서 재산 문제로 싸웁니다. 심지어 화장터에서도 형제끼리 유혈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남들이 알 수 없는 그 만한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만,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보다 더 한 일들이 자주 방송 매체를 통해 알려집니다. 아버지를 폭행 또는 살해하거나 강제로 정신병원에 보내는 예도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분배 정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하여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종류의 탐욕’이 개인의 정신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공동체인 가정과 사회 전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富)나 재산(財産)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사람(자신과 타인)의 생명(生命)을 지킬 것을 촉구하십니다. 인간 생명이라는 근본 가치의 기초 위에서 영육이 건강한 사람에게, 부나 재산도 쓸모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나에게 근본 가치입니까?
<본문읽기> 루카 12,16-21 :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고, 하느님 앞에서 부자가 되라.
땅의 소출을 한없이 모아 그것들 저장해 두고, 그것으로 안정을 찾고, 인생을 즐기며 먹고 마시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의 목숨(생명)을 지키는 준비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미래를 위해 ‘땅의 재화’는 모을 줄 알면서, 자신의 영원한 미래를 위해 ‘하느님 앞에 설 준비’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궁극적인 부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마지막에 웃는 자입니다. 인생은 운동 시합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종이 울리고 난 다음에 ‘승리의 팔이 올라갈 때’ 비로소 승리하는 것입니다. 땅의 재화, 육신의 안정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준비이며 시작이요 과정일 뿐입니다. 부의 축적과 육신의 안정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기초로 쓰여야 할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투자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반대로 삽니다. 내 안에 그런 어리석음이 가득 찬 걸 깨우쳐야겠습니다.
8월 12일 연중 제19주일 : 루카 12,32-48 : 깨어 기다리며 준비하여라. 그러면 행복하리라.
32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33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34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본문읽기> 루카 12,35-38 : 깨어있어라, 종처럼!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야간에 벌어지는 혼인잔치에서 주인이 아무 시간에라도 돌아올 때, ‘깨어 기다리다 문을 열어주는 종처럼’ 되라는 말씀입니다. 주인은 그런 종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기다림의 노고를 치하해 줄 것이니, 그런 깨어 기다리는 종은 누가 봐도 참으로 행복합니다. 주인이 매우 흡족해하고 기특하게 볼 것이니, 그 후의 혜택과 포상은 따 놓은 당상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종의 관심은 주인의 마음을 읽는데 온전히 집중합니다. 주인의 마음과 스타일을 고려합니다. 그렇지 않는 종이 있다면, 그는 매우 미련한 종일 것입니다. 주인의 속마음과 본심을 잘 알고 그의 생리적 습관과 삶의 리듬까지 삶의 전반을 꿰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종은 주인의 다음 처신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아쉽고 가려운 부분을 제 일처럼 알아서 처리하는 종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주인이 그만큼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행복은 곧 종에게는 축복입니다.
<본문읽기> 루카 12,39-40 : 깨어 준비(準備)하고 있어라, 주인처럼!
‘마치 도둑의 침투 시간을 알고 대비하는 집주인처럼, 준비된 삶을 살아라. 언제 어느 때라도 도둑의 침입에 방어할 태세를 갖추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인생을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것을 지킬 줄 아는 정당한 주인의 태도’로 ‘일상의 대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주인 정신’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일에 부르심을 받아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처삼촌 산소 벌초 하듯’ 대충 대충 무성의하게 한다거나, 공적 직무를 맡은 채 남의 일 하듯 책임감 없이 한다면, 아니 한 것 만 못합니다.
그러나 착각하면 안 될 일이 있습니다. 진짜 주인처럼 깨어있어야 하지만, 다만 사람은 ‘결정적인 때’를 모르는 ‘상대적 주인’으로서의 주인 정신을 발휘하는 것일 뿐입니다. 때를 주관하시고 결정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때가 차면,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문제와 어려움은 ‘인간은 <때의 주인>이 아니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때 발생합니다. 그 경우 수많은 시행착오(施行錯誤)를 겪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대로 당신께서 직접 계획하신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인간과 세상은 하느님의 때를 채워야 합니다. 그것은 기다림이며 인내이며 인격수양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뜻과 말씀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실천하며 열매를 맺어 나가는 대망(大望)입니다.(로마 5,2-5 참조)
‘때의 주인이 아닌 사람’은 주님께서 정하신 대로 그 때를 삶으로 채워야 합니다. 때가 차지 않았는데, 위대한 일이 열매로 맺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생명의 탄생도 ‘때를 채움’으로 이루어집니다. 자연의 이치도, 어떤 과일의 열매도, 한 인간의 탄생도 때를 채움 없이는 운용이 되지 않습니다. 이 기간은 깨어 기다리는 ‘준비 기간’이며, 이는 ‘잠재적인 성취’이며, ‘성공의 선취(先取)’입니다.
8월 19일 연중 제20주일 : 루카 12,49-53 불과 분열을 주러왔다. 최선을 선택하라.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본문읽기> 루카12,49-50 :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49절)
불은 ‘하느님 심판의 도구’(창세 19,23-24 : 소돔과 고모라 ; 이사 66,15-16)이면서도 ‘하느님 구원의 도구’(탈출 3,2;13,22;14,24 : 모세의 부르심과 탈출한 백성의 인도)입니다. 불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고자 하시는 것’은 생명의 하느님 현존을 세상에 뿌리 내리고 구원의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르시는 세상의 불은 곧 ‘성령의 불’입니다.(루카 3,16 :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 불은 쭉정이를 태워버림으로써 심판의 기능을 합니다.(루카 3,17)
결국 ‘하느님 현존의 불’은 성령과 함께 세상에 불을 질러 구원과 심판을 하십니다.
-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50절ㄱ) : 이 세례는 일차적으로 ‘성령과 불의 세례’(루카3,16-17.22)입니다.
-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절ㄴ) : 동시에 이 세례는 짓눌리는 ‘고난의 세례’(마르 10,38 참조)입니다. 또 이 세례는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때를 채워야 하는 ‘죽음의 세례’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명 완수까지 ‘때가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때의 주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때가 채워지기까지 짓눌림과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한 세트로 선물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生)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버리려는 태도를 가지고 살며, 매번 전전긍긍합니다. 처음부터 그것은 불가능하며 하느님의 뜻도 아닌데, 사람들은 ‘하느님이 나에게 너무 가혹하시다.’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종합 선물 세트를 모두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참 평화가 있고, 비로소 참 진리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신앙인의 성공비결이 있습니다.
<본문읽기> 루카 12,51-53 : 세상에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세상이 원하는 평화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평화는 일단 일시적이며 불완전하고 언제라도 파괴되기 쉽습니다. 부나 물질이 주는 평화가 그렇고, 일시적인 휴전의 평화가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견고하지 않으며, 위장된 평화일 뿐입니다. 참된 평화는 이 세상으로부터 오지 않으며,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진정 예수님은 파괴적인 분열과 대립을 원하신다고 여기십니까?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진리와 진실을 가려내시기 위해 거짓과 악에 대립하고 충돌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적인 차원에서는 하느님이냐 악의 세력이냐 하는 이원론적인 전쟁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영의 차원에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편 아니면, 악한 적의 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과의) 논쟁과 충돌이 하느님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각성(覺醒)과 정화(淨化) 작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열’은 예언의 전통 안에서는 세상 종말에 나타나는 환난의 한 특징입니다.(미카 7,6; 하깨 2,22; 말라 3,24) 멸망의 징조로도 이런 분열이 일어납니다.(루카21,7-13) 하느님의 심판이 닥쳤다는 징조입니다. 심판은 곧 하느님의 현존과 생명의 구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다만 하느님 편에 속해 있지 않은 자에게는 하느님의 현존과 심판이 멸망입니다.
8월 26일 연중 제21주일 : 루카 13,22-30 : 좁은 문을 향해 힘써라. 최후의 승자가 되라.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본문읽기> 루카 13,22-24 :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노력에서는 곧잘 실패합니다. 모순된 태도로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맵시 있고 예쁜 옷을 입고 싶으면서도, 군살을 빼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생로병사를 하나의 축복’으로 주셨고 하느님 나라를 향한 비전으로 살게 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은 ‘현세 생의 축복만’ 수용하고 나머지는 거부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좁은 문인 노병사(老病死)’의 자연적인 과정을 거부함으로써, 하느님 나라 비전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인생의 장점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약점까지도 모두 수용해야 균형 있고 건강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소아가 성인병에 걸리고 젊은이도 급성병으로 비명횡사하는 시절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늙어서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지 못하고, ‘하느님이 왜 나를 불행하게 만드셨나?’며 하느님을 줄곧 원망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마치 자신은 절대로 아프거나 죽을 수 없는 몸인 것처럼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 속에도 하느님 사랑의 능력이 있고, 그 너머에도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한데 말입니다. ‘좁은 문의 의미’에 집중해 봅시다.
<본문읽기> 루카 13,25-27 : 주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불의가 아닌 정의와 선을 실천하라.
불의를 일삼으며 구원을 바라는 자는 집주인을 모르는 종들 혹은 손님과 같습니다. 일단 집주인이 (구원의) 문을 닫아걸면, 누가 집주인에게 문을 열어달라는 요청을 해도, 집주인은 과거의 친분 하나만으로 문을 열어 주는 법이 없으며, 아는 척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2회 반복 강조)라고 하면서 소속불명 처리하고 물리칩니다. 소속불명 처리되고 거부당하는 이유는 ‘불의를 일삼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의 집주인에게 환대를 받는 자는 ‘불의를 행하지 않고, 정의와 선을 실행하는 자’입니다.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도 같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행실을 바르게 하고 정의와 선을 실천하며, 불의 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적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면 어떤 경우에라도 주님으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구원의 문에 들 것입니다.’
<본문읽기> 루카 13,28-30 : 인생역전(人生逆轉)
‘좁은 구원의 문’을 통과하면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과거에 (지식으로) 하느님을 알던 자라도 (행동으로) 정의를 실천하고 선을 행하지 않고, 더구나 불의를 저지르면, ‘하느님 나라 입장 불가’입니다.
좁은 구원의 문은 하늘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세의 일상 안에 있으며, 일상의 생로병사(生老病死) 안에 있습니다. 그 안에서 외적 행동으로 불의를 일삼아서는 구원에서 소외됩니다. 지금 자신의 생(生)에만 집착하며 일시적으로 현세적 성공을 이룬 자라도 지금이 잘난 것 같고 성공한 것 같겠지만, 노병사(老病死)를 통하여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한 자들에 비하면 꼴찌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 여러분, 우리의 성공적 비전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현세의 생에 대한 집착으로 성공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입장 불가’ 혹은 ‘꼴찌’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심탁(클레멘스) 신부 : 대구대교구 사제로 1991년 사제서품, 현재 용계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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