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성월의 복음 묵상을 시작하며
“천당에서 만납시다.”라는 마지막 인사를 한 김대건 신부님이 떠오르는 9월 순교자 성월이다. 예수님 삶의 모토는 한마디로 ‘하느님 나라.’ 예수님처럼 순교자들은 모든 시선을 아버지의 나라에 맞추고 그분의 뜻을 구하였기에, 자신의 모든 것인 생명마저 하느님을 위해 낭비(25주 묵상참조) 할 수 있었다. 9월의 복음들은 가장 아름다운 비유들로 우리 모두를 하느님 나라로 초대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늘나라를 희망하며, ‘이미’ 그분의 나라를 살아 갈 수 있을 것인가?
9월 2일 연중 제22주일 : 루카 14,1.7-14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8절)
새내기 신부시절, 첫 혼인미사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신랑, 신부보다 더 떨리는 마음으로 첫 주례를 한 후, 사진촬영시간. “신부님, 고개 좀 숙여주세요.” 사진기사의 요청에 나는 고개를 좀 숙였다. “아니, 조금 더 왼쪽으로….”
몇 번의 교정 후에야 깨달았다. 사진기사는 신부(神父)인 내가 아니라 새 신부(新婦)를 더 예쁘게 찍으려 한다는 사실을. 혼인성사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 나는 ‘초대받은 증인’임을 잊었던 것이다. 이후 사진을 찍을 때는 일부러 신랑보다 못나오길 바라며 나만의 포즈를 취했던 일, 미소를 짓게 한다.
초대받기도 하고, 초대하기도 하는 우리. ‘초대 받은 이들’에 대한 첫 비유는 혼인잔치에 대한 것이다. 혼인잔치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일진대, 아무리 윗자리에 앉은들 그들보다 더 높아질 수는 없으리라. 비유 안에서 자리를 정하는 전권은 ‘초대한 이’에게 달려 있다. 그의 말에 의해 초대받은 이는 ‘부끄러움’을 당할 수도, ‘영광스럽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초대한 이’가 좋아하는 이는 무엇보다 ‘낮은 자리에 앉는 이’, 즉 ‘자신을 낮추는 이’이다. 보통 혼인잔치에 초대하는 이는 신랑(과 신부)이라 할 때, ‘초대한 이’와 ‘신랑’은 하나가 되고 (혼인잔치에 대한 예수님의 다른 말씀들에 비추어) ‘혼인잔치’는 ‘하늘나라의 잔치’로 확대된다. 결국 하늘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은 우리의 내적인 기본 덕목은 ‘겸손’ 내지 ‘자기 낮춤’이어야 한다.
‘초대한 이’에게 하시는 두 번째 말씀. 한마디로 ‘되돌려 받을 생각 없이 초대하는 이는 행복하다’이다. ‘초대하는 이’의 전권을 ‘되돌아 올’ 초대나 그 어떤 이익에 상관없이 ‘가난한 이들’에게 쓰라는 말씀이다. 모든 이를 ‘하늘나라’에 초대할 선교사명을 지닌 우리 자신과 교회가 곱씹고 또 곱씹어 보아야 할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의 ‘이웃사랑이 선교의 목적이나 개종 등 그 어떤 (되돌아 올) 다른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첫 회칙은 단연 복음의 숙고라 할 수 있다.(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1항 참조)
“초대 받았을 때는 낮은 자리로, 초대할 때는 가난한 이를 먼저!” 이미 하늘나라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이르시는 예수님의 초대법 강의이다. 그리고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인간의 삶에 초대되신(肉化)’ 그분은 죽음으로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시고(필리 2,6-11 참조), 근본이 가난한 영혼인 모든 인간을 하나도 빠짐없이 당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셨다.
주님, 겸손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닌 시대, 나의 이익이 아니고서는 좀체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저희들이옵니다. 하늘나라를 미리 맛보는 미사성제에서조차 소위 ‘없는 이들’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합니다. ‘초대한 주인’은 그들을 원하는데, 초대받은 우리들은 ‘주인 없이’ ‘주인마저 내몰고’우리들만의 잔치를 하는 것은 아닌지요.
똑같이 초대받은 이들로서, 당신의 아들딸로서 동등한 존엄을 가진 저희 모두가 ‘당신의 잔치에서’ 아무도 내치지 않게 하소서.
9월 9일 연중 제23주일 : 루카 14, 25 - 33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 따르기’, 그분의 ‘제자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결코 만만한 산책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말씀이다. 한마디로 그분 제자 됨의 조건은 ‘모든 것 버리기’, ‘제 십자가 지기’로 요약된다. 이는 다른 복음들(마태 10,37-38;16,24; 마르 8,34)에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는데, 오늘 루카복음만의 독특한 표현이 눈에 띈다. “제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26절) 목숨이란 자신의 모든 것,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 그것마저 미워하라는 말씀이다. 사실 ‘~하지 않으면’이라는 구절을 볼 때, ‘제 목숨까지 미워하기’는 ‘제 십자가 지기’와 ‘모든 것 버리기’와 동일한 무게를 지니는 표현으로 여겨진다.
이어서 나오는 ‘탑 세우기’와 ‘전쟁’의 비유는 그분을 감히 따르겠다고 자청한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시작은 했는데 도무지 완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만 명’이라는 숫자로 표현되는 내가 가진 ‘부족함’을 돌아보지도 않고(‘헤아려 보지 않고’) ‘적들’에게 달려드는 우매한 우리들 말이다.
짧지만 그분을 온전히 따르겠다고 나선 사제의 길. 한때는 감히 0.01%의 선택된 자(약4천 만 국민 나누기 약4천 명 한국사제)라 자부하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보이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존재가 되지 못하는 듯한 ‘스스로의 무능’ 뿐. 미워하지 않을래야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의 꼬라지들. ‘2만 명’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이 시대의 ‘적들’은 사제를 더 이상 온실 속에서 곱게 하느님만을 부르며 살도록 결코 내버려 두지 않고…. 비단 이는 사제들뿐 아니라, 믿기 시작한 우리 모두의 솔직한 처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참으로 다행인 것은, 이러한 우리를 바라보시며 그분은 “그러니까 내 제자 될 생각일랑 꿈에도 생각하지 말아라, 그만 포기하라.”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오히려 끊임없이 ‘나를 따르라!’ 하셨다. 도대체 왜?
그 답은 예수님 전체의 삶과 복음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예수님 자신도 마찬가지셨다. 철저히 무능하셨다. 죽음 앞에, 세상의 권력과 도전들 앞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분만의 새로운 싸움법이셨고, 인간을 향한 새로운 신의 사랑법이셨다. 하지만 그분에게 ‘적당한 타협’이란 없었다. 죽음마저 두려워 않고, 끊임없이 ‘아버지의 시선’만을 바라보고 ‘아버지의 뜻과 나라’를 구한 그분처럼, 우리역시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분의 뜻과 나라를 희망하는 수밖에. 비록 지금 세상에 무능하고 얻어터진다 해도,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그분은 우리 역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 믿으며….
“Solo Dios basta! (오직 하느님 한분이면 족합니다.)” - 아빌라의 데레사 -
주님, 이렇게 묵상을 하고 나서도 왠지 허전합니다. 그것은 무능함을 너무나 잘 알아서인지, 아무도 세상과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 듯한 우리 사회, 우리 교회, 우리 자신의 모습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얻어터지는 것이 두려워 바짝 웅크리며 사는 듯한 저희 모습을 굽어보시고,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철저히 더욱 자신과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를 미워하며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바로 나부터.
9월 16일 연중 제24주일 : 루카 15,1-32 또는 15,1-10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1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저 사람은 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가?”하며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들려주신다. (일단 ‘죄인들’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스스로 윤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그들은 그 판단을 ‘음식나누기’라는 지극히 인간사적인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음식나누기를 ‘하늘나라’의 문제와 기쁨(7절, 10절, 21절 참조)으로 승화시켜 말씀하신다.
이미 죄인들과 하는 당신의 식사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의 식사와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신다 할 수 있고, 그것은 최후만찬의 식사(성체성사)로 남겨져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한 말씀으로 여겨진다. ‘저런 인간도 미사에 오고 성체를 모시네?’ 가끔 속으로 질문하는 ‘나에게’ 들려주시는 아름다운 비유들이다.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그분의 모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오늘 비유들은 한마디로 “하느님은 찾아나서는 분”이심을 명확히 드러낸다 하겠다. 찾아다니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는 창세기, 첫 성경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3,9) 부르시며 먼저 찾아 나서시는 분이 바로 그분이시며, 오히려 죄를 지은 인간이 피하고 도망가고 핑계를 댄다.(3,10-13)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광야에 놔둔 채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어떤 사람’, 은전 한 닢을 찾으려고 온 집안을 뒤지는 ‘어떤 부인’, 돌아온 작은 아들을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24절, 32절)고 단언하는 아버지, 모두 ‘먼저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낸다 하겠다. 나아가 여기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계산법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세상의 기준으로는 한 마리와 은전 한 닢의 가치가 나머지 아흔아홉마리와 아홉닢의 가치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능하다. 더 ‘기뻐할 수 있는’, 더 큰 가치의 가능태가 될 수 있다. 세 비유를 종합해본다면, 그것은 ‘회개하는 죄인’(7절, 10절, 21절)이라는 공통 분모를 충족했을 때이다. 이는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는 모든 이에게 전해 주는 복음 중의 복음이다. 그분의 찾음에 응답하기만 하면, 그분께 스스로 되돌아오기만 하면 ‘죄인’인 나는 그분의 나라에서 최고 기쁨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주님, 저희 주변의 탓 없이 죽는 이들, 탓 없이 불치병에 걸린 이들을 바라볼 때, 과연 당신은 어디에 계시나 반문하게 됩니다. 당신께서는 언제나 찾아 나서시는 분, ‘죄인’인 제게도 늘 찾아오시는 분이라 믿으며, 저희 또한 누군가에게 당신의 모습으로 ‘찾아가는 이’ 되게 하소서.
9월 23일 연중 제25주일 : 루카 16,1-13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복잡한 퍼즐과 같은 비유이다. ‘하느님께 대한 섬김’(13절), 즉 하늘나라(‘영원한 거처’-9절)와 하늘나라 재산의 사용(‘큰 일’-10절, ‘참된 것’-11절)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결코 쉬이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라 할 수 있다.
비유의 서두.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 주 임무인 집사가 잘릴 위기에 처했다. 이유는 집사가 ‘재산을 낭비’하였다는 소문 때문이다. 집사가 어떻게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였는지 비유에서는 밝혀지지 않는다. 즉 주인의 돈을 횡령했는지, 사업에 큰 손해를 끼쳤는지 등등 어떤 모양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또한 그것은 소문에 의한 정보인데, 주인이 그 소문의 진위를 판단하는 발언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진위 여부는 집사에게 미루어지는 듯하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비유의 마지막.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8절) 비유의 중간에 ‘빚 탕감’이라는 궁여지책으로 살아나고자 하는 집사, 즉 주인의 재산을 마음대로 다룬 집사에게 주인은 오히려 칭찬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빚 탕감’이라는 집사의 행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다. 주인의 금고에 직접 손을 대 돈을 빼돌린 것도 아니고, 땅문서를 팔아먹은 것도 아니다. 빚은 ‘아직’ 온전히 주인의 재산이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미’ 주인의 재산이다. 이 빚을 탕감해 주었다는 것은, 분명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 세상의 거래에서 보면, ‘빚을 없앤다.’는 행위는 분명히 재산낭비에 속한다. 하지만 주인의 칭찬 선언을 보면, 집사의 ‘빚 탕감’ 행위는 더 이상 ‘재산 낭비’가 아니다.
낭비인데 낭비가 아니다! ‘영원한 거처’(9절), 하늘나라를 위한 ‘빛의 자녀들’의 재산 사용법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 자기 것이 아닌 ‘주인 재산의 사용법’이다. 사랑과 용서, 은총 등의 가치를 하늘나라 주인의 재산이라 한다면, 그것의 ‘무한한 낭비’는 더 이상 낭비가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쉬이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빛의 자녀들’에게는 세상의 재물마저도 ‘영원한 집’을 위해서는 낭비가 아니어야 한다.(9절 참조) 세상의 재물마저 하느님의 것으로 여기는 이에게는 하느님만이 모두이다.(13절 참조)
(비유를 처음 읽고 묵상 하는 내내 분심이 들었다. 집사와 빚진 이들의 모습이 자꾸 고해소에 앉아 고해를 듣는 사제, 고해를 하는 신자와 오버랩 되어서이다. 용서하는 일이, 용서받는 일이 하느님의 것을 다루는 최고의 자리가 아닐까 하며….)
주님, 무덤 속에까지 재물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의 노예가 되어 자유롭지 못한 저희들이옵니다. 과연 그것은 오직 당신과 당신의 나라를 위한 ‘낭비’가 되어야 함을 잊지 말게 하소서. 또한 저희가 당신의 것인 사랑과 용서를 나누는데 (낭비하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9월 30일 연중 제26주일 : 루카 16,19 - 31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늘나라(천당)는 누구의 것이 될 것인가? 왜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아야 하고’, 거지 라자로는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는가?
복음 이야기가 들려주는 이승에서의 정보로는 그 이유를 찾기가 힘들다. 단지 익명의 부자는 이 세상에서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라자로라는 이름의 거지는 ‘개들까지 와서 핥는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겨우 연명했다’는 것. 부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는 것(25절), 그것이 다이다.
거지가 부자의 대문간에 있었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은 그렇게 상상한다. 분명 부자이니까, 자기만 알고 거지를 도와줄 생각도 안하고 살았으리라…. 그러니까 천당에 들어가려면 불쌍한 이들을 많이 도와야 한다?!
정말 그게 다인가? 그렇다면 부자는 이렇게 하소연 할지도 모른다. 매일매일을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처럼….
“하느님, 억울합니다. 왜 제가 지금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거지 라자로요? 물론 크게 도와준 적도 없지만, 그를 그리 못살게 군적도 없었답니다. 그렇게 지저분하고 더러운 놈을 제 집 문간에 살도록 하게 놔둔 것만 해도 상당한 배려였다는 사실을 잘 아실 텐데요. 그리고 저의 신조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였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아무와도 싸우지 않으려 노력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일했고, 벌었고, 그 무엇보다 ‘제 가족’을 위한 저의 희생과 노력을 잘 아실 텐데요. 회당에도 안식일마다 꼭꼭 나가서 당신께 염소도 바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뭡니까? 참 그것도 있군요. 라자로가 이승에 있을 때, 고통을 많이 받고 비참하게 살았다구요? 그래서 천당에서 복을 누려야 한다구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전 너무나 섭섭합니다. 저도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돈이 다가 아님을 잘 아실 텐데요. 제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하소연을 상상해보면, 어느덧 복음 이야기의 주인공은 거지 라자로가 아니라, 부자가 된다. 나도 역시 부자에 게 더 가까워진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부자가 소위 고통 받는 지옥과 같은 곳에 떨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답을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인가? 엘리야도 모세도 솔로몬도 아니고 왜 ‘아브라함’이 등장하는가?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서 경고해 달라는 부자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명확히 대답한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는다면’, 또 들어서 ‘믿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성경의 말씀을 듣지도 믿지도 않는다면, 죽은 이가 살아나서 얘기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바로 우리의 답은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것이다. ‘믿음’만이 하늘나라를 차지할 답이다. ‘진정한 믿음’으로 사는 이에게 ‘사랑’과 ‘희망’의 삶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고, 그에겐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닐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왜 거지에겐 라자로라는 이름이 주어지는지.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도우신다!(Gott hilft)’는 뜻. 바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믿는’ 모든 이는 라자로라 할 수 있다.
누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인가? 바로 ‘우리의 믿음’과 ‘하느님의 도우심’만이 하늘나라를 차지할 필요충분조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할 일은 그분의 도우심에 의지하며 철저히 ‘나의 믿음’을 점검해 보는 수밖에. 나의 화려한 옷도, 나의 비참한 꼴도 바라보기 이전에 말이다.
주님, 도대체 저희에게 어떤 믿음을 원하시는지요?

* 허광철(요셉) 신부 독일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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