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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박순자

10월 7일 연중 제27주일 : 루카 17, 5-10 믿음의 힘, 종의 처지 비유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 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5절에서 6절까지의 이야기는 그 뒤에 이어지는 종의 처지 비유 이야기(7-10절)와 그리고 여기에 이어지는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11-19절)를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야기들은 17장 1절에서부터 같은 주제의 맥락 안에 있으며, 5-19절은 이 주제 안에서 실시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하나의 수업, 곧 도입(5-6)-강의(7-10)-실습(11-19)으로 이루어진 수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의 처지 비유는 5-6절에서 얘기되는 주제에 대한 구체적 사례가 되며, 나병환자와 관련된 후속 이야기는 종의 처지 이야기를 위한 예수님의 모범적 실천 이야기가 됩니다. 곧 이것들은 모두 제자들이 따라야 하는 예수님의 말과 실천적 가르침입니다.

 

큰 것과 작은 것의 대비 : 더하여지는 믿음 / 겨자씨만한 믿음 // 겨자씨 / 돌무화과나무
5-6절에서 ‘믿음을 더 가지기’를 원하는 제자들의 요구와 ‘겨자씨만한 믿음의 효력 또는 충분성을 강조하시며, 그에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교해보면, 그 안에서 큰 것과 작은 것의 대비를 볼 수 있습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갖고 있으면” /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말하자면 한편으론 <(제자들이 원하는) 더 큰 또는 더 많은 믿음(큰 것) /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겨자씨만한 믿음(작은 것)>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겨자씨 한 알(작은 것) / 돌무화과나무 전체(큰 것)>로 비교되는 큰 것과 작은 것의 대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효력이 발생하는 것은 제자들이 생각했을 수도 있는 ‘더하여진 믿음’, 곧 더 가진 또는 더 많아진 믿음이 아니라 <겨자씨만한 믿음>입니다. 그 겨자씨만한 믿음이 겨자씨보다 엄청나게 큰 돌무화과나무를 가지하나 부러트리는 정도가 아니라 통째로 뽑혀져서 바다에 심겨지는 효력을 발생합니다. 불가사이한 일이며 불가능한 일입니다.(사람이 직접 나무를 뽑아 그것을 땅에 심는 것도 힘든 일인데, 바다에 심기란 심히 어려울 것이다). 믿음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인 것, 믿음은 스스로 발아하는 씨앗 같은 것이라는 얘기입니다.(겨자씨는 스스로 발아하여 많은 열매를 맺고 또 다른 많은 씨앗들을 잉태한다). 이것이 진짜 작은 자의 모습이기도 할 것입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그런데 후속으로 얘기되는 종의 처지 비유와 연결하여 볼 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고 없고 보다 제자들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것은 이미 내가 무엇을 가졌습네, 하는 태도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매정하게 ‘너희가 무슨 믿음이 있어?’ 라는 식의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제자들이 정말 믿음이 없었을까요? 참으로 무안하게 하는 말씀이 아닌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갖고 있다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저희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내세우는 태도 같을 것을 엿보게 합니다. 이 태도는 뒤의 종의 이야기에서 종의 태도와 관련해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또 내 것으로 더 갖고 싶은 마음, 그래서 더 괜찮은 자이고 싶은 마음. 이것은 무엇인가 자기의 것에 의존하려는 태도, 자신이 수고한 모든 일(모든 공로)에 의존하려는 태도, 내가 무엇인가 했다는 자부심. 자신의 것 자신의 수고의 공로를 인정받고자하는 태도와 일맥상통할 것입니다. 이 태도에 대해서 다음의 종의 처지 이야기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져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에게 복종할 것이다.>>
작은 것의 힘 또는 효력이 얘기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에 돌무화과나무 전체의 복종입니다. 곧, 큰 것이 작은 것에 대한 복종입니다. 힘이 있는 것이 큰 것이라는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작은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이야기가 작은 것과 관계되는 이야기를 준비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이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작은 자로서의 진정한 종의 태도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7-10절(종의 처지 이야기)
(앞뒤 이야기들의 맥락에서, 새 성경의 ‘겸손하게 섬겨라’는 제목보다 정양모 역주의 200주년 신약성서 낱권에서 제목으로 붙인 ‘종의 처지 이야기의 비유’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됨.)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우리는 주인이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악덕 지주인가? 그러나 이야기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주인의 태도에 초점을 두지 않고 종의 태도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이야기는 종의 처지를 일깨우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래서 심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주인의 태도는 종의 처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묘사된 것일 뿐이다. 하느님을 거기에 바로 비교해서 무서운 혹독한 하느님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들일을 하고나서도 식사 시중을 드는 종, 수고가 많습니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부당 노동, 과중한 업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수당과 인정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런데도 자기의 수고의 대가를 기대하거나 칭찬받는 일조차도 기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현재 우리의 사고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주인의 요구요, 종의 처지입니다. 심한 노동을 시키고도 제대로 보수를 주지 않는 악덕 경영주들을 정당화시킬 위험이 있는 이러한 이야기를 예수님이 왜 얘기하실까요? 이러한 질문을 하게 하는 것이 이 이야기가 노리는 점일 것입니다. 새 성경의 제목처럼 단순히 겸손하게 섬기라는 문제일까요? 텍스트를 전후 이야기들의 맥락 안에서 읽어봐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 전편에서 계속 작은 것, 작은 자가 주제로 얘기되고 있습니다.(17장 1-3절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자,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했다. 그런데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져서 이르는 곳이 어디일까? 바다 밑 가장 낮은 곳이다. 결국 작은 자 위에서 군림하는 높은 자는 낮아짐으로서만이 남도 자기도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형제가 너에게 … 죄를 짓고 …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주어야 한다.”(17, 4)
용서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자칫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자의 위치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을 좀더 해보면 용서한다는 것은 내가 작은 자, 곧 잘못한 사람과 같거나 오히려 더 낮은 위치로 가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역설인 것 같지만 잘 생각해 보시라. 그 다음, 사도들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이야기. 앞뒤 이야기들의 맥락 안에서 읽을 때, 여기서도 제자들의 무언가 - 그것이 믿음일지라도 - 를 갖고 있습네 하는 태도, 그것은 작은 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요컨대 이야기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얘기하고 있지만, 한마디로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종의 이야기는 그 어느 것으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 자기의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 그 일의 공로로부터 스스로 사라지는 것, 많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 것(‘쓸모없는 종입니다.’), 그것이 비록 믿음일지라도 내 것처럼 여기지 않는 것(5-6절까지의 이야기가 이렇게 연결된다.), 수고의 대가를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는 것(‘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10절)
완전히 자신을 낮추는 것, 완전히 자신은 사라지는 것, 그것이 종의 위치, 종의 처지입니다. 철저히 작은 자가 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의 처지며, 위치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세임을 오늘날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 대한 예수님의 모범적 실천이 다음 주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시는 이야기>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10월 14일 연중 제28주일 : 루카 17, 11-19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시다.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 말하였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지난주 복음 독서에서 얘기했듯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한 수업의 서론 격인 지난 주 복음 이야기의 본 강의처럼 연결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텍스트가 이쪽도 저 쪽도 아닌, 곧 어떠한 경계 안에 국한되지 않는 중간 지대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곳, 곧, 예수님이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나게 되는 곳)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다.”(11절)


둘째, 예수님과 열한 나병환자 사이 (거리를 두고 나환자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오감) :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12-14절)
나병환자들은 멀찍이 서서 청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시지 않고 그냥 거기서 소리치는 그들을 보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치유의 말이나 행동이 없다. 예를 들면, ‘내가 너를 깨끗이 하겠다.’ 또는 ‘그의 몸에 손을 대시고’ 등. 다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라고만 하신다. 그들의 대화는 거리를 두고 오간다.


셋째, 예수님과 제관들 사이 (병이 나은 공간) :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14절) 병이 나은 것은 예수님 앞에서도, 제관들 앞에서도 아닌 그 사이(중간)의 지점이다. 텍스트는 왜 이런 ‘사이(중간 지대)’를 계속 마련하는 걸까?(이 ‘사이’ - 중간 지대-의 자리에 치유자의 자리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경계 밖의 이 ‘사이’에 구원의 자리가 있음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제 삼의 존재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시고 치유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신다. 왜?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신가?)
자세한 치유 이야기로 들어가서, 먼저, 치유된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살펴볼까요?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15-16절) /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18절)
그런데 이 사람의 태도가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먼저,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그들이 예수님께 간청했으니까)을 찬양하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것도 예수 스승님에게 간청할 때처럼 큰 소리로 (큰 소리로가 두 번 나온다. : “그들은 멀찍이 서서 큰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13절 ;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15절) 그리고는 예수님께는 와서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발치에 엎드리는 자세는 낮은 자 작은 자의 자세임에 유의하자.)
이 치유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을 하느님과 예수님을 연결해서 해석하는 행위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을 포함한 열 명의 나환자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예수님, 스승님’이라 부릅니다. 그 다음 이 사람에 의해서 달리 불리는 예수님에 대한 발전된 호칭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스승님이 자신의 병 나음과 관련하여, 하느님과 연결된 어떤 분임을 행동으로 인정합니다. :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16절)
그런데 “…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사람이 돌아온 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먼저 텍스트에 의하면, 그는 사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영광을 드리며 (찬양하며와 같은 말) 돌아와서 예수님께 다만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 스스로 하느님임을 암시? 우리는 거기서 확실한 답을 찾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 말씀은 다음에 오는 예수님의 “일어나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는 확언과 함께, 치유된 사마리아인 나병환자의 해석을 확고히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정체가 스승 이상의 것, 하느님과 관련된 어떤 분이라는 것이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 치유자의 자리에서 물러나시며 그 분에게 그 자리를 내놓으십니다.
그러면 이제 나병환자에게는 구체적으로 그리고 진실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살펴봅시다. 텍스트가 얘기하는 대로의 그와 관련되는 변화의 행보를 살펴보면 ‘나병환자’ 쭭 병이 나음 쭭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쭭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로 요약될 것입니다.
이야기의 처음에서 그는 ‘나병환자’로 호칭됩니다. 말하자면 그는 나병에 걸려있을 때의 사회적 신분은 그냥 인간도 아닌 ‘나병환자’였을 뿐입니다.(처음의 호칭) 그런데 치유되자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사회적 그의 신분이 회복됩니다. 그는 더 이상 ‘나병환자’가 아닌 ‘사마리아 사람’으로 불리니까요.(치유된 후의 그의 호칭) 그 다음 불리는 호칭은 없으나,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된 자로 인정받습니다.(“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나병환자는 육체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구원을 얻었습니다.
나병이 육체적으로 더러운 자, 그래서 소외된 자라면, 사마리아인들이란 유다인들에게는 종교적으로 더러워진 자, 깨끗하지 못한 자, 하느님의 구원으로부터 제외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인에게 구원 받았음을 선언합니다. 그것도, 그 사람의 믿음이 그를 구원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를 구원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조차 예수님은 그 사람의 믿음 뒤로 사라지십니다. 여기서 왜 하필 사마리아 인이 거론되었을까요? 이것은 구원이란, 유다인들이 생각하듯이 어느 특정 백성, 곧 유다인에게만 베풀어지는 특혜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또 사마리아인이니 갈릴래아인이니 하는 지리적 차원 또는 유다인이니 이방인이니 하는 사회적 종교적 차원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다만 믿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텍스트는 벌써 이야기 시작에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시는 예수님을 통해, 이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곧 구원은 인간 사회적 모든 경계 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모든 인위적 경계를 초월한다는 얘기겠지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예수님의 숨기, 곧 낮추기일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도 예수님은 ‘내가 … 한다.’ 또는 ‘내가 … 했네.’ 하고 스스로를 드러내시거나 나서시는 모습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늘 내어드리십니다.(위에서 중간지대인 ‘사이’와 관련하여 하느님께 자리를 내드리는 예수님을 보았다.) 그리고 감사하러 온 수혜자 앞에서도 그분은 당신을 감추시고, ‘너의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하십니다.
철저한 자기 감춤, 자기 낮춤입니다. 이는 바로 이전 이야기 마지막에서 한 말씀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17,10) 라고 말하는 <종의 태도>입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작은 자의 태도, (하느님) 종의 태도를 실천으로 보여주시는 실천적 가르침이지요.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제자들 앞에서 하신, 당신 수업의 실습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실습할 차례입니다.

 

 

 

10월 21일 연중 제29주일 : 마태 28,16-20 또는 루카 18, 1-8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서두에 이 이야기의 목적이 용기를 잃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이라고 밝혔으니, 그래 열심히 기도합시다. 이렇게만 읽어버린다면, 더 이상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데 이야기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야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자세히 읽어봐야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서두에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서두에 기도라는 이 단어가 한번 언급된 이후, 이야기 끝까지 더 이상 한 번도 이 단어가 거론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러한 뜻으로 하신 비유 이야기라면, 이야기 마무리가 ‘그러니 너희는 이 여인처럼 귀찮도록 끈기 있게 기도하여야 한다.’라는 식으로 끝나야 이야기의 논리가 맞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야기 끝의 예수님 말씀은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을까?>>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좀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용기를 잃지 말고 기도하라는 얘기일까? 이 기도와 믿음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기도에 대한 믿음일까? 믿음을 위한 기도일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무슨 믿음을 찾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이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과 관련하여,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한 앞의 비유 이야기(17, 22-37)와 연계해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야기 속으로 좀더 들어가 살펴봅시다.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의 끝에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이 어떻게 했는지 또는 이 재판관이 어떻게 했는지 등의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텍스트에서는 재판관이 여인을 위해 판결을 내려주었다는 얘기는 없음), 재판관의 말이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재판관은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5절)라고 혼자서 말합니다.
하느님도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그 책임자인, 정의를 세우는 일도 아랑곳 않는 이 재판관이 여인을 위해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이유는 여인의 끈질김에 감동했기 때문도 아니고, 하느님이 두려웠던 것도 아닙니다.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을 두려워해서입니다. 곧 오직 자신의 신상에 해가 있을까 두려워서입니다. 따라서 이 여인의 요구를 끝가지 들어주지 않을 경우, 결국 이 여인의 끈질긴 요구의 끝이 재판관 자신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날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 5절의 ‘귀찮게 하니’ 라고 번역된 단어는 ‘눈 밑을 치다’ 또는 ‘눈을 멍들게 하다’로 직역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는 자신에게 가해질 폭력이 두려운 것입니다.(우리는 개인이나 단체의 정당한 권리에 대한 말로써 거듭되는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 경우, 결국엔 폭력으로 사태가 악화되는 결말을 거의 매일 본다.) 그러니 그러한 극한적인 한계의 상황에 부딪치기 전에 들어주는 것이 자기 신상에 좋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곧 재판관의 말의 핵심은 여인의 항구한 기도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그 요구를 무한정 모른 체 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말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하고 졸랐다.>>라는 이 여인의 말은 사실, 기도 또는 간청이라기보다 자신의 당연한 권리에 대한 요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근본적으로 얘기되는 것은 한계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의한 상태가 지속될 수 있는 한계 상황. 불의가 한계에 이른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불의가 무너지고 정의가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우리의 역사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재판관이 처하고 있는 상황이 바로 이 한계 상황입니다. 그는 이 상황을 해결해 줘야 할 의무가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느님도 인간도 개의치 않으며, 정의를 세워야 하는 자신의 책임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불의의 상황에 있는 한 여인이 정의를 부르짖는데도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가 이러한 재판관의 이미지인 것입니다. 불의로 인해 사람들이 외쳐보지만 정의가 올 것 같지 않는 상황. 불의의 상황에 빠진 하느님의 선택된 이들이 외쳐보지만 하느님은 무심하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선택된 이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으로 우리가 이 선택된 이들을 알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이 밤낮으로 외치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이 부르짖는 한, 하느님은 책임자요 세상을 위한 심판관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들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분은 도대체 무얼 하시는지? 우리를 듣기나 하시는지? 자꾸만 연기하고 계신다.’ 고 생각하면서 부르짖을 것입니다. 이것이 외치는 이들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머뭇거리지 않고, 재빨리 정의를 펴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결국 이 말은 돌려 말하면 <불의는 정의를 부르게 되어 있으며, 불의는 반드시 한계가 있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의한 재판관이 한 말에서 의미하는 근본적인 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때는 신속히 하십니다.(참조. 17, 24-32 :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것은 불의가 충만하여 그 한계선에 이르렀을 때, 불가피하게 오게 될 정의구현에 대한 믿음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불의와 정의 간의 필연적인 이 관계에 대한 확신입니다. 고집스런 믿음. 불의가 계속되는 것을 인정하는 고집불통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도입 부분이 연결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의 필요성. 이러한 믿음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기도가 부족할 때, 우리는 초조하게 되고 우왕좌왕 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17, 23) 그러니 이 말씀은 곧 <그것은 번개처럼 온다. 그러니 알려고 애쓰지 말라. 너희는 그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끊임없이 기도하는 일이다.>라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망하지 않고 하는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하며, 이러한 믿음이 용기를 잃지 않는 계속적인 기도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기도와 이 믿음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나기 기도가 아니라, 일상의 기도, 밤낮으로 쉼 없이 하는 일상속의 기도만이 정의의 날,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고 지탱해 줄 것입니다.

 

 

 

10월 28일 연중 제30주일 : 루카 18, 9-14 :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9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선택받은 이의 부르짖음과 즉시 실현되는 정의와 관련하여, 앞의 비유 이야기(지난주 복음)와 짝을 이룹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선택받은 이의 부르짖음과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신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에서 그것이 증명됩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세리는 자타가 인정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그의 행동은 선택받은 이의 울부짖음이 됩니다.(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고개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즉시,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의로운 자로 응답 받습니다.(“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14절)
말하자면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해 고개도 못 들던 그가 선택된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 이야기는 앞의 비유 이야기와 짝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곧 앞에서 한 예수님의 이야기의 한 예가 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 믿으며 하느님 앞에서 꼿꼿이 서서, 꼿꼿이 선 자세만큼이나 다른 사람을 폄하하여 죄인이라 판단하며 자신을 스스로 치켜세우는 오만한 자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죄인이라 믿으며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향해 고개 들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이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의로운 이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는 후자입니다. 전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정의 구현이 오직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실현되며, 바로 기도와 관련해서 실행되는 정의가 있습니다. 기도의 시간이 이미 정의가 구현되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 문제나 인간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정의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정의로운 자로 인정받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에 의해 정의로운 자로 인정받는 정의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확신한다면 더 이상 우리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웃을 판단하고 낮추어 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판단에 따라 설왕설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이웃의 판단에 따라 울고 웃는 의존체인지요? 사람의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만 의존할 때, 우리는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주체성을 지닌 주체적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판단에만 의존할 때만이 진정한 정신적 홀로서기가 가능하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높아지며,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제 비유의 끝에 하시는 예수님 말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높아지며,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와 관련해서 볼 때, 결국 하느님께로부터 정의로운 자로 인정받은 이는 작은 자입니다. 앞의 이야기들에서 작은 자의 예들이 나왔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세리의 행동은 작은 자의 또 한 예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길, 그것은 작은 자의 길임을 끊임없이 마음에 새기는 것, 그것 또한 기도가 아닐런지요?(3주와 4주 독서는 Jean Delorme 신부님의 강의를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 박순자(세실리아·형곡성당)
<성서기호학> 전공, 성경의 기적사화 분석으로 언어과학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리용 가톨릭대학교의 종교 담화 분석 연구소와 리용 2대학교에서 연구, 프랑스에서 학위 취득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