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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판형


이경수(라파엘)|용성성당 주임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몇 해 전 성전건립을 마감하며, 건립기금에 보탬이 될까 해서 달력사업을 한 적이 있었다. 마침 동기신부의 첫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새 성전에 설치된 터라, 그 유리화를 아이템으로 해서 달력을 제작하기로 하였다. 주요 교구행사일정도 우리 달력에 게재하기로 하고, 교구달력은 따로 제작하지 않는 것으로 협의하여 기본적 판로도 확보하였다.

작가인 동기신부, 출판디자인 책임자와 같이 자리하여 제작과 관련된 의견들을 모아 갔다. 서로의 미적 감각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달력과는 차별되는 ‘명품’달력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우선 판형을 달리하기로 하였다. 게재할 작품을 더욱 품위 있게 드러낼 감각적 변화였고, 천편일률적인 사이즈에 변화를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자면 광고를 게재할 지면이 조금 축소되는 듯 했지만, 다양한 디자인과 글씨체 등 출판 기술들을 동원하면 극복되어질 것으로 판단하였다. 바탕색은 검은 색으로 하기로 하였다. 화려한 유리화를 두드러지게 받쳐주는 데는 그것이 어울릴 듯했다. 또한 기존의 달력에서 시도하지 않은 인쇄술을 동원하자니 제작비가 약간 상승될 듯 했으나, 일 년 동안 집안 벽면을 장식할 ‘명품’이 아니던가. 이런 몇 가지 변화만으로도 달력의 모습을 전혀 새롭게 바꿀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다. 

견본을 만들어 각 본당과 기관으로 배부하고 전화로 주문을 독려하였다. 반응이 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새 성전건립을 위한 달력 사업의 취지에는 적극 공감하는데, 다만 판형을 원상복귀 시켜달라는 주문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광고지면이 축소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 어떤 데서는 일 년 동안 집안에 걸어둘 달력이 검은색이면 너무 어둡지 않겠느냐는 지적과 함께, 꼭 흰색으로 바탕을 바꾸어 달라고 하였다. 가장 결정적인 난관은 가격이었다. 차라리 고급 인쇄술을 포기하더라도, 조금이라도 가격을 올려서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완강한 소비자들의 의견을 하나씩 반영하다보니 원래 우리가 변화시켜 보려던 것은 하나도 제대로 남아있지 못하고 그대로 원상복귀 되고 말았다. 높은 벽을 실감하며 다시 조정하여 최종본을 제작하고 판매하게 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루어져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바탕이 있는 것이었고, 그것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였다. 달력 하나 바꾸는 것도 이리 어려운데, 내 삶을 바꾸는 것이야 두말 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삶과 죽음을 묵상하는 위령의 달에 떠오르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