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연중 제31주일 : 루카 19,1-10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문맥>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은 세 번째 수난 예고(루카 18,31-34)와 예리코 근처 소경의 치유(18,35-43)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지리적으로는 예루살렘 입성 바로 직전이다. 시기적으로는 파스카 축제 며칠 전으로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
<구조와 묵상>
발단 : 예수님의 출현과 자캐오의 호기심(19,1-3)>
예수님께서 예리코의 거리를 걷고 계신(19,1) 그 곳에 부자 세관장 자캐오가 산다.(19,2) 자캐오는 예리코 근처에서 최근 소경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궁금하고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마침 자기 동네를 지나시므로 그분을 보러 길거리로 나갔으나 군중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자신은 키가 작아서 그분을 직접 볼 수가 없었다.(19,3)
묵상 : 돈은 많지만,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자캐오는 키도 작아 개인적 열등감과 사회적 소외감의 상처를 갖고 산다. 열심히 번 돈이 인생의 안전장치나 부분적 위로는 되었으나, 인생의 기쁨이나 의미를 깨닫는 데는 도움이 안 되었다. 인격적 기쁨의 완성에 접근하기는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근본이 불안한 그는 외롭고 우울했다. 그런 만큼 ‘소문의 그 예수님’을 만나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예감하고 있었다.
전개 :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19,4-6)
그래서 자캐오는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서, 예수님 가시는 길의 방향을 앞질러 달려가서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간다.(19,4) 예수님께서 거기를 지나시다가 위를 쳐다보시며 자캐오와 눈을 마주치신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캐오’의 이름을 아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름을 부르신다. ‘오늘을 네 집에 머무르겠으니, 얼른 내려오라.’는 말씀까지 하신다.(19,5)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19,6)
묵상 : ‘도대체 소문난 저 사람은 어떤 분일까?’ 마음이 외로운 사람의 주변은 주로 우울하거나 어둡고 차갑다. 그들의 손과 발은 차갑기도 하다. 움츠린 병든 자아로부터 떨쳐나오며, 돌무화과 나무에 오르는 자캐오의 모습은 마치 성장을 위해 용기를 내어 위로 도약하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런 사람에게는 남들의 시선과 평가가 두렵지 않다. 그러나 그는 역시 혼자다. 스스로 자신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던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자캐오를 예수님께서 직접 바라봐주시고, 이름까지 불러 주시고, 먼저 말을 건네주시고, 게다가 그의 집에 머물러 주신단다. 자캐오에게는 엄청난 감격과 감동의 장면이다. 너무나 감격한 자캐오는 기꺼이 예수님을 환영한다.
위기 : 사람들의 불평(19,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투덜거린다. :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19,7)
묵상 : 예수님은 항상 당신의 ‘하느님 나라 과업’을 수행하신다. 그러나 반대로 ‘땅의 마음’(욕심과 집착)을 가진 인간들은 예수님을 몰이해하고 질투하며 불평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기득권이나 특권은 당연히 누리고자 한다. 스스로의 말과 행동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무지와 교만’을 드러내며, 왜곡된 ‘기득권적 특권적 자세’를 보인다.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남들을 비평하고 있다.’ 그의 신앙생활에는 자유와 기쁨이 없다. 부정적 사고와 적대감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절정 : 자캐오의 변화된 모습과 결단(19,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19,8)
묵상 : 예수님께서 자캐오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다. 다만 주님의 현존과 말씀 안에서 감동된 자캐오는 욕심과 집착으로 땅바닥에 주저앉은 자신으로부터 벌떡 일어섰다.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으로 무장을 한 것이다.
그런 자캐오의 중대 결심은 ‘이웃과의 나눔과 이웃에 대한 정의와 배려’를 보여준다. 자캐오는 ‘예수님과의 만남과 말씀’ 안에서, ‘재물의 진정한 가치’와 ‘이웃의 존재 가치’를 근원적으로 재발견하였다. 결국 자캐오는 지금까지의 상처 때문에 병든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나 역시 건전한 신앙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첫째 재물관, 둘째 이웃관과 자선관(정의와 배려), 셋째 그런 것들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관을 발견해야 한다.
결말 : 예수님의 구원 말씀(19,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말씀하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9,10)
묵상 : 그렇다.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그분의 현존과 말씀’안에서 어둡고 차가운 자신의 인생에 ‘새 빛의 비전’과 ‘존재의 의미’, ‘생명의 열정’ 등을 발견하였다. 주님께서는 자캐오라는 가장이 구원의 길에 들어섬으로써, 온 가정과 집안이 구원되었다고 선언하신다. 주님의 설교와 대인관계는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히 대하시며 이 구원의 길로 이끄신다.
<결심>
1. 우리는 살면서 자캐오처럼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이러는지?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묻게 된다. 자캐오가 주님을 만난 것이 그의 인생을 참된 성공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 만남’ 과 성공을 꿈꾸며 살자.
2. 그러기 위해 구체적으로 생산적인 결심을 하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보자.
3.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재물’과 ‘이웃’과 ‘자신’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어떤 삶의 결단을 내려야 할까?
11월 11일 연중 제32주일 : 루카 20,27-38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문맥>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루카 19,28-40), 멸망할 예루살렘을 위하여 우신다.(19,41-44) 그리고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장사꾼들을 내쫓으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신다.(19,45-48) 그러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하여 갖가지 질문으로 공격한다.(예수님 행동의 권한 문제 20,1-8 ;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20,20-24 ; 사두가이의 부활 관련 질문 20,27-33)
밑줄 친 오늘의 본문은 주님과의 질의응답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도전이 있을 때마다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신다.(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20,9-19 ; 세금은 황제에게 내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 20,25-26 ;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 20,34-40)
결국 오늘의 본문(20,27-38)은 ‘부활 논쟁’이다. 이 ‘부활 논쟁’ 이후(20,41)부터는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말씀을 선포하시고, 멸망(종말)에 관한 말씀이 절정을 이루면서(21,5-38) 죽음을 맞으신다.
<구조와 해설>
문제제기
사두가이 몇 사람이 ‘부활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하여,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수숙혼(嫂叔婚 : 신명 25,5-10. 형제의 아내嫂와 남편의 형제叔가 결혼해서 후손을 두어야 한다.)1)을 예로 들며 ‘한 집안의 일곱 남자와 살다 죽어 부활한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인가?’를 묻는다.(20,27-33)
1) 망자의 집안을 지켜주고 상속인을 만들어 주는 수숙혼(嫂叔婚)을 금지하는 대목(레위 18,16;20,21)과 딸의 상속권을 인정하는 대목(민수 36장)도 있다. (히타이트와 아시리아에게 이런 관습이 있었다.) 딸의 상속권 인정으로 봐서, 세월 따라 그런 규정은 줄어들었던 것 같다.
예수님의 답변
예수님께서 답변하신다. : 그런 질문은 이 세상 사는 동안에만 해당되는 것이다.(34절) 저 세상에서 또 부활의 자격을 얻는 자는 시집 장가드는 일이 없다.(35절) 천사들처럼 더 이상 죽는 일이 없다.(36절)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7절) 탈출기 3장 6절(하느님의 현현과 자기계시 대목)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죽은 자의 부활’을 이미 밝혀주고 있다. 즉 이 표현에서 ‘하느님은 산 자들의 하느님이며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38절)
주변 반응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부르며, ‘잘 말씀하셨다’고 장단을 맞춘다.(39절) 그들은 나름대로의 부활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이 바리사이인 율법학자들은 부활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사두가이의 주장을 격파한 예수님께 동조한 것이다.)
결과 / 효과
사람들은 더 이상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40절)
구약의 하느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은 최상의 공격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율법의 정확하고 권위 있는 해석’으로 ‘사두가이적 불신앙’의 논리를 무너뜨리신 이후, 아무도 불순하게 도전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현실 적용
1. 나는 ‘부활 신앙인’인가?
: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부활 신앙을 근거’로 ‘부활 신앙을 전제’로 하여 세례를 받았다. 나의 개인 신앙생활과 특히 나의 공동체적 활동이 부활 신앙을 근거로 전제로 한 것인가? 부활 신앙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는가?
2. 그렇다면 ‘부활’에 이르는 과정으로서 ‘십자가의 죽음’(희생, 보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 나 개인의 일들과 공동체 - 가정, 교회 사회 - 의 일들 가운데서 겪는 고난과 어려움 - 모함, 비난, 중상모략, 반대세력들, 스스로의 실패 등 - 을 ‘부활에 도달하기 위한 십자가의 의미’로 받아들이는가?
3. 더욱 근원적으로 나의 구원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의 죄와 우리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 피의 공로’임을 확실히 믿는가?
: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구원관의 핵심’임을 아는가?
11월 18일 연중 제33주일, 평신도주일 : 루카 21,5-19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12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문맥>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루카 19,1-40) 직후,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고(41-44절), 성전 정화 작업을 하시자(45-48절), 성전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연설이 이어졌다.(20,1-47 : 권한, 세금, 부활, 메시아와 교만 등 관련 논쟁) 역시 성전에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21,1-4)에 관한 말씀을 주신 후, 이제 종말론적 예고의 말씀을 주신다.(21,5-28)
<구조>
발단 21,5-6 : 어떤 이들이 성전의 아름다움과 건축 자본에 관하여 언급을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다.
전개 21,7 : 그들이 성전 파괴의 때와 표징을 묻는다.
위기 21,8-9 : 예수님께서는 ‘거짓 때와 속임수’에 조심하라고 말씀하신다.(표징 1)
21,10 : ‘인간의 전쟁들’(표징 2)
21,11 : ‘자연의 재난들’(표징 3)
21,12 : ‘박해’(표징 4)
절정 21,13-17 : ‘위기는 증언의 기회다. 주님께서 언변과 지혜를 주신다.’
결말 21,18-19 : ‘머리카락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니,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묵상>
21,5-6 : 사람들은 어떤 인물이나 사건-사고의 외적 크기에 마음을 잘 빼앗긴다. 그것들의 원인과 뿌리는 사전에 그리고 내면적으로 이미 준비되어 있다. 성전의 아름다움도 성전 건축비의 출처도 모두 외적인 것이다. 그것의 원초적이며 내면적인 의미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그것의 영적인 의미를 묻지 않는다. 그래서 그 외적인 것 이상의 의미와 가치는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저 놀라운 정보로 접수될 뿐이다.
내가 겪고 있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사건과 사고들의 원초적 - 내적 - 영적의미를 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안에서 ‘나와 우리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묻지 않으니 답을 들을 수가 없다. 틀린 물음이라도 묻지 않으면 주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다. 차라리 어리석은 질문이라도 하면, 주님의 현명하고 지혜로우신 답변을 들을 수 있다. 나는 묻는가? 우리는 참된 것을 알고 싶어 하는가?
21,7 : 우리는 곧잘 ‘때(시간)’를 묻는다. 또 ‘외적 표징’을 알고 싶어 한다. 우리의 눈이 자연스럽게 ‘앞과 밖을 향하여’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원초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으로 눈을 돌려야, 지금의 나의 위치와 앞으로의 전망이 제대로 보인다. ‘때와 표징’을 묻기도 하지만, 출발점으로서의 태도가 불완전하다.
21,8-12 : 가짜 시간과 가짜 그리스도 - 가짜 위기가 앞선다. 그런 다음 인간들의 전쟁들이 뒤따른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인위적인 것들의 폐해가 드러나는 것이다.(8-10절)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자연적인 재해들과 뒤섞여 일어난다.(11-12절) 그런데 인위적인 것들의 폐해와 자연적인 재해들에 앞서서 그 뿌리가 되는 악의적인 것, 즉 박해를 만나게 된다.
21,13-17 : 그러나 이런 악조건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언변으로 극복될 것들’이니,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 즉 또 다시 하느님의 것이 아닌 인위적인 것으로 대처하지 말라는 것이다.
21,18-19 :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를 처신할 때, 나는 하나도 잃지 않으니, 그저 <주님의 것으로 무장하여> 인내하여, 생명을 얻으라는 것이다. 그 생명이야 말로 우리가 묻고 요구해야할 참된 것이다.
<결단>
세상의 성공을 위하여 온갖 인위적인 것과 자연 파괴적인 것, 악의적인 박해와 미움이라는 흉기를 가슴에 품고 사는 우리는 아닌가?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그 모든 것들 >을 <버리는 용기와 결단>을 배워야 할 것이다.
11월 25일 연중 제34주일,그리스도 왕 대축일 : 루카 23,35b-43
35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이 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 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문맥>
두 죄수의 서로 다른 죽음(종말) 맞이 :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아(루카 23,13-25)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계시고, 그 좌측과 우측에 죄수 한 명씩 매달려 있다.(26-3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무지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신다.(34a). 반면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옷을 나눠 가지고 있으며, 백성들은 그 모든 것을 서서 지켜보고 있다.(34b-35a)
<오늘의 본문>은 바로 여기에 위치하여, 지도자들의 빈정거림과 군사들의 조롱, 두 죄수들의 말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묘사한다.
급기야 예수님의 죽음과 매장(23,44-56), 부활과 현현(24,1-35), 사명 부여와 승천(24,36-53)으로 마무리된다.
요약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죽음’ 직전 가지신 죄수들과의 대화이다.
<구조>
23,35b : 백성 지도자들의 빈정거린다.(진정한 메시아성 의심하는 말들)
23,36-38 : 군사들이 말과 행동으로 조롱한다.(예수님께 자기 구원 명령)
23,39 : 죄수 한 명이 모독한다.(예수님 자신과 자기자신 구원 명령)
23,40-41 : 다른 죄수의 반론.(주님을 모독한 죄수를 꾸짖음)
23,42 : 그리고 예수님께 천국에 들어가실 때 기억해 달라고 청함.
23,43 : 예수님의 구원의 응답 말씀을 주심.
<묵상>
23,35a : 백성들은 이 모든 상황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이 엄청난 불의의 현장을 그저 바라만 보고만 있는 백성의 무지와 무심함은 너무 잔인하기까지 하다. 예수님께서 쏟아 내신 사랑과 열정에 무디게 반응했던 것만큼이나 그분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그저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다. 이때야말로 적극적인 지지자가 필요할 때이다.
23,35b : 백성의 지도자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향하여 ‘메시아의 진정성’을 보이라고 빈정거린다.
지도자들은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항상 남의 약점을 밟고 자신의 입지를 굳힌다. 그들은 건전한 경쟁을 할 수 없다. 그들은 ‘부정적 사고’와 ‘이기적인 마음’으로 남을 누르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때문에, 좋은 지도자로서의 기능이 마비되어 있다. ‘메시아의 진정성’을 긍정적 사고와 이타적 마음으로 구했다면, 예수님의 업적과 말씀을 통하여 그분의 ‘메시아성’을 이미 인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마음은 긍정적이지 못하였으므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비전과 열정과 현실에 대한 식별력이 매우 부족하였다. 지도자의 자질부족은 곧 조직과 공동체 전체의 위기로 직결되게 한다.
23,36-38 : 군사들도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을 ‘네 목숨이나 살려보라’고 조롱한다.
군인들은 조직의 힘을 근본으로 한다. 군인들에게 사기가 중요한 만큼이나 군중심리에 잘 휩쓸린다. 그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범죄자일 뿐이다. 그래서 진실이나 진리에 아무런 관심없이 ‘그저 죄수인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다.
23,39 : 죄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모독한다.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구원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삶의 부정적 입장을 고수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헛살아왔다는 반성도 없다. ‘될 대로 되라’는 태도이며 ‘막 가자’는 것이다. 그의 인생 체험은 항상 부정적인 ‘불신’과 ‘상처’와 ‘원한’과 ‘적대감’ 뿐이다.
23,40-41 : 다른 죄수 한 사람은 반대로 이 죄수를 꾸짖어, ‘하느님 존재와 그분께 대한 두려움’을 일깨우고,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언한다.
그의 경우, 1) 죽음의 위기 앞에서 사람이 갑자기 회개가 일어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생길 수 있다. 2) 그러나 평소에 크거나 작은 신앙이 있었으나, 죽음의 위기 앞에서 진실히 하느님께 회개하였을 수 있다. 3) 평소 신앙심이 깊지만 과실치사 등의 혐의로 책임을 지기 위하여 이 십자가에 매달릴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자.
23,42 : 이 두 번째 죄수는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시며 기억해 달라고 청한다.
문제는 <이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진 회개의 유효성 designtimesp=13923>이다. 마지막 순간의 회개도 유효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는 모든 죽을 죄인을 살리고 인류를 재창조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 같은 죄인도 용서받고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대세자들이 그렇고 (무지한 채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착하게 살다간 자들에게도 구원은 열려 있다. 그 공로는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데 있다. 그 십자가에 의지하고 동참함으로써 그 공로를 이웃에게 확장해 나가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사명이다.
23,43 : 예수님의 말씀이다 : ‘진짜로 말하거니와, 주님께서 오늘(바로 그날) 그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의 말들은 모두가 공허하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는 진실하며 진리와 생명으로 충만하다. 믿는 자에게는 주님의 말씀 그 자체가 곧 성취이다.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나아가 성취하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노력하자.
<결심> 현재의 시제로 결심을 봉헌합시다.
1. 나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다.(미래)
나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현재)
2. 나는 항상 회개의 자세로 살 것이다.(미래)
나는 항상 하느님께로 회개한다.(현재)
3. 나는 항상 말씀을 중심으로 살 것이다.(미래)
나는 말씀 중심주의로 산다.(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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