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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와 생활
도대체 무엇이 미사 전례에 대한 새로운 이해인가요?


최창덕(프란치스코 하비에르)|신부, 장량성당 주임

미사 - 두 번째 이야기
도대체 무엇이 미사 전례에 대한 새로운 이해인가요?



미사 전례서 총지침 7항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미사전례의 기본구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안에 현존하시며” 그리고 “직무 수행자의 인격 안에서” 그런 다음 “그분의 말씀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실제적이고 지속적으로 현존”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현존이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형상아래 계신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언급하지 않은데 대해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정적인 현존의 형태가 아니라 역동적인 현존의 형태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중개자로 전례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은 쇄신을 이끄는 주제에 속합니다. : 과정으로써, 예식수행으로써의 전례입니다.

“성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한 논쟁이 벌어진 이래 그리스도의 (역동적) 현존에 대한 가톨릭의 인식은 오직 빵과 포도주 형상 하에서의 그리스도의 정적인 현존에 대해서만 한정되었습니다.”(요셉 렝엘링) 이제 와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18,2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먼저 전례 공동체 안에 계시는 그분의 근본적 현존에 대해 언급합니다. 사제는 특별한 방법으로 여기에 속합니다. 그런 다음 성경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께 들어 올리는 찬미와 미사성제 안에서 그리스도의 실체적 현존이 따라 옵니다. 미사성제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은 다른 실체적 현존방법과 구분하여 영속적인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 표현에서 모인 모든 이들이 전례의 주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공동체는 사제의 주재 하에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며 전례에 “완전히 의식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여기에다 공동체는 세례와 견진으로 “임금의 사제단”(1베드 2,9), 권리와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전례는 단지 성직자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신품권한에 속한 직무로 이해되어 왔습니다.(참조. 구 교회법 2256조)

이러한 이해는 비상세례, 세례와 견진 때에 대부의 협력 또는 혼인서약(성사의 수여자로서의 혼인당사자인 신랑과 신부)과 같이 실제에 있어서 결코 정당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사제만이 전례의 고유 집전자라는 이해는 계속하여 신자들에게 뿌리 깊이 박혔던 사고와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함께 능동적으로 전례 행위에 참여할 때 그 거행이 지난 교회적 본성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납니다.”(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 19항)


전례력 - 두 번째 이야기
도대체 고유한 교회력이 있나요?



교회와 공동체의 삶은 ‘교회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주일에 의해 결정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간마다 주일이라고 불린 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합니다.”(전례헌장 102항) 주님의 날은 “근원적인 축일이다. 왜냐하면 주일은 전례주년 전체의 토대이며 핵심이기 때문이다.”(전례헌장 106항)

8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모든 주일과 축일들을 “주님의 날, 부활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모든 축일들은 그리스도 사건, 예수님의 생애에서 구원사적 사건들이든지, 아니면 신앙 고백자들이나 성인들의 생애 안에서 펼쳐진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기념하는 날들입니다.

‘교회력’이란 개념은 먼저 신앙의 분열(종교개혁) 시대에 등장하였습니다. 교회력이 언제 시작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관심은 부차적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 교회 안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중세기에는 교회력이 때로는 부활에, 때로는 성탄에(지금까지도 25년마다 거행하는 성년의 시작) 또는 주님 탄생 예고 축일(3월 25일)에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단지 전례서들만이 어느 특정한 기한에 시작해야 했습니다.

비잔틴 교회에서는 전례서들이 주님의 해를 부활절 준비와 함께 시작하였습니다. 성가책(독일어판)은 원래 사순절로 ‘교회력’이란 단락을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대림절로 교회력이 시작된다는 사고가 신자들에게 깊이 뿌리내려져 있기에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전례서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전례 안에서 성화된 고유한 한 해의 흐름을 일러주는 교회력이 시민력에 비해 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그러한 경향을 보였거나 그렇게 시도했던 시대가 있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은 단호하게 교회력은 예수님의 생애를 펼치는 종교극이 아니라고 언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겨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잔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치 사물의 세계가 성사나 준성사를 통하여 구원을 증거하고 일깨워주듯이 시간은 전례거행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의 현재 단계를 구분하여줍니다.

한 해의 여러 전례를 거행하는 가운데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보다 강하게(부활절) 또는 보다 약하게(평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원래 주일에만 주간 파스카 축제를 거행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가 있었습니다.(주일 공동체) 초세기 교회에서는 평일에는 성찬례(미사)가 없었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하루의 파스카를 아침과 저녁기도 안에서 거행했습니다. 2세기 중엽 이후부터 한 해의 파스카 축제인 부활축제인 주일 잔치가 적극적으로 거행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교회는 부활에서 시작하여 부활로 주님께 마주 나갔습니다.

3세기와 4세기에 와서는 부활 축제가 50일로 확장되었으며 또한 40일의 준비시기를 마련하였습니다.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성자, 황제이시며 승리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고백에서 하나의 계속되는 축제시기가 생겨났습니다. 부활에서 주님 공현축제, 서방 교회에서의 성탄축제가 생겼습니다. 이어 즉시 부활축제의 고유한 준비시기인 사순시기를 모방하여 성탄축제의 고유한 준비시기인 대림시기가 생겨났습니다.

부활축제가 명백히 주일과 결부되었다면 성탄과 공현축제는 더 이상 주간의 나날과 연결되지 않으며, 더 이상 주일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시민력과 결합되었습니다. 믿는 이들의 의식 안에서 주일의 우선적인 위치가 해마다 반복되어 돌아오는 축제들, 인간이 되신 강생의 신비를 일깨우는 예수님의 탄생이나 그분의 공적 활동 그리고 수난과 죽음 부활, 성령 파견과 재림을 기념하는 축제 뒤로 물러납니다.

이렇게 교회는 한 해의 흐름 안에서 전 그리스도의 신비를 확장시킵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력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주님의 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분명한 것은 주님의 날에 대한 기념이 다른 모든 기념일보다 우선합니다. 그러기에 성인들의 죽음의 날(교회는 성인이 세상에서 돌아가신 날을 천상에서의 탄생일로 여겨 항상 이 날을 축일 또는 기념일로 정합니다.)을 기념하는 성인력(성인들의 축일 또는 기념일 모음)은 언제나 주님의 해(주님 축일) 보다 아래에 자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