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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
헌 운동화


이경수(라파엘)|용성성당 주임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10년여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에, 첫 몇 해가 지나고 나니 오는 편지가 뜸해졌다. 내가 성실히 편지하지 않았고, 또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누구 탓을 하랴마는, 그래도 문득 편지가 기다려질 때가 있었다. 특히 학교에서 쓸쓸히 돌아와야 했던 시간이면, 기숙사 다른 방 문 앞에 배달되어 놓인 편지나 소포가 부러워 보였다.

언젠가 운동을 하고 땀에 젖은 운동화를 방 문 앞에 내놓았었다. 그 후 학교에서 돌아오던 어느 날 기숙사 복도를 들어서는데, 내 방 문 앞에 놓인 무엇이 보였다. 차츰 다가가 보니 내어놓았던 그 헌 운동화였다. 그런데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헛된 기다림인 줄 알면서도, 그나마 위안이 되어, 그 운동화를 계속 방 문 앞에 내어놓았었다.

우리의 삶이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데는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기다림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이다. 헌 운동화 기다리듯 헛된 기다림인 줄 알면서도 그 위안에 젖어 살아가기를 원하는 때도 많지 않겠나. 헛된 희망을 안고 살아가기를 원하면 내 삶은 결국 스스로가 스스로를 속이고, 급기야 기쁜 희망으로는 채워지지 못한다. 신앙의 위기는 바로 이 희망의 위기인 것이다.

지난해를 보내며 『교수신문』이 선정한, 한 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가 ‘자기기인(自欺欺人)’이라고 한다.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인다는 뜻이다. 지난해에는 대선과 맞물려 네거티브 선거 전략을 비롯해 학력 위조와 논문 표절 등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 유독 많았던 탓일 터다. 새해에는 참되게 기쁜 새 희망으로 채워지기를 바래본다.

지난 대림절을 시작하기 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당신의 두 번째 회칙 『희망으로 구원을』을 반포하셨다.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네 가지 자리 중에, 첫 번째로 꼽은 것이 기도이다. 헛된 희망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하는 기도가 의무감으로 점철된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과 만나는 기쁜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는 “아무도 더 이상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나에게 귀 기울이심을…나를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도우실 수 있음”(회칙 7장)을 배우는 ‘희망의 학교’가 될 것이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