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11월 15일 그 대단한 수학능력시험을 치렀습니다. 고3 학생들 중 몇몇은 논술 및 심층 면접 때문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대입’이라는 높고 험난한 산의 정상을 향해 지칠 대로 지친 두 다리를 질질 끌며 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학능력시험을 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무기력하게 빈둥대며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 대한민국 고3들의 현주소입니다.
“얘들아, 이제 생활기록부를 마감해야 하니 빨리 봉사활동 20시간을 채울 수 있도록 각자가 애쓰기 바란다.” 담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학급에서 귀여운 악동으로 불리는 L군이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외친다.
“선생님! 우리 저번에 갔던 재활원에 단체로 다시 봉사활동 가요!” 찬성과 반대의 소리들로 여기 저기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고 있을 때, 담임선생님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기쁨의 동그라미가 나와 큰 원을 그리며 온몸을 휘감는다. 선생님은 내심 1학기 때 학급끼리 봉사활동 한 것처럼 다시 한 번 더 봉사활동을 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능을 치르느라 심신이 지친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또 단호하게 거절 당할까봐 겁도 나서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순간을 놓칠세라 선생님은 “그래, 그럼 다음 주에 가자. 내가 공문 보내고 연락해 놓을게. 종례 끝.”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종종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간다. 이렇게 18살 먹은 34명의 남자 아이들은 그날도 여자 담임선생님에게 한 방 신나게 먹었다.
이 장면은 바로 제가 담임을 맡고 있는 우리 반 모습입니다. 저는 남자 고등학교 고3 담임입니다.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의 교육현실은 학생뿐만 아니라 부모나 교사 모두에게 힘겨운 족쇄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 안에서 최선을 다 하고 살아갑니다. 어떤 학부모님은 상담 중 “선생님! 더러워서 고3 엄마 못하겠어요. 지 앞에선 이건 숨도 제대로 못 쉬어요.”라고 푸념을 쏟아낸 적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대다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1순위가 <공부>임을 은연 중에 강조하며, 자신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라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열심히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사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곳임을 알지도 못한 채!
저는 아이들을 ‘성능이 매우 뛰어난 스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직은 빨아들인 것이 별로 없는 순백의 새 스펀지라고 믿고 있습니다. 스펀지의 특성은 수분을 잘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빨아들일 수분은 바로 기성세대가 만듭니다. 그런데 기성세대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자신만을 위한 세상을 강조하면서도 이상적인 아이들을 기대합니다.
어른들은 이기적으로 세상을 살면서 자녀들에게 자신이 잘 살기 위해서 공부하라고만 강요하면서도, 요즘 아이들은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어른들은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거나 질서와 규칙을 내팽개치면서도, 아이들이 무질서하다고 질책합니다. 기성세대들은 정의롭지 못함으로 자신의 부와 권위를 획득하였으면서도 신세대들에겐 정의를 요구합니다. 이미 자신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살면서 내뿜어 놓은 수분들을 열심히 자신들의 스펀지로 흡수하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흡수 능력이 뛰어난 스펀지인 아이들이 좋은 수분을 흡수하는 것은 어른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소년들의 문화는 청소년들만이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본보기가 되는 기성세대들의 삶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삶을 사는 지침이 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모르는 것은 가르쳐줘야겠지요. 질책과 비판, 외면만이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맡고 있는 학급은 고3이면서도 1박 2일의 학급 단체 야영활동과 단체 봉사활동 등을 합니다. 부모님들도 함께 동참하는 이 행사를 몇 년간 진행하면서 저뿐만 아니라 학생들이나 부모님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습니다. 졸업 후 봉사활동을 한 재활원에 가서 봉사한 뒤 반창회를 열자는 졸업생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아직 모르기 때문에 어른들의 눈에 미숙할 뿐, 그들은 좋은 수분을 어른들이 주기만 하면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정말 기능 좋은 스펀지*와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장애우 돌보기를 마친 뒤 목욕 봉사를 한 한 학생이 팬티까지 다 젖어 버렸다면서도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웠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저 아이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지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란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으니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좀더 열심히 노력하여 스펀지 같은 이 아이들에게 더 좋은 수분을 주는 어른이 되기 위해 전 오늘도 열심히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장애우들과 함께 하며 해맑은 미소를 던지는 이 아이들이 만드는 내일은 ‘희망’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 스펀지[sponge] : [명사] 생고무나 합성수지로 해면(海綿)처럼 만든 물건. 탄력이 있고 수분을 잘 빨아들여 쿠션이나 물건을 닦는 재료로 많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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