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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되면 어김없이 세상 곳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들의 함성이 들려옵니다. 학교도 3월이 되면 교정은 새내기 신입생들의 신선한 함성으로 살아 움직입니다. 새로 맞춘 커다란 교복을 입고 긴장과 설렘으로 가득 찬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학식장에 도열해 있는 아이들은 3년 동안 이 학교 안에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교사들이 주는 사랑을 마시며. 사랑을 받는 아이들은 행복의 열매를 맺습니다. 행복의 열매를 맺는 아이들은 자신에게 당당합니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꿈꿉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다시 사랑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자라는 나무는 다시 사랑을 퍼뜨립니다.
저는 매년 담임이 되어 만나는 첫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학교 엄마다.” 처음엔 아이들은 저의 ‘엄마’란 호칭을 무척 어색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이들도 제가 학교엄마란 사실을 인정합니다. 스승의 날 편지 끝에, 군대에서 보내는 편지 끝에 ‘아들 ㅇㅇ’라고 스스럼없이 적어 놓습니다. 어떤 학생은 생일 선물로 제게 받은 3,000원짜리 티셔츠가 아까워 집에 몇 년씩 걸어두기도 했답니다. 핸드폰 문자에 ‘엄마 자?’라며 애정 표현을 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부모님은 ‘학교 엄마! 안녕하세요? 저는 집에 엄마입니다.’라며 첫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어느 어머님께선 저에게 “학교 엄마”란 시(詩)를 지어 주신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에서 자식이 매우 많은 학교 엄마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만 사랑으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사도 아이들의 사랑을 먹고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아이들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선물이 ‘편지’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매년 제가 담임을 맡은 학생들로부터 저는 스승의 날 선물로 학생 수 만큼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 속에 숨어 있는 아이들의 사랑이 너무나 벅차 저는 며칠 동안 읽었던 편지를 또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 중 2005년도 K군의 두 장짜리 편지는 이럴게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선생님! 10년 뒤에 제가 다시 선생님을 찾을 때 이 편지를 저에게 돌려주십시오. 제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이 편지를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말해줄 것입니다. 아버지에겐 이런 선생님이 계셔서 힘든 고교 시절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고.” 저는 이 편지를 눈물 속에서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준 조그만 사랑에 비해 그 아이가 제게 전해 주는 따뜻한 사랑이 너무 커서…. 그래서 전 힘겨울 때마다 아이들이 써 준 편지들을 꺼내 읽곤 합니다. 그러면 제 마음 속에 다시 사랑의 샘물이 가득 채워짐을 느낍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고등학생에게 가정은 여인숙처럼 잠시 잠을 자고 나오는 곳으로 여겨질 정도로 머무는 시간이 짧습니다. 학생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냅니다. 그래서 학부모 이상으로 교사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특히 제가 맡고 있는 고3 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교사와 함께 호흡하고 있습니다. 집에 계신 부모님보다 더 많이 부대끼고 숨결을 나누는 사람이 바로 교사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아이들에게 또 다른 부모라고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으로 자라는 나무입니다. 사랑이 겉으로 표현될 때의 모습은 여러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모습의 근원에는 상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가 몇 년 전 여러 번 가출한 학생을 때린 적이 있습니다. 때리는 저는 가슴이 아파서 울었고, 맞는 학생은 육체가 아파서 울었습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두 손을 잡고 저는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이렇게 말 했습니다. “아들! 내가 왜 널 때렸는지 아니? 널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 말은 저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이후로 그 아이는 가출을 하지 않았습니다. 졸업식날 그 학생의 아버지께서 졸업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저에게 악수를 청하시며 두 손으로 꼭 잡으셨을 때의 가슴 저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벅참은 교사로 사는 제게 존재의 이유로 다가섭니다.
흔히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고 말합니다. 무관심은 교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굳이 힘겹게 아이들과 입씨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교사는 부모이기에 그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교육은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지식의 곳간을 채우도록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 속에서 올바른 인간으로 사는 모습도 가르치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온전히 내놓으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상인들에게 채찍을 휘두르셨습니다. 본질을 해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순 없습니다. 자식들이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땐, 부모는 아프고 힘들더라도 바른 것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교사 역시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는 사람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오로지 그 ‘사랑’만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아파도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지 못합니다. 힘겨움도 ‘사랑’ 앞에선 행복함으로 바뀝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사랑’이란 이름 앞에선 아무것도 아닐 때가 있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위대합니다.
이은상 작사, 홍난파 작곡의 ‘사랑’이란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탈 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도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쓰일 곳이 없느니라.”
자신의 몸이 타 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환하고 따뜻한 불을 피우는 나무의 모습에서 시인은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특히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쓰일 곳이 없느니라.’라는 구절은 시인이 생각하는 사랑의 참 모습을 구체적으로 말해줍니다. 사실 사랑을 하면 동시에 따라오는 고통 때문에 그만 두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그만 두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랑의 특성임을 시인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나 봅니다.
저도 타다 남은 동강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온전히 다 타서 재가 되어 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더라도 그 빛으로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제가 이 세상에 선생으로 산 이유가 되겠지요. 뜨거운 그 열기가 어떤 아이에게 삶의 열정을 맛볼 수 있게 했다면 그것만으로 행복합니다. 교사들의 사랑의 대상은 학생들입니다. 그것이 대부분 짝사랑으로 끝날 때가 많지만!
우리 학교 고3들은 수능시험 이후에도 학교에서 분주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정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과 싸우기라도 하는 듯 각 동아리별로 3학년이 중심이 되어 정기 공연을 했습니다. 또 입시 지옥이란 이 고달픈 현실 속에서도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공연을 위해 분주히 발품을 팔았습니다.
저는 그 공연들의 성공 여부를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한 학생들과 그들을 사랑하기에 자투리 시간까지도 망설임 없이 내놓은 교사들의 사랑이 살아 숨 쉬는 무대였기에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더불어 끝없이 사랑을 퍼 올리는 교사와 그 사랑의 샘물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 이 행복한 자리를 저에게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더없는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마지막으로 세상 어딘가에서 사랑을 내뿜으며 열심히 살고 있을 나의 아들들이여, 끝까지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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