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때문에,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의를 갖추지만 마음으로는 동하지 못하는 만남들로 인해 건성으로 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내게도 그대로 되돌아와 진실한 만남이 더더욱 필요하고 그리워진다.
보좌신부 시절, 빈틈없이 돌아가던 주일의 일정을 맞추기 위해 본당 주임신부님과 보좌신부들이 역할을 분담해서 톱니바퀴처럼 미사와 고해성사, 회합 등의 일들을 해나가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 각기 허용되는 시간에 알아서 식사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도 성당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 되어 교육관에서 마당으로 내려서니, 주의력에 한계에 달한 아이들 때문에 아예 마당에서 미사에 참례하던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더러 계셨다. 주로 너더댓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 사이로 스쳐 지나가면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예쁘구나. 넌 이름이 뭐니?”하던 중이었다.
그때 할머니와 함께 있던 한 여자아이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따졌다. “나는 신부님 아는데, 신부님은 왜 날 몰라요? 지난번에도 물으셨으면서….” 주위의 시선이 그 아이와 내게로 쏠렸고 할머니는 어쩔 줄 몰라 하셨지만, 그 아이의 당당한 따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랬구나! 이미 여러 번 그렇게 물었지만, 정작 나는 너의 이름을 기억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구나. 물론 내겐 그 많은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할 재주도 없지만, 아이에게 주었을지도 모를 상처를 생각하면 부끄러워진다.
이름을 부르는 데에서 인격적 만남이 시작될 터인데 우리 삶의 규모가 이 만남을 가능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아예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건성일 때가 많아진다. 그 부족함을 말의 성찬으로 메우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말도 마음도 공허해져 간다. 그것이 빈말임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만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 아이의 마음이 사실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셨다.(요한 20, 16) 그 ‘이름’을 부르셨다. 우리가 지상과제로 여기는 경제적인 효율성에는 전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흔아홉 마리를 그냥 두더라도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겠다던(루카 15, 4) 그분께서 내 이름을 부르시고자 하신다. 나를 위해 당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시고, 나를 부르시고자 하신다. 헝클어진 관계를 새로이 세우시고자 하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