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혜란 씨, 어서 일어나세요.”
까마득하게 들려오는 말소리와 몸을 흔들며 찰싹찰싹 때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왜 울지?” “마음이 아파 우는 것 같은데?”
이러한 웅성거림에 섞여 누군가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고통의 진액이 담긴 듯 토해내는 울음소리는 차츰 더 크게 가까이서 들려왔다. 잠시 희미한 의식이 돌아왔던 것일까. 그 거친 울음이 바로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통곡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술에 임하면서 나는 슬픔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옵니다. 당신 뜻대로 쓰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며 씩씩하게 수술실로 들어갔었다. 양쪽 가슴을 절제해야 할 것 같아 나는 내가 ‘여자’라는 감성의 전원을 모두 꺼버린 터였다. 자신을 연민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내린 독한 처방이었지만 무의식까지 다스릴 수는 없었다. 맨 정신으로는 차마 목 놓아 울 수도 없었던 억눌린 감정이 무의식중에 터져 나온 것이리라.
2006년 여름, 의료공단에서 나온 무료 검진표를 가지고 가톨릭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얼마 후 집으로 날아온 결과통지서엔 ‘양쪽 유방 미세석회화현상 추가검사 요망’이라 적혀 있었다. 가족 뿐 아니라 친척 중에도 암환자는 없다. 그러니 암일 것이라고는 추호의 의심도 안했다.
느긋하게 가서 초음파검사를 하고 결과를 보러 갔던 날의 박성환 교수님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렇게 되도록 뭐했어요?”
대뜸 나무라시는 말씀과 표정에서 심각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엔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내가 암 환자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수술 날짜가 잡혔으나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다보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유명한 병원도 많고 명의도 많았다. 가족과 형제들은 서울로 가야 한다고 우겼다. 그러는 사이 아들은 서울 국립 암센터에 예약을 했다. 서울로의 유혹이야 있었지만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망설여졌다. 첫째는 가족이 가까이에 있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고, 둘째는 우리 가족이 오랫동안 이용하며 익숙해진 가톨릭병원이 편안할 것 같았다. 거기에 성당이 있으니 위로받고 싶을 때는 도움이 될 것이다. 서른이 넘은 두 아들은 어린 시절 이비인후과 수술과 비뇨기과의 일명 ‘고래잡이’라는 수술을 그곳에서 했다. 그때는 병원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썰렁할 때였다. 3년 전엔 남편이 심근경색 수술을 받고 매달 처방 받으러가는 병원이 가톨릭병원이다. 마음은 그쪽으로 기울었고 결정권은 내게 있었다.
입원하여 여러 가지 검사와 수술 절차가 급하게 진행되었다. 선생님은 한쪽 유방이라도 살려보자고 하셨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찌그러진 유방 하나를 남기기 위해 달라질 치료과정이 무서웠고, 재발위험률이 단 몇 %라도 높을 것 같았다. 나는 오직 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나중에 가족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선생님은 한쪽 유방이라도 살려보려고 애를 쓰셨던 것 같다. 그 때문인지 네다섯 시간으로 잡은 수술은 일곱 시간이나 걸려 가족의 애간장을 태웠다. 내가 살아가면서 겪게 될 상실의 아픔을 선생님은 꿰뚫고 계셨던 것이리라.
수술 후 첫 회진 때 선생님의 인사는 “허전하지 않느냐?”는 말씀이었다. 나는 대답대신 “선생님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말없이 싱긋이 웃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기분 좋게 남아있다. 그때는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정밀검사를 하고 환부를 도려내고 꿰매고 하는 과정을 상상해 보니 그저 감사했다. 의사란 직업도 위대해보였고, 무뚝뚝해보이던 선생님의 인상은 신뢰로 바뀌어갔다. 주치의 선생님뿐 아니라 곁에서 도왔을 다른 선생님과 간호사, 심지어 병원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고마웠다. 수술 3일 만에 성당에 가서 감사 미사를 드렸다.
생각이 그랬다고 해서 아픔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통은 생각보다 컸고 병에 관해 무지했다. 두통과 불안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상실감이라 생각했지만 내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울고 싶을 땐 성당으로 달려가 하느님께 하소연했다. 어쩌다 토막잠이 들어도 악몽을 꾸기 일쑤여서 밤이 두려웠다. 병원의 성모동산에 앉아 자잘한 잡풀을 뽑으며 까맣게 밤을 새운 날도 여러 번이다. 그런 어느 날, 병실 복도 끝에 세워둔 성모상 앞에서 숨죽여 어깨를 들썩이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내 마음이 약해질까봐 표현하지 않았을 뿐, 남편은 나보다 더 예민하게 나를 향한 촉수를 뻗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강해져야 한다는 메시지 같았다.
퇴원해 와서도 혼자서는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남편과 아들들은 각자의 방을 비워두고 거실에다 잠자리를 폈다. 나란히 손을 잡고 누워 사랑의 주파수를 맞추었다. 길이 험할수록 길동무는 손을 더 꼭 잡는 법이다. 마주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사랑하는 이들의 체온과 잠결에 듣는 숨소리와 뒤척임, 이런 것들이 내 불안과 두려움의 치료제가 되어주었다.
‘괜찮아, 하느님께서 내게 휴식을 취하라는 배려일 거야.’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당장 죽을까 싶은 걱정보다 치료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남들이 하는 일이라면 나도 해낼 수 있다고 매일같이 자기암시와 최면을 걸었다. 빠진 머리카락을 한 웅큼씩 주우며 통곡 했다는 환우들의 말을 들었기에 나는 첫 항암치료가 끝난 뒤 병원 이발관에서 미리 배코를 쳤다. 머리카락은 다시 자랄 테고, 가족은 모자를 사다 날랐다.
나와 같은 환우들 대부분이 자신의 병을 숨기고 싶어 했다. 왜 감추어야 하는가? 병든 몸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병이 부끄럽지도 않았고,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하는 부정적인 생각도 안했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다. 당당하게 주위에 알리고 건강한 사람들과 어울렸다. 덕분에 많은 분들이 날 위해 미사와 기도를 바치고, 음식을 해다 날랐다. 그때 주위로부터 받은 은혜는 내가 평생 동안 꺼내 먹고도 남을 만큼 영혼의 양식으로 곳간에 가득 차있다. 일상생활에 큰 불편이 없는 지금까지도 기꺼이 정신적, 물질적 지원자가 되어주시는 분들이 계신다. 그 고마운 분들로 인해 내 성격은 많은 부분 긍정적으로 변화되고 삶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 긍정의 모습 때문인지 유방에 이상을 느끼는 많은 분들이 내게 상담을 해온다. 두 명의 친구가 나의 추천으로 내 주치의 선생님께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항암치료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벅찼다. 백혈구 수치도 지독하게 속을 썩였다. 허약한 체질에다 비위마저 약해 심한 구토로 며칠씩 물도 마실 수 없었다. 양쪽 팔을 사용할 수 없어 주사바늘을 다리에 꽂아야 하는 일도 여간 고통이 아니었다. 한 번 치료에 대여섯 번씩 바늘을 옮겨 꽂을 때도 있었다. 나중엔 꽂을 자리가 없었다. 다리의 얇은 살갗은 혈관이 터지고 독한 항암제에 화상을 입어 흉터가 많다. 간호사들은 미안해서 쩔쩔매곤 했지만 나는 그마저 고마워서 내 쪽에서 괜찮다며 안심시키곤 했다.
채혈을 하는 과정도 여간 죄스럽지가 않았다. 길게 늘어선 환자들 보기도 미안했다. 다른 이들은 팔뚝 쑥 내밀면 금방 끝나는 일이었지만 내 가느다란 발목에선 피가 나오지 않았다. 검사에 필요한 양을 뽑으려면 여러 사람 몫의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외래검사실에서 만난 선생님들의 고마움을 결코 잊지 못한다. 남들보다 몇 배의 정성을 필요로 했지만 표정 한번 바뀌지 않았고, 미안할 만큼 안쓰러워 했다.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지금도 병원에 가는 날이면 그때의 선생님들이 계신가 싶어 들려보곤 한다.
지금은 3개월에 한 번 병원에 들러 체크하고 항 호르몬제를 처방받아온다. 항암치료의 후유증으로 병원에만 들어서면 울컥 토악질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병원에 가는 일이 싫지 않다.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들을 만나는 일도 기분 좋다. 저 분들이 내 목숨을 건져주었구나 싶어 절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난다.
지금 나는 생의 한 단락이 끝나고, 죽음으로부터 유예가 허락된 새 단락의 출발점에 서 있는 기분이다. 시한부 아닌 인생이 어디 있으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 때문에 두려워하며 불행해질 필요는 없다. 병은 오히려 내 남은 생의 전 질량을 바쳐 살아야 할 이유를 깨우쳐 주었다. 그러한 깨달음은 삶의 아픈 기억들마저 비늘처럼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게 했다. 이제 내게 남은 모든 생을 하느님께 맡기고, 감사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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