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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가 있는 풍경
멀리서 보아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마을. 왜관을 거쳐 초전 입구에서 용봉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 사이로슬레이트 지붕이 길게 줄지어 있는 축사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닭이나 돼지를 키우며 살아 온 용봉마을은 이전의지명인 성신마을 또는 성신농장으로도 불린다.
용봉공소(경북 칠곡군 초전면 용봉 3리)는 인근 벽진공소, 달창공소와 함께 초전성당(주임 : 정석수 신부)에 속해 있는 공소로, 마을 주민 99% 이상이 가톨릭 신자로 이루어져 있을 만큼 주민들 모두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딱히 순교자가 배출된 마을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용봉공소에서 20년 가까이 공소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김진국(사도요한) 회장이 답을 들려준다.
“그게 1962년이었지, 아마. 우리 마을에 성심의원이 들어섰는데,그때 디오메데스 수녀님이라고 독일의 성 베네딕도회 수녀님이 원장님으로 부임하셨지요. 그때부터 수녀님은 1995년 마을을 떠나실 때까지 우리 마을주민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의 주민들을 위해 의술을 펼치며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신앙인의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 수녀님의 깊은 희생과 사랑을 체험한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너나 할 것 없이 수녀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디오메데스 수녀와 디에모의 집
마을 주민에게는 어머니 같은 존재로 기억되는 디오메데스 메펠트(Sr. Diomedes Meffert,O.S.B.1909-1998) 수녀. 1937년 6월, 28세의 젊은 나이에 원산항을 통해 입국하여 불우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진료활동을 하던 중,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수용소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고 1954년 디오메데스 수녀는 본국인 독일로 강제 소환된다. 하지만 한국을 잊지 못하여 1958년 두 번째로 한국 땅을 밟는다. 입국 후 디오메데스 수녀는 대구 파티마병원에서 근무하면서 1961년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으로부터 한센인들을 위한 정착농원 네 곳을 위촉 받아 매월 두 차례씩 순회 진료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1962년 3월,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에서 용봉마을에 내과, 외과, 산부인과, 안과, 피부과 의료시설을 갖춘 성심의원을 개원하면서 디오메데스 수녀는 원장으로 부임한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수도자로서, 의사로서 한평생 소외계층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면서 아픔을 함께 나누었고, 마을 주민들 역시 수녀님을 따라 신앙을 키워가며, 주된 생업인 양돈과 양계업을 확장하며 삶의 터전을 일구어 갔다.

그렇게 삶의 터전을 일구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초창기 어렵고 궁핍할 때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으로부터 크나큰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로써, 그 세월이 무려 27년에 이른다. 그후 성심의원은 1983년 11월 가톨릭병원 성주분원으로 개칭되었고 용봉마을은 자립마을이 되면서, 교구 소속으로 바뀌어 매주일과 평일 그리고 대축일에 미사를 봉헌해오고 있다.
1998년 디오메데스 수녀의 선종소식을 들은 마을 주민들은 수녀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공소 입구에 디오메데스 수녀의 흉상을 세움으로써 그 고마운 마음을 길이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성심의원이 있던 자리에는 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디에모의 집’을 지어 2007년 10월 조환길(타대오) 보좌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디에모의 집은 용봉마을을 위해 애쓰셨던 은인들인 디오메데스 메펠트 수녀와 에나타 수녀, 모니카(김경숙) 자매의 세례명 첫 글자를 따서 이름붙여 지은 집으로,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목욕시설과 편의시설에 중점을 두고 건립되었다. 하지만 지원금과 후원금이 없는 상태에서 운영상의 어려움이 따르고 있어, 처음 취지와는 달리 그 활용이 여의치 않고 그저 만남의 방 정도의 역할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소의 어제와 오늘
비가 올 듯한 주일 오후 1시 30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김남수(비오, 초전성당) 씨가 급히 일어나 나가더니 종을 치고 들어와 다시 앉는다. 미사시작 30분 전에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마을의 신자들은 성당 갈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며, 이젠 익숙한 일이란다. 공소에서 자란 김남수 씨에게 공소는 어떤 의미일까 물으니, 그는 “어릴 때부터 공소에서 복사를 서며 살아 그런지 공소나 신앙생활은 별개의 것이 아닌 그 자체가 저의 삶이고 제 속에 그냥 있는 것, 바로 제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몸속 깊 이 들어와 몸의 일부가 된 신앙이다.
오후 2시 주일미사 시작 전, 공소 주민들은 늘 그래왔듯이 묵주기도를 바친다. 작지만 짜임새 있게 지은 건물이다. 공소인데도 감실이 모셔져 있어 의아해 하니 김진국 공소회장이 설명해준다. “공소에 수녀님이 계시던 1995년까지 성체를 모셨었는데, 수녀님이 떠나시면서 성체도 본당으로 모셔갔지요. 그러다가 2004년 7월 11일 베네딕토 성인 축일에 당시 서정만(이시도로) 본당신부님께서 공소에 다시 성체를 모셔주셨는데, 그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용봉공소를 봉헌하고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그날부터 신자들이 공소에 모여 성체조배와 삼종기도, 낮기도를 지금까지 매일 바쳐오고 있습니다.”
초전선당 주임 정석수(유스티노) 신부는 “용봉공소는 공소 신자들이 레지오마리애 회합을 하고 또 매일 기도를 바치며 주일, 평일미사를 봉헌할 만큼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칭찬의 말을 들려주었다.
1953년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모여서 기도방을 마련하고 신앙의 공동체를 이룬 것이 계기가 된 용봉공소. 1955년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의 도움으로 마을 중심에 흙벽돌 기와로 된 공소건물을 지어 이듬해인 1956년 정묵도(엑펠트) 신부로부터 공소를 축성하여 사용해오다가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그리고 1985년 증축한 용봉공소는 그해 12월 이문희(바울로) 대주교를 모시고 축성미사를 봉헌한 뒤로 현재까지 공소민들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건물도 재정비해야 하는데 어려운 공소의 여건으로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매일매일 공소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주일과 평일(목요일) 미사까지 봉헌하고 있으니, 그 열심한 신앙은 참으로 부러움의 대상이라 하겠다.
이제 용봉 3리 주민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긴 세월동안 혼신의 힘을 다하고 선종하는 순간까지 용봉을 그리던 디오메데스 수녀 탄생 100주년(2009.4.10)을 준비하면서 추모 문집발간과 함께 기념미사를 봉헌할 계획이라며, 디오메데스 수녀를 기억하는 이들의 글과 사진을 6월말까지 기다린다고 전했다.
기도로 신앙을 꽃 피운 용봉공소에서의 취재가 끝나고 차를 돌려 공소를 벗어나려는데, 여기저기 농장에서 들리는 돼지 울음, 닭 울음이 저마다 합창을 한다. 그 소리는 마을 주민 전체가 신자이기도 한 그들의 기도 소리만큼이나 정겨움으로 귓가에 와 닿았다.
연락처 : 공소회장 김진국(사도요한) 011-519-6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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