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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설정 100주년을 준비하며
교구 100주년 기념 대성전 건축에 즈음하여
- 100주년 기념대성전 건축위원회 강론(2008. 4. 24)


장영일(그리산도)|신부, 효목성당 주임

1.‘Confide et Labora, 믿고 일하라!’라는 표어가 말하듯, 믿음 이외에는 그 무엇에도 기댈 만한 곳이 없었던 가난이 지배하던 1911년도의 한반도의 땅에 드망즈 주교님은 이 말씀을 사목지침으로 삼고 대구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이곳 대구에 발을 디디셨습니다.

주교가 머물 곳이 없어서 새로 부임한 교구장은 주교좌성당인 계산동 근처의 한옥을 빌려서 임시로 처소를 마련했다고 드망즈 주교일기의 서문은 기록함으로써 그 당시 대구교구의 경제적인 궁핍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1911년 4월 23일 주교서품을 받고, 그 해 6월 26일 대구에 부임하신 드망즈 주교님은 7월 2일 대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주일미사에서 루르드 성모님께 서약을 발합니다. 대구교구의 기금에 기대지 않고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을 건축하게 루르드 성모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주교관 내의 제일 좋은 곳에 루르드 성모동굴과 비슷한 동굴을 세우겠다고 약속을 하고 교우들도 이에 서명을 하며 각 본당에 사본을 보냈습니다.

 

2. 가난이 극심해 하루 세끼를 온전히 때우기 힘들었던 그 시절에 주교님은 부임 후 한 달도, 일 년도 아닌 7일째의 첫 주일에 ‘왜 그러한 서약을 하셨을까?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그 어느 것 하나만 떼어 놓고 생각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터에 그 모든 것을 이루시겠다고 결심하게 된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하는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대구교구의 신자는 도대체 몇 명이나 되었으며 본당은 몇 개나 되었기에 이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1911년 12월 15일 주교님께서는 교세통계표를 작성하시면서 대구교구의 신자수를 24,694명으로 기록하십니다. 오늘날의 청주교구와 영·호남 지역을 다 합친 숫자라 생각하면 얼마나 미미한 교세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교님께서는 1913년 2월 24일 주교관 건축을 할 중국인 건축가를 불러들여 공사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엄청난 금액의 공사대금으로 인한 고뇌가 얼마나 컸는지 1915년 12월 14일 일기에는 이런 기록을 남기고 계십니다.

 

“재정 상태로 인한 큰 걱정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런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교님께서 밤낮 없이 그리고 장소를 불문하고 노력하신 것은 다름 아닌 외국의 은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1918년 1월 1일 주교님의 일기장에서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1917년도에 주고받은 편지수를 발신 858통, 수신 688통으로 기록함으로써 그 힘든 격무에도 얼마나 외국의 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심초사 하셨는지를 이 편지의 수발 기록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대구교구의 틀을 놓는 작업은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일제의 수탈과 해방, 6.25 전쟁, 5.16 혁명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거치면서 우리 민족은 혹독한 인고의 시간을 치러야 했습니다.이런 격동의 시간을 지나면서 한국은 세계의 경제 역사 속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가난을 극복했고 이제는 산업화를 넘어 정보화 세계의 문턱에서 선두자리를 넘볼 만큼 경제적 결실을 논하는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도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 왔음을 기억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 나라의 개화기에 서양문물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 이 나라를 문명화 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고, 6.25전쟁의 참화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내밀어 수많은 이들을 구했으며,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워 가난 속에도 배울 수 있고, 치료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교회 본연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4. 한국 사회가 경제적인 기적을 이루는 동안 한국의 천주교회도 비약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대구대교구만 하여도 수십 만 명의 신자와 400여 명에 가까운 사제단과 150여 개의 본당과 수많은 학교와 병원과 복지시설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약적인 대구대교구의 발전의 밑바탕에는 외국선교사들의 피나는 노력과 서양 교회의 끊임없는 물질적인 도움과 관심이 그 바탕에 있음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설립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난했던 1950-60년대의 시절을 우리와 함께 가난하게 살면서도 복음을 전하는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신부님들과 분도회의 독일 신부님과 수사님들의 삶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며 교육을 시켰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불란서 수녀님과 가족들도 외면했던 나환자들을 찾아 나섰던 분도회의 독일 수녀님들의 온갖 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들이 세운 성당과 병원과 학교를 통해 우리는 가난과 궁핍에 쫓겨 감사할 줄도 모르며 얼마나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았습니까? 이제 우리는 지난 100년의 시간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함을 과거의 우리처럼 가난한 이웃나라들을 향한 구체적인 나눔으로 표현해야겠습니다.
우연히 머물게 된 파리외방선교회 본원의 건물에서 첫 날을 지내던 날 후배 신부님께서 사각형의 마당에 니은자로 지어진 건물의 옥탑방에서 마당을 내려다보며 설명을 했습니다.
‘신부님, 저 건물 성당에서 외방선교회 신부님들은 파견미사를 드리고 저 마당 제일 구석진 곳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정원으로 난 대문을 열고 나가서 선교지로 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그때 제 목구멍에는 뜨거운 무언가가 왈칵 솟아올랐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난 100년의 시간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함을 미래의 100년의 시간 속으로 이끌고 가야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나간 100년의 시간에 대한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00주년 성당을 봉헌하되, 그 명칭은 ‘아시아 선교 대성당’으로 명명했으면 합니다.

 

5. 대구대교구에서 외국으로 파견되는 평신도나 수도자나 성직자는 누구라도 한티에서 순교자들의 신앙을 가슴에 새기고 성모당에 들러 루르드의 성모님이며 교구의 주보이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이 대성당에서 교구장님의 축복과 신자들의 기도 속에서 선교지로 파견되었으면 합니다. 이제껏 우리가 받은 것을 이렇게 가난한 아시아의 나라들과 나누고 특히 침묵의 교회인 북한이 열리기를 기도하며 새로운 대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하는 것이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일제 식민지의 억압과 경제적인 궁핍함을 알면서도 초대 교구장님의 부임 7일 만에 이와 같은 무모한 서원이 가능했던 것은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되, 그분의 눈은 먼 내일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가진 돈 한 푼 없는 가난한 교구장의 무모한 듯이 보이는 주교관과 주교좌성당과 신학교, 성모당의 건립이 없었다면 대구교구의 모습은 어떠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당시의 가난함에 억눌려 이 네 가지 사업 중 하나만 누락되었어도 우리 교구의 현실은 현재와 같은 성장된 모습을 결코 갖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결코 우리의 눈이 현실에 얽매여 있어도 안 되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도 교구장과 일치하는 사제단과 신자 여러분의 무모함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제껏 교구 설립 100주년을 지향하여 많은 본당들이 신설되고 새 성전을 건립하느라 힘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구의 전 신자가 30,000명이 되지 않던 100년 전의 시절에도 대성당과 주교관과 신학교를 봉헌할 수 있었다면, 교구장님을 중심으로 사제단과 전 교구민이 뜻을 모은다면 지금의 우리 교구의 역량으로서 대성전을 봉헌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Confide et Labora, 믿고 일하라!’라는 초대 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님의 사목지침으로 교구의 첫 해가 열렸다면,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현재 교구장님의 사목지침으로 새로운 백년의 시간을 열어야겠습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