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의 일이다. 한 번은 사다 키우던 병아리가 추울까봐 이불을 만들어 줘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온 집안을 뒤져 적당한 천을 찾아냈다. 병아리에게 어울릴 만큼의 크기로 잘라내서 덮어 주었건만, 병아리는 야속하게도 얌전히 이불을 덮고 자주지 않았다. 나만 혼이 났다. 그 천은 이불호청이었던 것이다.
또 한 번은 친구네 철공소의 직공이 나무판만 만들어 오면 거기에 쇠로 날을 박아 썰매를 만들어 준다고 해서, ‘A급 썰매’에 어울릴 만한 나무를 찾아 나섰다. 마침내 집 뒤안 한 구석에서 그에 걸맞는 나무를 찾았다. 단단해서 힘들었지만 - 그 어린 나이에 - 열심히 톱질을 해서 A급 썰매의 꿈에 거의 이르렀을 때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 나무는 손님들이 많이 오실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 둔 교자상의 상판이라는 물건이었다.
나는 다만 그 큰 데서 아주 작은 한 귀퉁이만 필요했었는데, 티도 나지 않을, 눈꼽쟁이 만큼일 것이라고 여긴 안일한, 어린 생각 탓에 전체를 못 쓰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어떤 음료수 광고 카피같이 2%가 모자랐는데, 그러나 그 2%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없으면 안 될 것이었다.
모자라는 것은 늘 이렇게 아쉬울 만큼이다. 어떤 일이든 마지막에는 하루가 부족하고, 벼락치기 시험공부를 할 때는 한 시간이 부족하지 않던가? 삶에 남는 아쉬운 부족함이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을 세 단계로 구분하였다. 현세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나 기쁨, 즐거움을 좇는 ‘미적 실존’은 그 쾌락의 도취가 끝난 후의 허망함을 넘어설 ‘윤리적 실존’을 찾고, 한정적인 자신의 의지로 넘어설 수 없음을 절감하는 좌절은 ‘종교적 실존’에로 나아가노라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단독자’로서만이 인간은 본래적인 자기가 된다고 하였다.
하느님 앞에 홀로 서서 나는 무엇을 볼 것인가. 스스로의 모습에서, 관계에서, 늘 아쉬운 부족함을 살아가는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완벽한 일치, 사랑의 완성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삼위로 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찾는다. 과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 16)
사도 바오로는 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고한다.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 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2코린 13,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