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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을 위한 청년사목
내가 만난 나폴리의 한 청년


김종호(요셉)|3대리구 청년담당 신부

5년 6개월의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온 지 이제 3개월 남짓 되어간다. 3대리구 청년담당 신부로 발령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살아가야 할 3대리구가 어디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제 2개월 남짓 살아가면서 같이 일할 수 있는 참신한 청년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무척 감사하게 여겨진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불안한 우리나라의 경제, 사회적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진정한 고민과 아픔들을 그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그들에게 어떻게 참된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지를 함께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한때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나 자신에 대한 회의, 유럽인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에 대한 불만,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황폐해진 마음 안에서 무언가를 갈망하면서도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파리 시내를 바라보면서도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런 나에게 이태리 피렌체 근처 로삐아노라는 곳의 포콜라레 사제학교에서의 짧았던 일 년 동안의 삶은 내게 새로운 전환기가 된 시기인 것 같다.

 

그곳에서 피자를 잘 굽고 요리를 잘 했던, 이태리 나폴리에서 온 한 신학생을 만났다. 일반 대학을 졸업하고, 한 휴대폰 모빌 회사에 취직했는데, 자신이 하는 일이 경찰과의 연계 하에 범인들의 휴대폰 번호를 추적하여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었단다. 기밀이 요구되고, 극도의 긴장감이 요구되는 일자리였지만 그만큼 보수도 좋고, 나름대로 사회에 기여하는 마음에 드는 직장이었다고 한다. 그 시기에 함께 미래를 계획할 수 있었던 여자 친구를 만났고, 그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경찰들이 한 범인의 전화번호를 주며 위치추적을 요구하더란다. 눈에 익은 전화번호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자세히 보았더니 자기 친형의 전화번호더란다. 마약 판매 사업과 연루되어 자기의 형이 추적받는 입장에 놓여 있고, 그 동생이 형을 잡기 위해서 추적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야속하고 미운 마음에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윤리적 양심으로 형을 추적하였고, 형은 결국 철창신세를 졌다고 한다. 집안에 한동안 한파가 일었고, 서로를 용서할 수 없는 마음에 가정이 지옥이더란다. 하느님의 뜻을 물었고, 그분의 사랑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단다. 미래를 계획했던 여자 친구를 볼 면목이 없어 그녀를 떠나 보냈고, 자신을 지금의 상황에 몰아넣은 형을 원망하고, 자신의 직장을 저주했다. 직장을 버리고 몇 달을 그렇게 방황했단다. 그러던 순간 한 신부님을 만났고, 그분께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었단다. 너무나 사랑으로 가득했던 그분의 눈빛에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었고, 결국 자신이 그 자리에서 진정 사랑해야 할 사람이 형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무엇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분이 자신에게 계획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신학교를 들어 왔단다. 신학교 안에서도 그 체제 자체에 대해서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그 믿음이 변치 않았다고 한다. 5학년을 마치고, 자신을 하느님께로 열어주었던 그 신부님의 영성을 배우고 싶어 서품을 받기 전에 일 년 간의 휴학을 하고, 내가 있던 사제학교에 들어왔단다.


그 당시 나는 사제학교에서 부엌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곳은 삶의 노동에서 오는 지혜를 소중히 다루는 곳이라 노동시간이 참 많다. 아침식사와 묵상을 마치고 나면 설거지, 부엌 바닥 청소, 장보기, 간식준비, 우체국 우편물 가져오기 등등 일이 참 많았다.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힘든 것은 무엇보다 서로가 다르기 때문인데, 그것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참 많은 인내와 사랑이 요구된다. 그 신학생과 내가 둘도 없는 소중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하루는 주일 점심식사 메뉴로 스파게티를 준비해야 했는데, 바로 그 신학생이 스스로 나를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국인이라 이태리에서 외국인들을 위한 스파게티를 준비한다는 것은 늘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들의 식성에 맞춘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동양인, 김치와 된장을 좋아하는 한국인이 아닌가? 하지만 그동안 눈동냥으로 봐왔던 방식이 있었고, 또 내가 사제학교를 좀 더 살았던 터라 나는 내 나름대로 주도를 하여 준비를 했다. 먼저 프라이팬에 올리브 기름을 두르고, 양파를 볶고, 고기를 볶고 토마토를 넣어 소스를 준비하고, 파스타는 사람들이 도착하기 15분 전에 끓는 물에 익혀야 했다. 미리 준비하게 되면 불어서 맛을 상실한다. 사람들이 도착하면 그렇게 익힌 파스타에 즉시 소스를 섞어 식탁에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 동안 그 친구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양파를 깎고, 고기를 준비하고, 토마토 소스 통조림을 열어주고, 마치 나의 다른 손발이 된 양 내가 필요한 것을 즉시 즉시 가져다주고, 시간이 나면 사용한 용기를 설거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편하게 일해 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친구가 요리에 관심도 많고, 조예가 깊다는 것이었다. 그 신학생의 그렇게 조용한 봉사 안에서 나는 정말 그 친구가 나를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있음을 느꼈고, 자신이 알고 있는 요리에 대한 모든 지식들을 모두 잃어버린 채 내가 일하고 있는 과정이 전부인 양 그렇게 나를 도와주었던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 날 저녁 고맙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그 신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요셉, 너를 사랑할 수 있어 행복했다.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구체적으로 네 안에 있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너 양파를 너무 많이 넣더라.” 그제서야 나는 우리 중에 양파를 싫어하는 신부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 식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잘 해야겠다는, 내 자존심에 상처가지 않게 그 일을 잘 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었다. 그것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구체적인 나의 가족들을 잊어버렸고, 사랑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걸 잊어 버렸던 것이다.

 

짧지만 크고 작은 다양한 체험들 안에서 나는 점점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예의 그 포근한 사랑을 다시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인생은 결국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의미 아니던가?

 

예수님은 평생을 아버지와 인간을 사랑한 분이셨다. 사랑에 목숨을 건 분이셨다. 그렇게 목숨을 걸었던 분이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가끔 그 신학생 안에서 나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며, 나도 그렇게 예수님처럼 우리 청년들을 사랑하고 싶다. 바쁘고, 각박하기 그지없는 우리 삶 안에서 가끔 무언가를 잃고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 내부 안에 있는 참된 사랑에의 갈망이다. 그 갈망은 우리 인생에서 예수님의 주인공이 될 때만 채워질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청년들의 삶 안에서 그분이 항상 주인이 되기를 기도한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줄 분이시기에…

 

사랑을 믿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