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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차 세계 병자의 날 환우체험수기 공모 당선작 - 우수상
예수님의 초대


김미(아가다)|대전성모병원 호스피스 봉사자

“나 하늘나라 잔치에 초대 받아 가니까 찾지 마라.”

병문안 갔다가 안 계신 할머니를 찾아 헤매던 초등학교 1학년 손녀의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 하신 말씀이다. 어린 조카의 꿈에 나타나시기 며칠 전, 엄마는 정말 예수님의 초대를 받고 하늘나라에 가셨다. 그곳에서 헤어진 지 채 1년도 안 된 아버지와 만나 기쁜 해후를 하셨을 것이다.

지난 해 8월 지리한 장마 끝에 쾌청한 하늘을 보인 날 아버지를 만나러 영천 호국원에 가기로 했다. 막 집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 울먹이며 전화한 사람은 큰올케였다.

“아가씨! 어떡해요. 어머님이 암이래요.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 받아 보래요.”
“엄마는 아세요?”
“아니, 모르세요.”
“알았어요. 진정하고 정밀검사 받도록 하죠.”
‘욕심쟁이 아버지.’ 난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8개월, 혼자가 외로우셔서 엄마를 부르고 계신 것이다. 생전에 늘 엄마와 함께 외출하시길 좋아했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 하늘나라도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미는 것이다.
‘아버지, 많이 외로우세요? 그래서 엄마를 부르시는 거예요? 아버지, 도와주세요. 아버지가 정말로 엄마를 사랑했다면 온전히 낫게 해주시든가 아니면 고통 없이 빨리 데려가 주세요.’

비 갠 8월의 하늘은 내 마음에 이는 슬픔과 안타까움과는 달리 정말 맑고 고요했다.
종합병원에서의 정밀검사 결과는 직장암 4기로 이미 간, 림프관, 골반, 난소 등 주위 장기에 전이가 많이 된 상태였다. 지난 7월, 설사가 오래 멈추지 않아 의사가 대장내시경을 해보라고 했다며 엄마는 “아마 이질일 거야.”라고 말했었다. 엄마를 모시고 있는 오빠 내외는 엄마의 병을 ‘치질’이라고 안심시키고 민간 식이요법을 시작했다. 의사가 “이미 수술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단계를 이미 지났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전화 속의 엄마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덤덤한 목소리로 “글쎄 치질이 수술하기 어렵다고 하는구나. 나이가 많아 위험하다고 의사들이 수술을 꺼려하는 건지 원. 화장실에 자꾸 가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아.”라고 했다.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부터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엄마에게 줄 마지막 선물을 마련해야 했다. 난 매주 목요일 김천행 기차를 탔다. 나의 갑작스런 방문에 엄마는 놀라면서도 무척 반가워 하셨다. 아들 내외가 출근하고 나면 온 종일 홀로 계신 엄마는 사별의 슬픔을 홀로 감내하고 계신 것이다.

“하루종일 뭐하며 보내세요? 심심하시죠? 아버지 보고 싶죠?”
“심심할 시간이 어디 있니? 아침에 일어나면 9일 기도, 삼종기도 등등 …돌아가신 네 아버지랑 너희들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른단다. 혼자 남은 내가 심심할까봐 걱정되서 네 아버지가 대세 받고 가셨나 보다. 처음엔 몹시 보고 싶었는데 이젠 조금씩 나아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주 후 엄마는 스스로 성당을 찾아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으셨다.
첫 고백을 할 때 본당 신부님이 “할머니, 세례 받으신 거 후회 안하세요?” 하고 물으시자 엄마는 “아니요, 이 늦은 나이에 세례 받게 되어 너무 기뻐요. 죽을 때까지 기도하며 하느님 믿으며 살거예요.”라고 하셨단다. 바로 엄마의 신앙고백이었다.

몇 년간의 호스피스 봉사 경험을 살려 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는 암인 줄 모르신 채 그저 배변이 불편하다고 호소하셨다. 난 하느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엄마에게 말씀드렸다. 엄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시며 믿는다고 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오늘까지 엄마의 삶을 함께 반추하며 보고 싶은 사람, 후회되는 일, 용서해야 할 사람은 없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는 세례 받고 난 후 아무런 미움도 여한도 없다고 하셨다.

며느리에게도 “지난 날 내게 서운한 일이 있다면 다 용서해라. 나도 네게 섭섭한 것이 없다. 앞으로는 너를 딸처럼 생각하며 살겠다.”고 말씀하셨단다. 그리고 아버지랑 살면서 귀찮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큰 아버지의 사랑이었는지 지금 와서 깨달았다고 하시며 그리움에 우셨다. 손과 발을 주물러 드리며 ‘결혼 후 엄마랑 이렇게 이야기 나누었던 시간이 없었구나.’ 생각하며 내가 참 무심한 딸이었음에 마음이 아팠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바라보시는 엄마의 그윽한 눈빛과 “네가 와 주어 오늘은 정말 즐거웠다. 고맙구나.”하는 엄마의 사랑이 담긴 목소리에 내 가슴이 펑펑 울고 있었음을 그때 엄마는 아셨을까?

엄마와 둘만의 만남은 세 번으로 끝났다. 혈변을 계속 하신다는 전화가 왔다. 이제 때가 된 것이다. 엄마도 당신의 상태를 알고 삶을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 난 형제들을 설득하여 엄마에게 진실을 알리자고 했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병명을 듣고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말에 엄마는 의외로 담담하셨다.

“그럴 줄 알았어요. 현대 의학에서 치질정도를 수술 못한다니…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저 빈번한 화장실 출입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수술해 주세요. 수술 도중에 죽어도 좋아요.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10~20분 간격으로 변통을 느끼며 지내오신 엄마는 음식을 잘 드시지 못하고 잠을 편히 잘 수도 없는 고통으로 온 몸이 마르고 쇠잔해 있었다. 하지만 7시간의 대수술 끝에 인공항문을 다신 엄마가 이번에는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신장 투석의 힘든 고통이 배변의 고통을 대신하여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수술 후 이틀간 중환자실에 계신 엄마가 말씀하셨다.

“날 다시는 중환자실에 보내지 마라. 춥고, 외롭고 너무나 힘들었다. 다시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심폐 소생술, 인공호흡기도 싫다. 고통 없이 너희랑 함께 편안히 있다 가게만 해다오.”

우리가 곁에 없는 중환자실에서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생각하니 너무 죄송스러워서 나는 펑펑 울며 다시는 엄마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엄마를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드리고 우리는 각각 엄마와 사랑과 화해의 나눔을 했다. 신부님과 수녀님의 방문과 봉사자들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엄마는 받게 되었다. 두 며느리와 나는 교대로 조를 짜 엄마를 간호했다. 큰 올케는 청결에 힘써 온 몸을 매일 정성껏 닦아 드렸다. 둘째 올케는 전신을 주물러 드리며 함께 한 추억을 이야기 했다. 나는 기도와 성가를 들려 드리며 영적 간호에 힘썼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고 힘껏 안아 드렸다. 매일 자비의 기도를 드리며

“엄마, 세상 모든 것을 내려 놓으세요. 오직 예수님 손만 꼭 잡고 계세요.”라고 하면 엄마는 “응.”하고 대답하셨다.
“두려운 것이 있으세요?” “아니.”
“보고 싶은 사람은요?” “없어.”
“지금 엄마를 제일 힘들게 하는 것은 뭐예요?”
“그저 숨이 차다는 생각밖에…”
나는 나름대로 엄마의 삶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영생의 희망을 가지라고 말씀드렸다. 그때마다 엄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어느날 사업을 하고 있어서 엄마가 제일 걱정하는 막내 동생이 왔다.
“엄마, 새 일거리를 계약했어요. 올 1년 동안은 걱정 없어요. 그러니 이제 내 걱정은 마세요.”
“응.”
고개를 끄덕이신 엄마는 이제 더 들을 말이 없으시다는 듯 의식을 잃으셨다.

우리 사남매는 무의식 상태인 엄마 곁에 이틀 밤을 새우며 함께 했다. 엄마와의 추억을 이야기 하고 기도와 성가를 부르며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랑을 느꼈고 행복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엄마도 아셨으리라 생각한다. 임종을 지키며 울음 대신 기도와 성가로 엄마와 작별을 나눈 우리는 엄마가 아버지와의 기쁜 만남을 위해 떠나셨다고 믿는다. 우리는 끝까지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엄마는 마지막 선물로 고통없이 평화롭게 가시는 당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동안 많이 고통스러우셨을 텐데도 우리가 당신께 받은 사랑을 되돌려 드릴 수 있는 한 달이란 소중한 시간을 기다려 주셨다.

죽음까지도 자식을 위한 사랑의 시간으로 채워 주신 엄마는 이제 예수님이 차려 주신 잔치상에서 아버지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실 것을 믿는다.
저희들도 당신이 주신 사랑을 서로 나누며 언제까지나 두 분을 기억할게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많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