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복음 묵상을 시작하며
‘책들의 책인 성서’(73권의 책들이 하나의 성서를 이룬다는 말), 그 안에는 ‘신학들의 신학’이 담겨있고, ‘영성들의 영성’이 숨어 있다. 그래서 ‘성서 전체의 빛’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서 읽기와 묵상(거룩한 독서)은 언제나 존중받는다.
6월의 묵상들은 의도하지 않았으나 너무나 자연스레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을 시작으로(9주일), ‘그분의 뜻’은 ‘사랑과 자비’로 연결됨(9.10주일)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들의 파견’에서 발견하며(11주일), 얼마나 크나큰 신뢰와 애정으로 그분은 제자들을 파견하셨는지 아울러 보게 된다.(12주일) 끝으로 우리는 파견된 제자들의 모범을 ‘베드로와 바오로’를 통해 묵상하며 우리의 ‘제자 됨’을 되돌아보게 된다. 많은 이들이 ‘말씀 안에서’ ‘삶과 신앙의 새로움을 발견하기를’, 그리고 그 발견에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6월의 묵상을 시작한다.
6월 1일 연중 제9주일 : 마태 7,21-27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 사제이든, 수도자이든, 평신도이든 - 세례로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에 초대 받는다. 바로 하느님을 섬기고(사제직), 하느님을 알리고(예언직), 하느님께 봉사하는(왕직) 직무이다. 특별히 이는 성품성사를 통해 서품된 사제들에겐 일생일대의 과업이다. 비록 인간적인 결함이 보인다 하더라도, 그 직무 때문에 신자들은 ‘사제를 사제로서’ 끝까지 바라보려 하고, 사제 역시 그 직무에 목매고(?) 살아가려 노력한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 거룩한 직무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를 일깨워 주신다. 바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21절)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주님, 주님 이름을 부른다.’고(사제직),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예언직),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고 기적을 행한다 해도(왕직),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면, ‘하늘나라’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으로’ 했다는 모든 ‘일들’이 ‘불법’이요 ‘악행’(200주년 번역)이 될 뿐이다. 참으로 매몰찬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이라 여기며 노력하는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아무것도 아니요(無)’ 나아가 ‘악행이요 불법’이 될 수 있다니….
도대체 그러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마태오 복음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뜻’은 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6, 10; 7, 21; 12,50; 18,14; 26,42 참조)으로 표현 되는데,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그 ‘뜻’은 의심할 여지없이 ‘율법’과 연결되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는 ‘불법(anomie)’을 행하는 자라 예수님께 선언(23절) 되는 것이다. 율법과 연결하여 볼 때 우리는 쉬이 ‘아버지의 뜻’을 이해 할 수 있다. 바로 그분이 가르쳐 주셨듯이, 모든 율법 중의 으뜸과 그 정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22,34-40)에 달려 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의 관건은 ‘사랑’이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은 사랑이 모든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곳, 세상의 마지막 날에는 ‘불법이 성하여 많은 이의 사랑이 식어 갈 것이다.’(24,12)라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랑이 없는 기도는 공허하고, 사랑이 없는 봉사는 메마르며, 사랑이 없는 가르침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랑 없이 살아가는가? 율법은 그 본연의 의미에서 유다인들을 얽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자유를 맘껏 누리기 위한 도구였다. 그렇듯이, 그분이 요구하는 ‘법 중의 법’ ‘계명 중의 계명’인 ‘사랑’ 역시 우리를 얽매는 또 하나의 족쇄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그분의 초대라 할 수 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초대’라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다시금 고쳐먹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바로 ‘사랑의 계명’은 내가 무조건 해내야 하는 과업이기 이전에 그분의 ‘초대’요 그분의 ‘사랑’이 먼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먼저”, “나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나에 대한 수많은 이웃들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고 깨달을 때, ‘나의 사랑’은 더욱 풍요롭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에 대한 사랑을 먼저 깨닫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첫걸음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필자 같은) 사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직무’라기 보다는 ‘사랑’이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사랑이신 주님, ‘사랑’ 만이 이 세상 그 어떤 풍랑과 홍수에도 무너지지 않을 ‘반석’(24-25절 참조)임을 깨닫나이다. 무뎌버린 저희의 마음에 불길 같은 당신 성령을 내리시어 사랑으로 다시 채워 주시고, 그 사랑 안에서 당신 ‘성심’을 발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하는 모든 직무에 당신 ‘사랑의 마음’을 합해 주소서.
6월 8일 연중 제10주일 : 마태 9,9-13
9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아버지의 뜻’에 누구보다 철저히 순종한 이는 예수님이셨다. :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26, 42)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6,10) 죽기까지 순종하시는데 그 목표가 있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그분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셨는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 하나 ‘아버지의 뜻’을 읽을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은 ‘먼저 부르시는 분’(9절)이며, ‘세리와 죄인들과도 자리를 함께 하시는 분’(10절)으로서, 당당히 ‘죄인들의 친구요 앓는 이들의 의사’가 되기로 자청하신 분이시다.(12-13절 참조) 이는 바로 당신 말씀처럼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13절)라는 아버지의 뜻에 부합하는 것, 바로 아버지의 뜻은 ‘자비’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신부가 되고 싶냐고 누가 물으면, ‘착한 신부’ ‘부드러운 신부’가 되겠다고 종종 대답하던 신학생 시절이 떠오른다. 신부가 된 지 10여 년이 다 된 지금 ‘그분의 자비’가 온 몸과 마음으로 체득되어(복음화) 그런 신부라 자부하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빠진다, 도대체 교회정신 기본신앙의 개념조차 없는 이들은 두 번 만나기조차 꺼려진다, 누군가 절실히 나를 필요로 함을 알면서도 내 삶조차 추스리기 힘들다고 눈감아 버린다, 마음속의 미움과 오해로 멀어진 누군가에겐 전화번호 누를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착한 신부보단 교회에 더 필요한 (능력 있는) 신부가 되는 것이 더….
이런 나에게,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은 ‘자비’에 있음을 오늘 복음은 다시금 깨우쳐주신다. 인간은 결코 그 스스로의 업적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내리신 ‘은총인 자비’로 구원 되었고,(에페 2,4; 티토 3,5 참조) 또한 구원되리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리고 이제 그 자비는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는 요청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성경에서 자비라는 단어(hesed : eleos)는 현대어로 사랑, 은총, 연민의 정, 동정심, 너그러움, 선(善)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한다면 친절, 미소, 기다림 등과도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어떻게 자비로이 살아갈 수 있는가, 이는 평생 그분의 뜻을 찾고 따르는 우리들의 숙제이리라. 오늘 예수님처럼, 그가 누구이든 (세리이든, 죄인이든, 바리사이이든) 함께 자리에 앉으시고 식사를 하시고 대화를 하신 그 모범은 자비심 발로(發露)의 시작이리라.
주님, 당신 앞에서 언제나 저희는 ‘죄인’이요, 의사가 필요한 ‘앓는 자’ 임을 고백하나이다. 그런 저희가 감히 타인에게 의인이요 의사라 내세우며 자만하지 않게 하소서.
6월 15일 연중 제11주일 : 마태 9,36-10,8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36절)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이다. 바로 앞 구절(35절)에서 그분은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고쳐 주신다. 7장까지의 ‘산상설교’가 끝나고 마태오 복음 8-9장 안에서 그분은 ‘열 가지 기적’을 행하시며 종횡무진 활동하신다. 그럼에도 그분은 목이 마르시다. 끊임없이 ‘인간에 대한 연민’, ‘자비심’을 잃지 않으신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인 ‘하느님의 자비’를 몸소 실천하셨는가? 우리는 그 모범을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아주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세 단계 ‘자비 실행’의 과정이 눈에 띈다. 먼저 그분은 ‘가엾은 마음’, 측은지심을 가지셨다.(36절) 하지만 그분은 그저 ‘불쌍하다’ ‘안 됐다’하시며 ‘마음속의 연민’에만 머물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이 두 번째 단계로 하신 일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요청’ 하시는 것이었다.(37-38절) ‘아버지’와 가장 내밀한 관계이신 그분의 기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분은 당신 혼자의 기도에만 머물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는 세 번째 단계로 협조자(열두 제자)들을 뽑으시고 당신을 대신해서 일하도록 파견하신다.(10,1-8)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아주 눈에 띄는 그분 ‘자비 실행’의 방식이다. 바로 그분은 혼자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일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그냥이 아니라 당신의 고유한 권한(10,1.7 : 구마와 치유, 말씀선포)을 모두 제자들에게 주시며 파견하신다. 이제 제자들은 또 다른 그분이 되어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자비 실현’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목자 없는 양’으로 표현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인간 군상들! 대부분의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사는지 제대로 되돌아 볼 겨를도 없이 삶에 허덕이며 살고 있다. 목표를 잃어버린 우리에겐 하루하루의 견뎌냄 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눈은 혀를 차게 하는 ‘사건들’과 ‘사람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바로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버지의 뜻’인 ‘자비 실현’이 요구되는 때이다. 하지만 그 자비는 ‘마음속의 연민’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측은지심 - 기도 - 함께 일하기”로 연결되는 그분의 ‘자비실행’ 과정은 그래서 우리 개인과 교회의 여러 활동에 기본 지침을 제공한다 하겠다.
어떤 기도 : “그리스도는 손이 없으십니다. / 그리스도는 발이 없으십니다. / 그리스도는 입이 없으십니다. / 당신의 일을 할 손, 당신 길로 인도할 발, 당신을 알릴 입 / 그분께는 손과 발과 입이 없으십니다. / 오직 우리의 손과 발과 입을 가지고 계실 뿐.”
6월 22일 연중 제12주일 : 마태 10,26-33
26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공유하는 목표가 있는가?’ 그리고 그 목표를 따르는 ‘추종자가 있는가?’를 ‘지도자(리더)’ 정의의 필수요건이라 했던가!(게리윌스, 시대를 움직인 16인의 리더, p.26 참조)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리더 중의 리더, ‘완벽한 리더십의 실현자’ 이셨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라는 확실한 목표아래 제자들의 자발적인 추종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이 당신의 추종자(제자들)에게 제시하신 구체적인 목표는 ‘구원’(10,23)이나, 그분을 따르는 길이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님을 또한 제시하신다. 바로 ‘박해를 각오하라.’(10,16-23) 하시듯, 그분을 따르는 길은 무엇보다 ‘십자가의 길’(10,38)이다.
누가 과연 이런 길을 가려 하겠는가, 누가 과연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데 ‘제 목숨까지 내어놓고’(10,39 참조) 동참하겠는가. 설령 그 길을 간다 해도 얼마나 견디겠는가. 여기서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확실한 ‘신뢰와 애정’을 약속하시며 (지금 박해를 받고 있는, 미래에 박해를 받을) 모든 제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신다. 세 가지 면에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그분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첫째,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28절ㄱ)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 했던가?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양면성’을 본다. 복음 선포의 대상도 사람이나 복음 선포의 가장 큰 적도 역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 왜냐면 너희가 두려워 할 분은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28절ㄴ)이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앞뒤 문맥상 무서운 경고라기 보다는 아버지 하느님은 너희가 두려워하는 그 어떤 대상보다도 더 크신 분, ‘그분이 너희를 지켜 주리라.’는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너희는 그분이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30절)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한’(31절)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이기에, 셋째,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10,20)이시기에, ‘두려워 말고 복음을 선포하며 나를 증언하라!’(26-27절; 32-33절 참조) 명하신다. “하느님의 보호, 파견자로서의 (소중한) 존재에 대한 자각, 협조자 영”, 이 세 가지에 대한 굳은 믿음은 지금 박해의 위협에 맞닥뜨린 마태오 공동체에 그러했듯, 박해에 놓인 수많은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끝까지 견디게’(10,22 참조)하는 힘이 되었다.
사람을 두려워 마라,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셨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갑자기 분심이 든다. 많은 이들이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는다. 그런데 소위 반(反)가톨릭적인 신심으로 공동체를 큰 혼란에 빠지게 하고도, 교도권으로부터 박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떻게 들릴까? 또는 세상살이의 실패와 고됨을 사람들의 박해라 여기는 이들에게는?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병과 무고한 이들의 죽음에 맞닥뜨려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외치는 이들에게는?
우리는 오늘 예수님은 과연 누구에게 하신 이 말씀들을 하시는지 다시금 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제자들이다. 파견된 제자들이다. 더 정확히 말해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된 제자들’, ‘그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을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들이다. 오늘 복음에서 찾아본다면, ‘선포’(27절)와 ‘증언’(32절) 때문에 박해를 받을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들이다.
바로 이 말씀의 수혜자가 되려면, 첫째 ‘그분의 제자’이어야 한다. 둘째, 세상사 때문에가 아니라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아야’ 한다. 셋째, 온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증언’에 투신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쉬이 ‘자신의 처지에 대한 위안’ 내지는 ‘하느님에 대한 공격’으로 이 말씀들을 사용해서는 안 되리라 믿는다.
주님, 누군가 ‘두려워하지 마라.’는 당신의 말씀이 성경에 365번이나 나온다 하더군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나날이, 매일이 당신의 보호 속에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 그 말에 들어 있다고 봅니다. 저희가 무조건적인 ‘당신의 보호’를 바라기 이전에, 스스로 ‘복음 선포와 증언’에 온전히 투신하고 있느냐 하는 자신의 ‘제자 됨’을 먼저 되돌아보게 하소서.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 마태 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역사의 예수’와 ‘믿음의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숙고는 신약성서 연구의 오랜 그리고 계속되는 주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수가 동의하듯, 신약성서의 언어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 전 전승과 부활 후 초대교회의 믿음과 선포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역사의 예수’와 ‘믿음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믿음’은 신약성서의 언어 안에서 고스란히 함께 녹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한 예를 오늘 베드로의 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사도 4,13)으로 대변되던 그의 입에서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라는 놀라운 고백이 튀어 나온다.(분심 : 새 번역에 ‘스승님은…’이라 나오는데, 원어에서 스승이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다. 불필요한 호칭 첨가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복음의 바로 다음 단락(16,21-23절)에서 베드로는 ‘사탄’이요 ‘걸림돌’이라 질책 받으며,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못난이 제자로 그려진다. 또한 예수님의 체포 후 ‘세 번이나 그분을 모른다고 한’ 그의 배반(26,69-75)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이런 고백이 튀어 나오다니.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마디로 우리는 복음에 표현된 베드로라는 한 인물에게서 ‘부활 이전’과 ‘부활 이후’의 ‘삶과 믿음’을 완전히 분리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생전에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이와 똑같은 고백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어떤 모양이든 베드로가 예수님의 생전 그 누구보다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애정을 표현했을 것이고, 이는 ‘부활 후’ 그의 변화된 놀라운 ‘삶과 복음 선포’안에서 온전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마태오는 그의 복음 말미에 백부장의 입을 통해 예수께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27,54)이라 고백하게 한다.
그렇듯이 마태오는 ‘교회의 반석’이요 ‘제자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입을 통해 예수께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초대 교회의 믿음을 고백하며 선포하고 있다 하겠다. 그리고 이제 이 고백은 베드로의 입만이 아니라 그의 복음을 듣는 우리 모두의 입을 통해 ‘다시 선포’되어야 하고, 초대교회의 믿음만이 아니라 온전히 우리들의 믿음으로 ‘다시 증거’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처음으로 고백한 베드로 사도여, 저희를 위해 빌어 주소서. 부활한 예수님과의 만남(사도 9장)으로 박해자에서 주님의 사도로 온전히 변화한 바오로여, 저희를 위해 빌어 주소서. 특별히 모든 사제들을 위해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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