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서품을 앞두면 새 사제들은 앞으로의 사제로서의 삶을 비추어 나갈 성경구절을 찾는다. 성경의 어느 말씀이나 소중하긴 마찬가지이지만, 각자의 역사나 환경 속에서 더욱 가슴에 새겨온 구절들을 택한다. 여러 여건으로 부족과 염려가 많았던 내게는 ‘채워짐’을 약속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편 23편이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뉘어주시고 … 내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외다.”(시편 23, 1. 5) *(최민순역)
어디 그뿐인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오신 목적을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가득) 넘치게 하려고 왔다.”고 하셨고,(요한 10, 10)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술이 떨어졌을 때에는 “여섯 항아리에 가득 채운 물”을 향기롭고 “좋은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다.(요한 2, 10)
“넘치도록 가득한” 충만은 채워짐에 대한 희망이자, 그분의 약속이고, 그분께로 나아가려는 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충만에로의 희망은 우리의 모습을 곧게 세우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최근 어느 지인의 서재에서 계영배(戒盈杯)라는 의미심장한 잔을 본 적이 있다. 계영배란 경계할 계(戒), 찰 영(盈), 잔 배(杯), 곧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이다. 잔의 70% 미만으로 술을 따르면 전혀 새지 않지만, 70% 이상으로 채우면 담긴 것 모두가 새어나가게 되어 있는 신기한 잔이다. 굳이 과학적으로 그 원리를 설명하자면, 잔 밑에 구멍이 관으로 뚫려있고 사이펀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공자가 주(周)나라 환공(桓公)의 사당에서, 생전의 환공이 늘 곁에 두고 보면서 스스로의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그릇을 보고 본받아 자신도 그러했다고 전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진상품 설백자기(雪白磁器)를 만들었던 우명옥이라는 인물이, 유명한 도공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이후 번 재산을 방탕한 삶으로 탕진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고 이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 잔을 나중에 의주 거상 임상옥이 소유하여 과욕을 다스렸다고 한다.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하여, 넘치면 곧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음을 일깨우는 그릇이다.
부족한 잔을 채울 충만에의 희망은 아름다운 것이나, 그 채움을 경계하는 것은 또한 현명한 것이다. 이는 모순된 것일까? 다만 채워짐에 대한 기다림과 채우고 싶은 욕심의 차이일 것이다. 기다리고 희망하며 채워져야 할 것이 나의 욕심으로 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칫 채우고 싶은 욕심 앞에서는, 채워짐에 대한 긴 기다림이 허망하게 그 빛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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