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3년 전 초여름의 그날, 저는 천혜의 깨끗한 그곳, 울릉도를 떠나왔습니다. 아마도 길을 떠날 때 차를 타고 떠나는 것과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것 그리고 배를 타고 떠나는 것, 그 느낌들이 다들 다를 겁니다. 저는 그 떠남의 느낌 중에도 가장 진한 느낌은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번도 어딘가를 떠나오거나 누군가를 배웅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찡해 본 적이 없었는데 울릉도에서는 그러했으니까요.
울릉도 도동항에서 배가 떠나면 항구를 벗어나서 섬을 어느 정도 돌아서 남서방향인 육지로 향해 갑니다. 어쩌다 아들 신부가 있는 섬에 오셨다가 어머니가 떠나시던 그날, 저는 배가 떠나자마자 차를 타고 다시 배가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서 그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느낌으로 새벽 5시가 약간 넘은 시간 배에 올랐더랬습니다. 제가 살았었던 천부에서는 도동항까지 1시간 거리이니 새벽 4시에 나온 셈이지요. 여명이 밝아오는 어슴푸레한 새벽, 육지로 배가 유유히 움직였습니다. 저의 시선은 점처럼 차차 사라져가는 그 섬에 고정되어 있었구요.
6시간의 항해 후에 도착한 생경한 포항선착장, 그곳에서 저는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가족들과도 같은 교우들을 만났습니다. 무더운 초여름이었고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던 한 섬사람이 바로 배에서 내렸던 것입니다. 어디에다 숙소를 마련해야 할지도 몰랐고 더위와 매연, 소음에 적응 못해 전전긍긍했던 완전 시골뜨기였던 셈이지요. 하지만 마음속에는 자신감이 든든했더랬습니다. 무엇인가를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었습니다.
증명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울릉도 천부에서 오장육부 깊은 곳에 스며들어 있었던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그것이었습니다. 저의 발걸음 발걸음에 하느님께서 그리 멀리 계시지 않으신다는 신뢰가 그것이었고, 그 말씀이 저를 살찌우신다는 존경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라면 세상의 어떤 장벽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는 앞으로 헤쳐가야 할 그 길이 참으로 막막해 보이기는 했었습니다. 교우들도 몇 분 되지 않으셨고 시간 나면 기도할 줄 아는 분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니 기우였지만 말입니다.
젊은 신부가 무슨 생각이 그리 깊을까마는 나름대로 생각들을 정리해 나가고 계획들을 세워 봤습니다. 여러 동료 신부님들께도 의견을 청해 들었고 교우들의 생각도 들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교우들의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모여 있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당이 신설성당이니 당연히 교우들이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성당이 필요한 것은 알지만, 그것보다 더 우선시 되어야 할 문제는 정말 기도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과의 만남의 공간을 간절히 신앙 안에서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마음이 없다면 만들어 나가야 되는 것이고 또 그런 마음이 있다면 더욱더 하느님 안에서 그런 마음들을 키워나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그 마음들을 알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첫해 11월에 접어들어서 왜관 연화리 피정의 집에서 피정을 연수와 겸해서 참석가능한 모든 교우들이 모여서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의외의 열정과 성전을 향한 간절한 마음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일정 중에 한분 한분의 발을 붙잡고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아주 깊고 따뜻하게 포옹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참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 느낌 같은 거 있지 않습니까? 백 마디 말보다 스쳐지나가는 눈빛 하나와 포옹 하나가 모든 것을 다 드러내는 것 말입니다.
참으로 깊이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참으로 깊이 저를 받아들여주시는구나, 이런 느낌들이었습니다. 이런 느낌들을 가지고도 힘을 얻지 못한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테지요? 그때 마음을 먹었습니다. 성전을 세워야겠다는 마음을 말입니다. 현실적으로는 한없는 난관과 좌절이 때론 뒤따를 수도 있겠지만, 그 어려움들이 저 혼자서만 지고 가는 짐이 아니라는 든든함이 또한 그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이렇게 소중함을, 하느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만드셨음을 새삼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시작했습니다. 성전건립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말입니다. 작은 힘이지만 하느님께 간절히 청할 때 사랑의 하느님께서 저희들과 반드시, 정말 반드시 함께 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2002년 대림이 시작되면서 저희의 기도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셈이지요. 그리고 제가 가진 것을 다 드러내고 털어내었습니다. 한 푼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하긴 20만 원은 남겨두었으니 한 푼도 빠짐없다는 말은 조금 과장이네요. 어찌되었던 그동안 모여 있었던 돈을 거의 털어내고 시작했습니다.
다산이라는 시골 같은 동네에서 사시는 분들이 그리 형편이 넉넉하지 못함을 잘 알기에 일괄적으로 얼마씩 내어달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성전 건축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머나먼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던 셈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원칙을 세워나갔습니다. 조립식으로 성당을 짓고 난 후 훗날 다시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교우들에게 못할 일이라는 점과 성당의 공간 중에서 반드시 성전은 교우들이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1층에 위치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성전은 따뜻해야 한다는 점들이 그런 원칙들이었습니다. 그 외 다른 몇 가지 나름의 원칙들이 있었지만 다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원칙들을 가지고 성전을 세우는 계획들을 짜는데 역시 열악한 본당의 환경에선 저희 힘만으로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성당을 방문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 성전이 우리만의 성전이 아니듯이, 타 본당 교우들도 당신들 성전을 짓는 것처럼 마음을 모아 줄 것이라는 희망을 지니고 말입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요? 차츰 길이 보였습니다.
어느 성당을 찾아가서 미사를 드리고 강론을 통해 도움을 청한다 하더라도 진실과 품위는 갖추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진실과 품위를 저희 교우들에게 갖추어 주셨고 그래서 저희들의 호소가 정중하게 들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도움을 주시고 난 뒤에도 만의 하나 마음이 상해서는 안 되겠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같은 하느님의 형제이고 자매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진심을 담지 않은 말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진심을 담지 않은 인사와 행동도 역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진실과 품위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우리 다산 성당을 위해서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이 그리고 저희 교우들이 두고두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렇게 저희들의 여정은 시작되었습니다. 2003년 5월입니다. 저의 친정본당인 복자성당부터 시작했습니다. 조금은 이기적일지 모르지만 제가 우선은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속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제가 이제 하고자 하는 일은 당신의 일입니다. 저에게 나약함과 부끄러움을 치워 없애주소서!”
2004년 연말까지…. 더 이상은 저도 그리고 저희 교우들도 소진될 뿐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한을 그리 잡았습니다. 제가 다른 성당에 나가서 모금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본당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최소한 한 달에 두 번이상은 본당에서 주일미사를 드리고 교우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도 나름의 소신이기도 했습니다. 지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저희 교우들도 또 어느 성당을 방문하든지 먼저 성전에서 기도하고 마치고 나서도 반드시 성전에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함도 지키고자 애를 쓰셨습니다. 그렇게 방문한 성당이 31개 본당이었습니다. 10,000명에 버금가는 교우들이 우리 다산 성당을 위해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 같은 일이 차츰 이루어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들이 하느님 안에서 기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나로 일치되어 있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도 힘든 과정이었고 때론 심리적으로도 강한 압박을 느꼈지만 우리 성당 할머니들이 그리고 교우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기도로 함께 해주고 계시다는 그 유대, 그것이 힘이었습니다. 때론 힘이 들 때 과연 그러할까, 라고 회의를 가져보기도 했었지만 역시 그것도 저의 얇은 걱정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교우들에게서 보았습니다. 성전이 올라갈 때 그 경이로움과 감사의 마음을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성전을 다 짓고 난 뒤 매일 미사를 드리면서 우리 교우들이 가지는 그 행복함과 평화로움을 말입니다. 그것이 고스란히 저에게 전해져 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확산임을 잘 압니다. 그 사랑이 이제는 그 사랑을 모르는 분들에게도 전해질 것으로 믿습니다. 어떤 운동(action)보다도 진심은 진심으로 통하는 법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5월 1일 우리는 이 성전을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벽돌은 저희들이 올렸지만 그 집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어머니 품에 안긴 젖먹이처럼 이 성전 품에 들어선 이들이 따뜻하고 온화하게 하느님과 함께 머물 수 있을 테지요. 하느님 당신의 성전이 굳건하게 서 있는 한 이 성전에 머무는 모든 분들도 하느님의 사람으로 굳건히 서 계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에게 이런 따뜻한 가족들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분들이 바로 저의 가족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함께 하시고 평화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약점으로 가득 차 있는 한 사제이지만, 힘을 잃지 않도록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 다산성당에 힘을 보태주신 그 많은 분들을 보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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