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달 복음묵상은 박순자 선생님과 안영주 선생님께서 써주셨습니다.
7월 6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 마태 10,17-22 박해를 각오하여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1. 관찰
오늘 복음은 제자들에게 이르시는 예수님 말씀으로만 되어 있다. 크게 요약해 보면 세 가지다. 곧 제자들 편에서 해야 할 일(예수님 명령)과 겪을 일(제자들에게 닥칠 일)과 이 결과로 이루어지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약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네 가지 해야 할 일
①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절) 그전에 16절에서 “뱀처럼 슬기롭고(신중하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라는 명령이 먼저 있다.
② 걱정하지 마라. :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19절)
③ 끝까지 견디라. :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1절) 이 부분에서는 ‘견디다’라는 동사의 의미가 참다 보다는 지속하다와 더 관계있다. 곧 고을에서 고을로 피해 달아나며 오래 버티는 것의 문제다.
④ 피하여라. :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23절)
겪어야 할 일(닥칠 일)
- 육체적 박해 :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 할 것이다.”(19절)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19절)
- 측근들의 박해 :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 정신적 박해 :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이루어질 일
- 증언 :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19절) 이것은 이루어질 일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며(19절), 말씀하시는 이가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기 때문이다.(20절)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는 것은 자신들이 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것과 모든 각본을 자신들이 짠다는 것을 전제할 것이다. 증인에 대한 박해가 증인들을 침묵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의회와 세상 앞에서(총독들과 임금들 앞에서) 증언하는 섭리의 기회가 될 것이다.
- 구원 :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3절)
- 확산되는 복음 전파와 사람의 아들이 오심 :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23절)
23절의 이 말씀은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1) 첫 번째는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박해 중지와 연결한다. 이것은 역사를 참조한 해석인데, 1971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일치시킨다. 그러나 보이는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유다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승리로 해석한다.
두 번째 개념은 사람의 아들이 박해 동안에 온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고을에서 고을로 도는 것과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 이것은 달리 말해 하느님 왕국을 선포하기 위해 옮겨 다니면서, 사람의 아들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곧 23절의 말씀이 이렇게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맞으면서 고을에서 고을로 피하여라. 어쨌든 이 두 해석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확장되는 복음 전파다.
2. 묵상
① ‘나’ 때문에 박해를 받고 ‘내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 곧 박해를 받고, 미움을 받는 것은 ‘나 때문’, 곧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까 한다.
우리가 전도하려 할 때(특히 측근들에게), 예수님 이름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내가 미움 받고 배척당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예수인 ‘나 때문에’ 그리고 예수라는 ‘내 이름 때문에’가 특히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증언하게 되는 경우와 모든 사람에게 미움 받는 경우에 강조된다. 여기서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예수님이 아닌,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제자나 독자 개인인 ‘나 때문’이라면, 내가 달라져야 할 것이며, 그것이 나한테 있지 않고 예수님 때문이라면, 다시 말해 예수님으로 인해 내가 견디고 사랑하고 참아준다면, 초초해 하거나 화를 내거나 미워할 일이 아니라, 내가 한 일을 내세우지 말고 때를 기다리며 말씀에 성실하면 될 것이다. 각본을 짜가며 내 언변으로 설득시키려 하지 말고.
②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잘 된다고 해서 하느님의 뜻이며, 안 된다고 해서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얘기도 될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그 열매들이 어떤지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용어로 말하자면 성령의 열매인지 아닌지?(“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
박해받아 이 고을 저 고을로 쫓겨 다니면서 전파의 범위가 넓어졌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아졌다. 전하는 이들 안에,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실 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오시게 된 것이다. 이를 보면서, 경험하면서 전파하는 이는 더욱 힘을 얻게 된다. 더 힘찬 증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피해서 이 마을에서 나와 다른 마을로 피해 달아나라고 하신다. 이는 곧, 피하여 달아나되 산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다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되 조심하라는 얘기다. 신중하라는 얘기다. 신중하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내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삼가라는 것이 아닐까?
“뱀처럼 슬기로워라.”(원문의 동사는 ‘신중하여라’의 의미가 강함)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이는 솔직 단순함의 의미가 강함)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6절)
나에게 확실한 믿음이 있을 때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 안에서 분명 성령께서 작용하실 테니까. 내가 전파의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게 믿음이 확실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성령께서는 믿는 이의 마음 안에서 작용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마음이 문제일 것이다. 믿음이란 내가 믿음으로써 더욱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 않은가?
1) 참조 : J.CAlloud, F.Genuut의 요한복음
7월 13일 연중 제15주일 : 마태 13,1-23 씨 뿌리는 사람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중략)
1. 관찰
<1-3절>
말씀의 씨 뿌리기와 관련된 필수적인 세 요소들이 있다. 말씀의 씨를 뿌리러 나오신 예수님(씨 뿌리는 사람), 다양한 말씀(넉넉한 씨앗 : “…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청중(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는 다양한 밭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특히 오늘 복음에서는 말씀의 씨앗을 받는 밭(토양)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네 가지 밭(토양)이 얘기되고 있다. 그 네 종류의 밭과 그에 따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 밭은 곧 마음(의 밭)을 비유한 것이다. 좀 더 뒤에 가서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더 구체적으로 강조하신다.(18-23절)
<4-9절과 18-23절의 연결 - 네 종류의 밭과 그에 따른 효과>
이 두 부분을 연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① 길가에 뿌려진 것 - 이해하지 못하고 듣는 것, 왜냐하면 악한 자(새)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② 돌밭에 뿌려진 것 - 듣지만 피상적이라 오래 가지 못한다. 항구하지 못하다. 곧 한순간에 그치는 사람,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곧 걸려 넘어진다.
③ 돌밭에 뿌려진 것 -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불모로 만들어 버린다.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④ 좋은 땅에 뿌려진 것 - 듣고 이해하며, 어떤 사람은 100배, 60배, 30배 열매를 낸다.
그런데 앞의 세 경우에서 우리는 어떤 발전의 양상을 볼 수 있다.1) ① 겨우 마음속에 뿌려져서 빼앗기며, ② 뿌리는 내리지만 말라버린다. ③ 말씀이 확장되지만 무르익지 못한다. 다만 ④ 에서만 말씀이 열매를 낸다. 그러나 각 경우에, 장애가 있는 이의 편에서 필요한 준비 자세가 지적된다.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마음이 있어야하고, 둘째, 시간이나 겪게 되는 사건들(역사)이 있어야 하며, 셋째, 말씀을 깨달아야 하고 더 좋아해야 된다. 마지막으로 말씀이 스스로 (말씀 자체가) 활동하도록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해 없이 받아들이는 것’에서 ‘받아들여 이해하는 것’으로의 발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발전의 끝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합당한 밭이 준비되어야 하는데, 이 준비 단계를 위해 얘기하신 것이 10-17절까지의 말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0-17절 :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 마음 밭에 장애를 만드는 병에 대한 진단>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이 비유에 대한 설명 사이에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있다. 이 이유에 대한 설명과 비유 설명을 비교하며 읽어볼까 한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13절) :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보는 것 듣는 것이 눈과 귀의 표면만 스치지 망막과 귀 저 안쪽 마음에까지 닿지 않는다. 마음에 닿았다고 하나 마음이 딱딱하여 열려 있지 않으면 마음 안을 울리지 않는다. 반향이 없으니 깨달을 수 없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15절) : 마음 밭에 말씀의 씨가 떨어졌으나 표면이 차단되어 있어 들어갈 틈이 없고, 돌들이 밭을 차지하고 있으니 뿌리 내릴 곳이 없다. 뿌리를 내리게 하려면 흙의 면적을 넓혀야 한다. 그러자면 돌들을 집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말씀을 받기 전에 돌들부터 집어내어 밭을 고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씨가 떨어져 싹이 트긴 했으나 세상 걱정, 재물의 유혹인 가시덤불이 말씀의 씨앗보다 더 자라 말씀의 씨가 자랄 수 없다. 곧 말들을 따르기보다 세상 걱정 재물의 유혹에 더 마음이 쏠리기 때문이다.
말씀의 씨앗이 자라기 위해서는 이것들보다 더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맛들이며 더 좋아해야 한다. 곧 말씀의 해바라기가 되어야 한다.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서는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깨닫고 돌아오려면 바로 돌을 치우는 작업, 세상의 것들에서 말씀이 일러주는 것들로 마음을 돌려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자면 포기해야 하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세상의 즐거운 것들, 세상의 가치 있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깨닫고 돌아가 치유받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이 작업들이 하기 싫은 것이다. 이것들에 대한 애착을 놓을 수 없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기에 들어도 못들은 척 보아도 못 본 척 하고 싶은 것이다.(참고.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 15절) 바로 이러한 상태를 10-15절까지의 말씀이 일러주는 것일 것이다. 곧 우리 마음속에 있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말씀을 받아들여도 이해하지 못하는 장애가 되는 병의 원인을 진단하는 말씀일 것이다. 예언의 말씀이 비유처럼 병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의식하지 못하는 만큼, 그는 위험하다. 이러한 환자에게 의사가 하는 첫 번째 일은, 그가 보지 못하는 환부를 그가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을 덜어내고 내가 방향을 바꾸어 잡초들을 하나씩 덜어내면, 말씀의 씨앗은 저절로 싹을 트고, 그 밭의 질에 따라 100배, 60배, 30배 예측할 수 없는 비율로 열매를 낸다. 마음의 밭은 곧,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다. 말씀을 받아들여 깨닫는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열매를 내어 풍요롭게 될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더욱 불모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상태가 된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을 한다. 이것은 말씀을 알아듣는 상태의 등급(수준)을 말한다. 군중의 말씀을 듣는 수준과 제자들이 말씀을 듣는 수준의 차이라고 할까. 그래서 듣고 이해하는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
이른 봄 어느 날 산길을 산책하다가, 흙 하나 보이지 않는 돌밭, 그것도 조약돌이 아니라 바위 조각들로 되어 있는 바위 밭에 우뚝 자란 생강나무를 발견했다. 샛노란 꽃들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이 생강나무는 가로, 세로가 4m는 넘어 보이는 엄청 큰 나무였다. 어떻게 이 돌밭에서 나무가 이리 크게 자랄 수 있나, 하고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나무 둘레는 우연히도 다른 곳보다 돌이 적고 흙이 보였다. ‘아무리 돌밭이라고 해도 돌을 치워주면 흙이 드러나고 또 흙이 쌓여 이렇게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고 꽃을 피우고 엄청난 열매들을 맺을 수 있는 것을!’ 참으로 감동을 주는 발견이었다.
이 생강나무에게 돌을 치워준 것은 자연이었겠지만, 나의 마음 밭의 장애물을 치우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100배, 60배, 30배 자유롭게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가 잘 이해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 준비된 자세다. 이 자세는 준비를 요하며, 시간을 요한다.
1) J. Calloud, F. Genuyt 신부님들의 요한복음 Ⅳ.
* 순교자대축일 경축이동, 연중 제15주일 복음묵상을 써주신 박순자 님은 ‘성서 기호학’ 전공으로 프랑스 리용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평신도 교육신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7월 20일 연중 제16주일 : 마태 13,24-43 가라지 비유
24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중략)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하신 말씀’으로 시작해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로 끝을 맺는다. 반복을 시사하는 <또 다른 비유 는 오늘 복음에서 나올 세 가지 비유(가라지의 비유와 해설,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와 비유로만 말씀하시는 이유뿐만 아니라, 그전에 나온 비유도 포함한다. 또한 이야기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는 조금은 이상한 예수님의 초대말로 끝난다. 독서를 마칠 때 즈음이면 <귀 있는 사람>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며, 무엇을 ‘들어라’는 초대인지 가늠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독서에 임하자.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하늘나라는 씨 뿌리는 행동에 비유되어 있다. 이 행위는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을 내포하는데, 씨가 한번 땅에 묻히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은 가라지 비유 전체에서 관찰된다.
- 낮과 밤의 두 번의 파종
- 자라는 시기와 열매 맺는 시기
-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시기와 수확시기
이 세 시기를 비유의 설명부분과 함께 읽어나가도록 하자.
<발견>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가라지의 존재가 문제시 되는 것은 종들이 가라지를 주인의 밭에서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마치 그 전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밀과 가라지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함께 자란다. 또한 주인 역시 종들의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이 원수가 한 일임을 알아차리는 것 같다.
<때를 기다리라>
‘저희가 가서 그것을 거두어낼까요?’ ‘아니다. …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종들의 말에 대한 집주인의 대답은 두 가지를 내포한다. 하나는 종들이 섣부르게 가라지를 뽑아내겠다고 덤비다가 밀까지 뽑을지도 모른다는 염려의 말이며, 다른 하나는 밀과 가라지를 선별하는 것은 종들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확 때에는 다른 일꾼들이 동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종들은 밭에 가라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며, 주인에게 알린다. 그러나 가라지를 뽑아내는 것은 종들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종들은 집주인에게서 수확 때에 일꾼들이 와서 가라지를 거두어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일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이상한 것은 밭에서 밀과 가라지의 공생이 밀이 자라는 것도 밀이 열매를 맺는 것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라지 비유의 설명(36-43절)에 의하면 밀과 가라지는 각각 하늘나라의 자녀들과 악한 자녀들로 의인화되고, 밭은 세상으로,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로,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로, 수확 때 일꾼은 세상 종말에 개입하는 천사들로 대체된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자녀와 악한 자의 자녀의 공생은 하늘나라의 자녀가 성장하는 데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한 악한 자의 자녀를 세상에서 도려내려 하다가는 오히려 하늘나라의 자녀들도 뽑게 될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혹 이 세상에서 악인을 제거하려 한다면, 선인마저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선과 악이 생사에 관련되어 있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은 아닐까? 게다가 가라지 비유의 설명에서 종들의 존재는 빠져있다. 비유의 설명은 씨뿌리기에서 중간 단계 없이 수확기(세상 종말)로 넘어간다. “사람의 아들”(37절, 41절)의 등장과 함께 이루어지는 창조와 종말 때의 심판에서 종들도 예외는 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가라지의 근원>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35절에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하는 이유가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 밝힌다.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세상에는 하늘나라의 자녀와 악마가 몰래 뿌린 악한 자의 자녀 곧 선과 악이 공존해 왔다는 말이다. 가라지가 드러나는 것에 놀라고 그 근원에 대해 의문을 품고 예수님께 질문하는 종들의 모습에서, 세상에 드러나는 가라지들의 존재에 놀라워하며 주님께 질문하는 우리의 모습을 엿본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비유로 밝히신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악의 근원을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일까?
<심판의 날>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세상 종말에는 하늘나라의 자녀와 악한 자의 자녀로 불리지 않고, 이 이름들이 마치 씨앗의 형태이기나 한 것처럼, 그 열매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불구덩이에 던져질 자들로 지적된 자들은 사람의 아들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조종하는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정의를 거슬러 행동하는 자)들이며, 이들은 의인들과 대립된다. 그런데 그들이 던져질 불구덩이는 그들을 태워 사라지게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이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불구덩이는 외부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그들을 끊임없이 괴롭혀, 울고 이를 갈게 하는 번뇌의 불구덩이 같은 것이 아닐까? 또한 의인들에게는 그들이 아버지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마치 열매가 익으면 밀인지 가라지인지 저절로 드러나는 것처럼, 그때가 되면, 하늘나라의 자녀들은 저절로 그 본 모습(해처럼 찬연히 빛나는 모습)이 드러날 것이며 이것이 ‘의인’이라 명명된다는 것이다.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
예수님이 비유로 말하는 것이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원수인 악마가 밤에 몰래 덧뿌린 가라지와 관련된 것일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의 설명에서 세상 종말에 저절로 밝혀질 선과 악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런데 원수가 몰래 가라지를 덧뿌린 주인의 밭은 세상에서 보는 선과 악뿐만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서 발견되는 선과 악(하늘나라의 자녀의 씨앗과 악한 자의 자녀의 씨앗)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종들처럼 종말에 대한 약속을 받은 우리 각자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늘나라의 자녀가 되는 씨앗에 열심히 물을 주고 보살피는 일이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가라지의 비유와 그 설명 사이에 있는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막을 수 없는 하늘나라의 확장에 대해 말해주는 듯하다. 이것은 가라지와 함께 있는 것이 밀의 성장과 열매 맺음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또한 위의 두 가지 비유는 역설적인 어떤 것을 보여준다. 가장 작은 것 속에 숨어있는 거대한 힘.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같은 종류의 어떤 풀보다 더 크게 자라 하늘의 새까지도 그 가지에 깃들게 된다. 또한 작은 양의 누룩은 큰 것을 변화시킬(부풀리게 할) 힘이 있다. 이와 같이 하늘나라는 그것이 적합한 토양(자리)과 만나면 상상을 초월한(거부할 수 없는) 큰 힘을 발휘하여, 악한 자의 자녀들까지도 하늘나라의 자녀로 바뀌게 하는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이 두 가지 비유는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집주인이 종들에게 수확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던가?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이 약속에는 세상에 드리운 악이 아무리 크게 보일지라도 선의 확장을 막지도, 없애지도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종들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밀이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최대한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일 것이다. 심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단지 우리 안에 있는 좋은 씨앗, 하늘나라의 자녀의 자질을 키워나가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 하겠다. 또한 수확 시기에 일어날 일은 약속처럼 우리에게 주어졌다. 내 안에 뿌려진 선의 씨앗을 꾸준히 성장시켜나가는 것만이 우리의 할 일일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세 가지 비유는 이 말로 끝맺는다. 주님의 밭에 뿌려진 좋은 씨앗은 겨자씨나 누룩과 같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수확 때 천사들이 오면 저절로 밝혀질 것이다. ‘해처럼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겨자씨나 누룩처럼 주변의 것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꾸준히 하늘나라의 자녀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고 당장에 드러나지 않는 선의 열매를 맺어나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 겨자씨나 누룩의 비유처럼, 심판의 날에는 세상 창조 때부터 내 안에 뿌려진 선이 악마가 덧뿌려놓은 악을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열심히 전진하는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렇게 노력하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 나뿐만이 아니라, 악이 판치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 세상에서 선이 승리하는 세상으로 바뀌지 않겠는가. 그리고 바로 이 희망의 날을 위해 집주인은 수확 때를 미루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며, 바로 이것이 이 비유들에서 들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7월 27일 연중 제17주일 : 마태 13,44-52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47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값진 진주에 비유하고 있다. 이 두 비유는 짧으면서도 닮은 점이 많다.
<숨겨진 보물의 비유>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보물을 소유하는 방식은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보물을 훔치거나, 주인에게 구입하는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다음의 네 단계를 통한 간접적인 소유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발견하다 - 다시 숨겨두다 -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다 - 그 밭을 사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가 가진 것을 다 팔아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을 산다. 숨겨진 보물은 밭을 구입하면서 덤으로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기 때문에, 호기심 많은 독자에겐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그 사람이 숨겨두었던 보물을 다시 꺼내었다는 언급도, 그 보물을 팔아서 더 부자가 되었다는 말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에서 묘사하는 밭에 숨겨진 보물은 드러내 놓고 장식품으로 즐기는 것도, 사고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밭에 보물이 감추어져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기쁨인 것처럼, 이 보물은 그것을 발견한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만 있는 것 같다.
밭에 숨겨진 보물과 그 자리에 보물이 숨겨져 있음을 아는 사람의 기쁨은 아마도 임신초기 임산부의 기쁨이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학자의 기쁨, 수확을 바라며 땀 흘리는 농부의 기쁨, 사랑을 발견한 연인의 기쁨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숨겨진 이 보물은 당장에는 손에 잡히진 않지만 그것을 발견한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그 완성에 도달하기 위해 일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텍스트는 전한다. 보물의 발견, 보물과의 만남이 그에게 주는 기쁨은 그 사람의 가치체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다. 지금껏 소유했던 모든 것은 가치를 상실하며, 그는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보물이 감추어져 있는 밭이라는 새 세상을 얻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판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이 비유에서 하늘나라는 그 진미(진면목)에 매혹되어 모든 것을 팔아 ‘하늘나라’라는 보물이 감추어진 밭(새 세상)으로 뛰어든 사람의 기쁨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기쁨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보이는 면이라 하겠다. 이 기쁨이 하늘나라를 자라게 하고, 완성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하늘나라는 그것을 찾고 하늘나라가 숨겨져 있는 밭에서 일하는 사람의 기쁨에서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값진 진주의 비유>
앞의 비유에서 하늘나라가 밭에 숨겨진 보물에 비유되었다면, 여기서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들을 찾는 상인에 비유된다. 그렇다면 이 두 비유에서, 밭에 숨겨져 있는 하늘나라를 우연히 발견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하늘나라 시민을 찾아다니는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하늘나라의 두 가지 측면을 살펴볼 수 있겠다.
텍스트에는 좋은 진주들(복수)을 찾는 상인이 무슨 장사를 하는지 혹은 좋은 진주들을 사기 위해 전 재산을 투자하기로 작정했는지에 대한 언급도, 그가 진주 판매 상인이라 명시되어 있지도 않다. 또한 그가 부자가 되기 위해 좋은 진주들을 찾는다고도 적혀 있지 않다. 단지 그는 좋은 진주들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며, 직업이 상인이라는 것일 뿐, 그가 왜 좋은 진주들을 찾으러 다니는지에 대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그에게 값진 진주 하나와의 만남은 그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그가 발견한 것은 좋은 진주들(복수)이 아니라 값진 진주(단수)다. 이 발견은 그에게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사게’ 한다. 그가 그 진주를 사서 행복해졌는지, 그 진주를 다시 팔아 부자가 되는지 혹은 그가 찾은 값진 진주 때문에 가진 것을 모두 처분했으므로 알거지(?)가 되어, 그 진주와 함께 굶어죽었는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이야기는 그가 값진 진주를 소유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끝나는 전통 동화나 민화의 스토리를 연상케 한다.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했을까? 시부모들과 왕실 시집살이로 불행한 생애를 살다가, 결국에는 소박당한 것은 아닐까? 이야기는 극적인 한 장면, 결혼이란 한 사건으로 끝을 맺고 그 다음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이 텍스트에서 상인이 값진 진주를 소유하는 것 역시 하나의 극적인 사건이다. 값진 진주 하나를 소유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것을 모두 걸기 때문이다. 값진 진주의 발견, 값진 진주와의 만남은 그에게 상인이라는 자신의 직업까지도 잊게 만든다. 상인은 이윤을 추구하는 자로, 물건의 가치를 따져 가격을 정한다. 그런데 값진 진주를 찾은 그가 전 재산을 털어서 산 진주를 더 좋은 가격에 다시 팔았다는 말은 텍스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필요했다면 자기 목숨까지 바쳤을까?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들을 찾는 상인과 같다.’
하늘나라는 지금도 좋은 진주들을 찾아다니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 그분이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그 진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 것이다. 전 재산 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목숨까지도…그만큼 우리 각자는 그분에게 소중한 유일무이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함께 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족되는 삶을 보여주는 이 두 가지 비유는 모두 하늘나라를 닮았다고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 쪽에서 하늘나라와의 우연한 만남이 모든 가치를 뒤바꾸어버리고 최고의 가치로 하늘나라를 갈망하게 하듯, 하느님 쪽에서도 우리 각자와의 만남은 그분이 열망해야 할 최고의 가치가 된다. 하늘나라는 이렇게 사랑에 눈이 먼 이들의 만남이다. 단지 하느님은 값진 진주를 사는 것(구원사업)으로 그 일을 일단락 맺으시지만, 우리에게는 하늘나라를 자라게 하고 완성시킬 밭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 연중 제16주일과 제17주일 복음묵상을 써주신 안영주(데레사, 사동성당) 님은 ‘성서 기호학’ 전공으로 프랑스 리용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평신도 교육신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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