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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
통(通)하라!


이경수(라파엘)|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보좌신부 시절, 어느 주일에 공지사항을 전하고 있었다. 때마침 결혼시즌이었는지 미혼 남녀를 위한 혼인전교육인 ‘가나강좌’의 수강을 독려하는 대목이 있었다. “소소한 직업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교육이 있고 자격증이 필요한데, 혼인이라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신앙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되새겨보고 짚어 보아야 할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가톨릭문화관에서 교육이 있으니 예비 신랑 신부들은 꼭 참석하도록 하십시오!”

미사를 마치고 사제관으로 들어서려는데 사무장님께서 부르셨다. “신부님, 오늘 미사 중에 가톨릭병원에서 무료 간암검진 있다고 신청하라고 하셨습니까? 웬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신부님이 그러셨다고 신청서 달라고 해서 혼났습니다.”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 주보를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필시 ‘가나강좌’가 그 할머니한테는 ‘간암검진’으로 들린 것이었다.

잘못 알아듣는 것은 그러나, 귀가 어두워지신 할머니한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사람은 어쩌면 통교에 근본적으로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살아온 환경과 관심사,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고용주와 피고용인 등등 도저히 소통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서로 판이하게 다른 논리를 가지고 있다.

원래 말은 서로 통교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수단이다. 하지만 말이 남용되고 그 진실한 뜻이 사그라질 때는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는 것이 되고 만다. 세상은 이제 말은 의례히 적당히 과장되고 꾸며져 있는 것이라고 믿기에 익숙해져 있다. 듣지는 않고 내 말만 하려는 데에서 생겨난 현상일 수도 있다.

요즘은 막힘이 많은 시대라서 그런지 소통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근래에 서점에 나가보면 소통을 주제로 하는 책들이 많아진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사람에게 있어서 차이가 왜 생겨난 것인지를 묻는 것도 필요한 과정이다. 누구는 사람의 근본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를 묻고, 누구는 성격의 유형이나 혈액형의 유형으로 사람의 차이를 이해해 보려고도 노력한다.

하지만 어떠한 것이든 사람을 유형으로 묶어 그 차이점을 고정시키려는 시도는 위험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차이점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소통할 수 없다. 나와 같지 않은 상대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서는 통(通)할 수 없다. 다름이 만들어 내는 화합을 이룰 수 없다.(和而不同)

“통(通)하라! 그렇지 않으면 통(痛)하리니….”(1코린 12,2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