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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허광철 신부

9월의 복음묵상을 시작하며

“하느님, 당신께서 마지막 심판에 대해 경고하실 때,
저는 종종 두려움에 떱니다.
제가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고
거기에서 영원토록 뉘우쳐야 한다 하실 때,
저는 종종 두려움에 떱니다.
당신 포도밭에서 제가 당신과 당신 나라를 위해
너무 적게 일하지는 않았나,
저는 종종 두려움에 떱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복음을 듣습니다.
당신은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저의 작은 행위에 당신의 자비(善)를 더하여
셈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요.
오, 나의 좋으신 분이시여,
놀라운 당신의 말씀에 저를 의탁하나이다.” (P. Ceelen, Hinter Gittern, 1991, 47)

 

 

 

9월 7일 연중 제23주일 : 마태 18,15-20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가끔 교회 공동체에 대해 크게 실망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차저차 여러 가지의 이유로 사분오열된 그 공동체 안에서 그들은 도대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고 토로한다. 실망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각인된 그들은 어렵지 않게 냉담의 길을 택하기도 한다. 과연 어떤 공동체의 모습이 하느님을 보여 주는 공동체, 하느님이 진정 함께 계신 공동체일까?

아주 구체적인 지침을 주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 답을 두 가지로 찾아 볼 수 있겠다. 먼저 ‘형제적 충고가 있는 공동체’(15-17절), 다시 말해 형제적 충고가 가능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좀 더 넓은 의미로 18절의 선언에 비추어 볼 때 ‘화해와 용서가 있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또한 진정 ‘마음을 모아 구하는’ ‘기도하는 공동체’(19절)의 모습이 그 두 번째이다.
‘형제적 충고가 있는 공동체’ ‘기도하는 공동체.’ 우리는 이상적으로만 보이는 이 두 공동체의 모습을 좀 더 달리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즉 이 두 공동체의 모습을 달리 말한다면, ‘용서와 화해가 절실히 필요한 공동체’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공동체’를 말한다. 즉 부족한 것이 하나 없는 완벽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치 하느님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완전한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리를 절실히 느끼고 있는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이 계신 공동체요, 하느님을 보여주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로써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20절)는 예수님의 선언은 ‘너희 가운데에 있는’ ‘나의 자리를 잊지 말라.’ 주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분의 자리를 잊지 않는 공동체, ‘그분을 통해’ 용서와 화해와 충고가 이루어지는 공동체, 마음을 모아 ‘그분과 함께’ 간절히 기도하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진정 그분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그래서 공동체의 문제로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스스로 어디에 그분의 자리를 내어 드리고 있는지 깊이 고민해 볼 일이다. 하느님이 필요한 그 자리, 믿음의 공동체로서 부족한 그 자리가 바로 주님께서 들어오실 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님, 지금 제가 속한 공동체에서 더 이상 당신을 만날 수 없다고 투정부리지 않겠나이다. 이런 저희들 마음이 진정 당신이 함께 계신 자리임을 믿으며, 저희의 화해와 사랑을 위한 모든 노력과 기도에 당신의 은총을 더해 주소서.

 

 

 

9월 14일 한가위 대축일 : 루카 12,15-21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한가위의 주제는 ‘감사’이다.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하늘을 공경하고 수확물에 감사를 드렸듯,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왔음’을 고백하며 감사의 잔치를 올려 드리는 것이 오늘이다. 창조교리의 핵심은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와 연결된 우리의 마지막에 대한 구원교리 역시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마쳐지리라’ 희망하며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바로 오늘은 ‘창조’와 ‘구원’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만나는 자리요, ‘이미 이루어 진’ 일들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 모두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자리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 중심으로 다시 모든 것을 돌리는 날’, 그것이 추석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매일이 추석날이 되어야 하리라.

이런 오늘 우리에게 복음 역시 ‘네게 생명을 주신 분, 네게 모든 것을 허락하신 그분을 잊지 말라.’ 경고하고 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 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15절). 하지만 물질적 부와 풍요가 곧바로 행복과 연결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나는 우리는 얼마나 마몬의 마수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가? 비유의 어떤 부자처럼, 나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부와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영혼과 생명을 죽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을 진정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공해로 자연이 신음하고, 소에게 육고기를 먹여 광우병이 도래하고, 많은 이를 배불릴 수 있다고 계발된 유전자 조작 식품이 다시 인간에게 새로운 질병을 야기 시키고 있는 우리 시대의 현실을 아파하며, 함께 회개해야 할 것이다. 돈이 하느님이 되어 버린 이 시대를 함께 아파하며 회개해야 할 것이다.

주님, 이번 추석이 나와 우리 가족만을 위한 이기적인 축제가 아닌, 온 자연과 이웃과 인류가 함께 어우러지는 진정 당신만이 중심인 감사의 장이 되게 하소서.

 

 

 

9월 21일 제25주일 : 마태 20,1-16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 제1독서) 구약의 이 말씀과 딱 맞아 떨어지는 비유말씀을 우리는 오늘 듣는다.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소위 ‘품삯은 일한 만큼’이라는 인간의 상식적인 사회정의와는 상관없는 행동을 한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일꾼이나 저녁 느즈막에 일을 시작한 일꾼이나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은 동일하다. 우리는 이 비유를 어찌 이해하여야 할까?

 

네 가지 측면에서 우리는 이 비유를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비유는 ‘하느님 나라’(1절)에 대한 비유로, ‘일꾼’이란 ‘구원에 초대받은 이들’, 그들이 하는 ‘일’이란 ‘구원을 위한 모든 노력’, ‘품삯’이란 바로 ‘구원’임을 우리는 쉬이 이해 할 수 있다.


둘째, 이 비유는 철저히 ‘주인 중심’이라는 것이다. 일꾼의 상태는 오직 ‘일이 없어 빈둥거린다.’는 공통점과 서로 ‘불리어지는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어떤 차이도 없다. 일을 잘하게 생겼는지, 경력이 좋은지, 아니면 술에 취해 비틀거렸는지 비유가 침묵하듯 ‘일꾼의 상태’는 주인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바로 ‘주인 중심’의 비유에서 우리는 ‘구원이 철저히 하느님 중심’임을 이해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주인에게 따지는 일꾼처럼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대가로 하느님께 구원을 요구할 수는 없다. 일꾼은 그저 열심히 일하고 삯을 받을 뿐이다.


셋째, 비유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주인이 ‘하루 종일’ 이른 아침부터 저녁 날이 저물기 전까지 일꾼을 모으러 다닌다는 것이다. 바로 주인의 임무는 ‘포도원 안’이 아니라 ‘포도원 밖’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유의 핵심 메시지에 접근할 수 있다. 바로 ‘하느님은 언제나 부르시는 분(구원에 초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는 ‘누구나 일꾼으로 불리었다는 사실’, 즉 ‘구원에 대한 똑같은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비유는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넷째, 비유의 관건은 이제 ‘듣는 이’들에게로 넘겨진다. 바로 주인의 부름에 응답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이다. 여기에서 비유는 그 응답의 시간이 ‘언제이든 결코 늦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 즉 이는 ‘구원과 회개를 위해서 새로 시작하는데 지각이란 없다!’는 복음 중의 복음을 드러낸다 할 수 있다.

주님, ‘이미’ 당신 일꾼으로 불리어 응답한 모든 이들은 감사하며 당신 포도밭을 위해 일하게 하시고, ‘이미’ 당신께 불리었으나 ‘아직’ 응답하지 않은 모든 이들에겐 ‘당신의 부르심’을 새로이 상기시켜 주소서.

 

 

 

9월 28일 연중 제26주일 : 마태 21,28-32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언젠가 독일어 전례에 사용하는 공동번역에서 오늘 복음을 만났을 때,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바로 오늘 비유에서 뉘우치고 일하러 가는 아들이 큰 아들이 아니라 작은 아들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래 전 역시 장남인 큰 아들이 다르다는 식으로 묵상을 하던 어느 자매가 생각 나 이 부분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대체 어느 번역이 잘못되었는지 궁금해 하며, 원어와 주석서들을 찾아 본 적이 있다. 우리가 대부분 공용으로 쓰는 그리스어 성경에 따르면 분명히 큰 아들이 뉘우치고 일하러 간다. 그래서 독일어 번역보다는 우리 번역이 맞다 할 수 있다.
철두철미 하다는 독일인들의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고, 그 발견에 신나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다른 독일어 번역본들은 첫 아들로 잘 번역하고 있었고, 주석서들에 따르면 그리스어 원어 여러 사본들 중에서는 분명 반대의 보고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첫째든 둘째든 어느 아들이 뉘우치고 일하러 간다고 비유의 메시지가 달라지지는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묵상과 상관없이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혹 이 말씀으로 역시 큰 아들이 낫다는 소위 장자 선호사상으로 묵상해서는 안 되리라는 기우 때문이다.)

도대체 하느님 나라를 어떤 이들이 차지 할 것인지, 오늘 복음의 비유는 잘 보여 주고 있다. 바로 ‘생각을 바꾸어’ ‘뉘우치고’ 다시 일하러 가는 첫째 또는 둘째 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회개’가 하늘나라를 차지할 첫 조건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복음 말미를 통해 세리와 창녀들이 보여 주었다는 ‘믿음’이 그 두 번째 조건임을 볼 수 있다. ‘뉘우침과 믿음’, 하늘나라를 차지할 주님 포도밭 일꾼들의 근본적 사명이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32절)는 예수님의 마지막 선언은 ‘회개’와 ‘믿음’이 함께 이루어지는 일임을 드러낸다 하겠다.

하늘나라를 차지할 근본 조건이듯 회개란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너무나 어려운 과업이다. 그 한 순간도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 세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하느님께로 몸과 마음을 되돌려야 함을 알면서도, 회개란 쉽게 한 번에 이루어 지지 않음을 우리는 종종 체험한다. 과연 회개가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구태여 찾아본다면, 첫째, 일하러 가라는 아버지의 명을, 그분의 뜻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지난 주 복음과 연결 시켜 본다면, 하루 종일 우리를 찾아다니는 ‘그분의 부르심’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언제나 기다려 주시고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는 ‘그분 자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주님, 우리의 더 큰 문제는 회개할 필요성을 못느끼는 무디어진 양심입니다. 저희가 이런 돌 같은 마음을 도려내고, ‘당신의 자비’에 온 존재를 맡기도록 재촉하여 주소서.

 


* 허광철(요셉) 신부님은 1999년 11월 사제서품 이후 1999년 12월-2001년 9월까지 봉덕성당 보좌를 거쳐 2001년 9월-2008년 8월까지 독일에서 유학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