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브라질과의 인연은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음악을 담당한 저는 후배양성을 하라는 부탁을 받고 1999년 7월 29일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브라질 선교사로 정식파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8시간을 비행하여 첫 선교지인 ‘브라질의 동북부, 올린다’에 도착했습니다. 비행장의 뜨거운 열기가 무색할 정도로 시원하고 넓게 펼쳐진 바다, 아름다운 야자수로 수놓은 듯한 해변을 차창으로 내다보며 브라질에 왔음을 실감했습니다.
우선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서 언어연수를 받았습니다. 각 나라에서 온 32명의 선교사들(유럽 16명, 아메리카 7명, 아시아 7명, 아프리카 2명)들과 함께 포르뚜게스를 배우며 서로 다른 열일곱 나라의 문화를 접하는 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14명의 신부님들과 18명의 수녀님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에는 포르뚜게스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언어 코스를 시작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언어 공부’라고 생각하였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언어 공부만큼이나 중요한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섬김과 봉사로써의 선교사의 자세’였습니다. 매일 함께 미사를 지내는 동안 신부님들의 강론은 선교사로서의 마음가짐을 더욱 굳게 가지도록 일깨워 주었지요. 한국에서 이미 한 달 동안의 선교사 교육을 받았지만 브라질리아에서의 시간들은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게 한 소중하고 감사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의 38배나 되는 브라질, 3개월의 언어연수를 마치고 본격적인 나의 선교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아침 기상 종소리와 함께 새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아침기도와 미사, 식사를 하고나면 곧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학생들을 만납니다. 수녀원 옆에 붙어있는 이 학교(Academia Santa Gertrudes)는 유치원, 초등, 중등학생들이 함께 있습니다. 인형 같은 유치원 어린이들이 하는 포르투갈 말을 들으며 나는 언제 저렇게 하나 부럽기도 했었습니다. 두 살짜리 아이들은 아빠의 팔에 안겨오고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꼬마들은 바퀴달린 작은 가방을 끌고 학교 문을 들어섭니다.
아침마다 학교의 앞뜰은 등교를 돕는 부모님들의 자동차들로 가득 찹니다. 7시 30분에 시작한 수업이 12시 45분에 끝나면 기다리고 있는 차를 타고 바쁘게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린이날 행사가 있는 주간에는 수업 대신 재미있는 놀이로 시간을 보내며, 해마다 한 번씩 가지는 체육대회는 잘 꾸며진 체육관에서 한 주간을 마음껏 즐깁니다. 춤과 단막극 등 화려하고 신나는 프로그램과 열띤 각 팀과의 경기는 언제나 저를 감탄시키곤 했습니다.
500년대의 포르투칼 식민지의 첫 출발점인 동북부의 이곳은 브라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역으로 매일 유럽과 국내의 관광객을 맞고 있습니다. 올린다 중에서도 가장 중심지인 높은 언덕에 위치한 우리 자비의 성당(Igreja da Misericordia)의 수녀원은 오랜 전통의 주교관성당, 대신학교, 성 프란치스코수도원, 성 도르테아수녀원과 가까이 있습니다. 수녀원 주변에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옛 가르멜수도원을 비롯해서 금장식의 제대벽화로 유명한 성 베네딕도수도원, 성 베드로성당, 로사리아성당 등을 보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들은 35도의 뜨거운 열기도 마다하지 않고 가쁜 숨을 내쉬며 이 언덕을 올라 이름 그대로인 올린다(Oh! linda: 참 아름다워라)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떠날 줄을 모릅니다.
이 올린다의 마을은 북과 트럼펫, 춤으로 언제나 축제분위기로 넘치고 뜨거운 열기로 바닷가에서 몸을 식힌 관광객들이 동북부의 전통적 음식과 음료를 마시며, 브라질의 낙천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에 젖어들곤 합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그룹들이 두드리는 타악기, 금관악기의 음향은 경쾌하고 흥겹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무용복 차림을 한 거무스레한 피부의 소녀들은 밉고 고움을 막론하고 빠른 리듬에 몸을 흔들며 이곳 특유의 양산 춤인 프레보 춤을 추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매력적이고 유쾌하며 환상적입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오고가는 사람들이 수녀원 성당의 공동기도에 참여하며 잠시나마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우리와 함께 기도하는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올린다의 대주교님이신 가르멜회 소속의 요셉 대주교님께서는 언제나 기도와 브라질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잘 조화시키셨으며, 특별히 그레고리오 성가를 좋아하셨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신학생들이 그레고리오 성가에 관심이 컸고 그레고리오 성가시간을 좋아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저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저를 기도로 응원해 주었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 안에서 늘 동행했던 사랑스런 동반자였으니까요. 음악실기 시험을 칠 때는 무릎을 두드려 가며 리듬치기 연습을 하여 언제나 좋은 점수로 나를 기쁘게 해 주던 신학생들. 어느 날, 수업 중 겨우 오후 2시를 넘은 시간인데 한 학생이 배가 고프다고 하기에 ‘점심을 먹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신입생들이 들어와 밥이 적은 듯하여 적게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아는 그 신학생의 마음이 따뜻하게 다가와서 감동적이었으며, 또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 가정을 돕기 위해 버스 안내원을 했다고 서품식장에서 당당히 자신을 밝히던 새 신부님도 기억에 남습니다.
가톨릭 국가인 브라질은 종교적인 행사들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인정됩니다. 종교적인 행사가 있을 때는 시장의 지시로 경비병들의 보호를 받아가며 온 마을의 신자들과 주교님과 신학생들은 십자가를 앞세우며 밴드에 맞추어 성가를 부르고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며 시가행진을 합니다. 그래서 성주간의 십자가의 길, 부활, 본당의 주보성인축일 등은 지역전체의 행사로 종교에 관계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하는 거대한 행사가 되기도 합니다.
브라질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은 언제나 저를 감동시켜 주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이곳 사람들의 자비심, 빵 한 조각도 나눠먹는 가난하지만 이웃의 아픔을 헤아릴 줄 아는 동정심, 자신감 있고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며 배운 리코더를 불기 좋아하던 학생들, 수업 중에도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온몸을 흔드는 4,5세의 유치부 아이들, 길거리에서 길을 물으면 바쁜 중에도 그 장소까지 데려다 주는 친절한 분들을 기억하면 브라질에서 선교했던 시간들이 축복이었음을 새삼 느낍니다.
올린다 본원은 본방인 예비수녀들과 한국인인 나를 포함해서 35명의 수녀들이 살았습니다. 10명의 연세 드신 독일 수녀님들은 모두 20세의 젊은 나이에 선교를 오셔서 50~60년 선교지에서 살고 계시는 분들이십니다. 일생을 선교지에서 살고, 그곳에서 죽기로 결심하며, 고국을 떠나오신 그분들의 철저한 선교정신에 깊이 머리 숙여졌습니다. 수녀원 전례를 이전에는 83세 된 할머니 수녀님께서 맡고 계셨는데, 후배양성을 위해 노력한 결과 이제는 수련자와 유니오랏 수녀님들이 기도와 미사의 전례를 맡아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오르간 선율로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었으니, 저의 큰 기쁨이며 보람이었습니다. 한국 선교 후 본국으로 떠난 독일 선배 수녀님들이 ‘한국’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그리며 아침마다 동쪽을 보며 절을 했다는 왜관수도원 소속이었던 어느 독일 수사님의 말씀도 떠오릅니다. 얼마나 선교지가 그리우셨으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다른 기후, 성격, 언어, 음식에도 건강을 유지하며 8년 5개월 동안 선교할 수 있게 지켜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지면을 통해 가난한 신학교 상파울로의 이경렬(베드로) 본당 신부님, 이영만(비오) 원장선생님과 홍 베네딕도 부부를 비롯한 은인들, 그리고 수녀원을 위해 멋진 전례용 오르간을 구입해주시어 풍요롭게 전례를 하도록 도우신 브라질 교포님들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추억은 라틴 아메리카 한국 가톨릭 선교사 모임(AMICAL)으로, 매 년 남미의 각국으로 장소를 이동하며 일 년에 한번 열리는 모임입니다. 창립 10주년을 맞은 아미깔 모임은 해를 거듭할수록 교육의 질이 향상되고 모든 선교사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니,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하며 무한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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