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음악을 원하는가? 아름답고 달콤한 가사를 읊은 사랑의 노래는 우리의 귀에 나긋하게 들러붙어 좋고, 신명나는 춤을 어우른 음악은 부르는 이의 자태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기에 더욱 흥겹다. 한 잔 술 거나하게 걸친 후에 부르는 노래는 무엇인가 가슴에 쌓인 것들을 토해내는 맛이 일품인데, 이렇게 우리 모두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다른 종류의 음악을 찾는다.
1908년에 태어난 ‘올리비에 메시앙’이라는 프랑스 작곡가는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느끼는 음악적인 욕구와는 조금 다른 안목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창조주가 빚어낸 삶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살아간 사람이었다.
마치 뛰어난 화가가 팔레트의 물감을 섞을 때 다른 이들이 그가 그리는 그림을 좋아할지 아니면 싫어할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진실한 빛깔을 뽑아내기 위해 모든 힘을 쓰는 것처럼 메시앙은 구원의 신비를 음악을 통해 스스로 묵상하고 이야기하고자 했던 음악의 시인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가톨릭의 음악가입니다. 종교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간에 나의 작품은 모두가 신앙의 표현이요, 그리스도의 신비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신앙이자 기도인 음악을 만들 때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메시앙 자신의 말처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그의 음악이 드러내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고귀하고, 유일하며, 가장 많이 사용된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40년 여름, 그는 폴란드의 질레지아(Silesia)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당장 오늘 죽을지도 모르는 처절한 상황에서 마지막 작품을 쓴다는 마음으로 <시간의 끝을 위한 사중주>를 완성한 뒤 수용소 안에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음악가들을 찾아내어 오천 명의 동료 포로들 앞에서 연주하였다.
이 작품은 인간의 삶을 가두고 있는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부활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종말이 지니는 파괴와 두려움의 정서와는 달리 환한 빛의 희망으로 우리를 감싸준다. 과거라는 시간은 우리가 기억하는 무엇인가를 말하며 현재라는 시간은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무엇인가를 뜻한다.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은 우리가 기다리는 무엇인가를 의미하므로, 바로 이 기다림의 끝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삶을 만나게 되며,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1940년 여름, 오천 명의 포로들은 이천년 전 그리스도가 겪은 십자가의 고통을 자신의 삶을 통해 지켜보았고, 영원한 삶이 가져올 행복을 메시앙의 음악을 통해 아주 조금 맛보았다. 그리스도의 벗이었기에 그들은 위로받았다. 그들이 받은 훈훈한 위로를 차가운 가을바람과 더불어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으로 음악에 귀를 기울여 본다. 예수의 영원한 생명을 찬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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