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 연중 제27주일 : 마태 21,33-43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포도밭 임자가 바라는 것은 ‘자기 몫의 소출’입니다. 종들을 보내고, 더 많은 종들을 잇달아 보내고, 결국엔 자신의 아들까지 보내었으나, 포도밭 임자에게 돌아온 대답은 폭력과 죽음이었습니다. 자기 몫의 소출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소작인이 바라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이었습니다. 포도밭 임자가 수차례 자신의 소출을 요구했으나, 끝끝내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단순 명료합니다. 포도밭 임자는 멀리 떠나 있습니다.(33절) 멀리 떠난 그 자리에 소작인이 해야 할 일은 포도수확의 풍성함이 아닙니다. 포도밭 임자의 몫을 생각하고 그 몫을 제 때에 마련할 줄 알아야 합니다.(41절) 소작인의 일터는 포도밭 임자가 손수 마련한(33절) 곳이고, 그 곳에서 소작인은 자신의 몫이 아닌 포도밭 임자의 몫을 위해 일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 소작인이 자신의 일터를 떠납니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합니다. 상속자의 자리를 넘보기 때문입니다.(38절) 소작인이 잃어버린 일터는 죽음의 장소로 바뀌어 버립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잊어버린 그 자리에는 죽음만이 머물고 맙니다. 포도원은 새로운 소출을 기대하는 생명의 장소이지만 소작인의 욕심은 그 생명의 장소를 죽음의 장소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3절)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소출을 내지 못한다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할 터전입니다. 내 삶만의 풍성함과 내 삶만의 편안함을 위해 살아간다면 내가 사는 이곳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죽음을 향해가는 곳일 뿐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 땅, 이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참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적어도 나의 주인이신 분께 무엇 하나라도 드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한 삶이 아닐까 합니다. 내 것에 머물면 내 주인의 것이 없어집니다. 내 주인의 것이 없어지면, 나에겐 살아갈 그 어떤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10월 12일 연중 제28주일 : 마태 22,1-14
1 예수님께서는 또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는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아들의 혼인을 위해 어떻게든 손님들을 불러 모으고자 하는 한 임금의 이야기입니다. 잔칫상도 차렸고 황소와 살진 짐승도 잡고해서 모든 준비는 끝이 났지만, 손님들이 여간해서 잘 오지 않습니다.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가고 다들 혼인잔치보다는 자신의 삶을 가꾸는데 더 열심인 듯합니다.
‘초대받은 이들’이라 표현된 이들을 저는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라 새로이 고쳐 부를까 합니다.(그리스 동사의 일차적 뜻은 불리움을 받은 이들입니다.) 혼인잔치에 불리움을 받았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전혀 엉뚱한 곳에 이릅니다. 부름의 목적은 혼인잔치이나 그들의 움직임은 밭이나 장사 터로 향해갑니다. 아니 더 읽어봅시다. 그들은 밭을 넘어, 장사 터를 넘어, 죽음의 장소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죽음의 행위자요, 그들이 죽음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잔치에 오라고 부르러간 종들을 때려죽이고, 그 죽임에 대한 값을 임금의 군대가 톡톡히 되돌려 받기 때문입니다. 불리움을 받았으나 초대받은 이들의 자리는 사라지고 맙니다. 불길에 휩싸여 삶의 터전이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종들이 새로이 찾아 나섭니다. 손님을 어떻게든 채우려하는 임금의 지시 때문입니다. 우리네 성경은 아무나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원뜻은 종들이 ‘찾은’이들을 데려왔다가 더 정확합니다. 종들이 찾은 이들은 종들에 의해 불리움을 받은 자이고, 임금이 어떻게든 만나고픈 혼인잔치의 손님들입니다. 자, 이제 불리움 받은 자들이 새롭게 형성됩니다.
임금이 둘러보니 그리 달갑지 않은 한 친구가 있습니다.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네요. 혼인잔치에 걸맞은 예복하나 걸치지 못했으니, 임금에게 흡족한 손님은 되질 못합니다. 쫓겨난 자리는 어둠이요, 안타까움이며 통곡의 장소입니다. 혼인잔치에 불리움을 받았으나 평상복인지 잔치예복인지 분간 못하는 그 친구는 ‘선택’의 순간에 쫓겨납니다.
하늘나라는 단순히 ‘주어져 있는’것이 아닙니다. 불리움에 대한 마땅한 우리의 응답이 만나는 자리에서 하늘나라는 이해되어야 합니다. 내 삶에 갇혀 새롭게 부르는 주님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면, 내 습관에 얽매여 늘상 같은 나만을 고집한다면 불리어질 수는 있으나, 선택은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나를 떠나 너를 볼 줄 알고 보듬을 줄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지금 내가 버리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매여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얽매임 때문에 행여 지금 이 순간 하늘나라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염려됩니다.
10월 19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 마태 28,16-20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봅니다. 당신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머무는 장소는 갈릴래아의 어느 산입니다. 갈릴래아라고 하면 예수님의 수많은 가르침이 이루어진 장소였고, 그 장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행복해했고, 놀라워했으며 그것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된 복음전파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중적인 장소 갈릴래아는 오늘 복음에서 어느 산으로 특정 지워져 나타납니다. 이곳 저곳 사람들이 자주 모일 수 있고, 빈번한 왕래가 있는 장소가 아니라 딱 열한 제자만이 갈 수 있고, 열한 제자만이 알 수 있는 어느 산으로 갈릴래아는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예수님을 따라 그분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던 갈릴래아가 이제는 열한 제자에게만 주어진 아주 은밀한 곳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드러나 있으나 숨겨진 곳, 모두가 보았으나 이제는 열한 제자만이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구별된 곳, 이곳이 갈릴래아의 어느 산이 가지는 역설적인 장소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앞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열한 제자들의 태도인데요,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는 제자들, 그러나 그 뒤에 예수님을 의심하는 제자들 역시 나타납니다. 경배와 의심이라는 두 상반된 태도 위에 예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말씀이 머무는 자리는 확실한 신앙의 자리가 아니라 신앙과 의심이 교차되는 자리입니다. 말씀이 머무는 자리는 모두가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 곧 열한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자리이고, 그것도 더러는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장소와 인물들의 상반된 자리에 온전히 드러납니다. 말씀에 귀 기울여 봅시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기를 바라십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보듬어 들이는 말씀입니다. 너, 나 구별 없이, 어느 장소, 어느 민족 구별 없이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그리곤 또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떠나시는 예수님이시지만 ‘언제나’함께 하시고자 하십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시간의 구별과 한계를 초월해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래서, 이런 저런 갈라짐과 구분됨을 없이 하십니다. 비록 은밀한 산(갈릴래아의 산), 특정 지워진 사람들(열한 제자)에게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의 폭과 넓이는 세상 어느 것으로도 담을 수 없는 넓디넓고 깊고깊은 말씀이고, 그 말씀 안에 모든 이를, 모든 곳을 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것은 당신 가르침의 그 끝없는 풍성함이 우리 모두에게, 우리 삶 구석구석에 온전히 새겨지고 스며들기를 바라시는 하나의 부탁입니다. 그 부탁, 들어주는 삶입니까? 아니면 거절하는 삶입니까?
10월 26일 연중 제30주일 : 마태 22,34-40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사두가이들과의 부활 논쟁(22, 23-33) 이후에 이제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모여듭니다. 모여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험(페이라조)이라는 말마디는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린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바리사이들이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은 대화의 상대나 논쟁의 상대가 아니라, 해를 입히고 어떻게든 짓밟고자 하는 타도의 대상이란 말입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은 참 좋은 질문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생겨난 본래 의미를 묻는 말인데요, 무엇보다 하느님께 대한 진정성, 하느님께 무조건 의탁하고 투신할 수 있는 결단력이 율법이라는 형상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예수님은 다시 되뇝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를 덧붙이는 예수님… 이웃사랑입니다.(레위 19,18)
예수님의 대답은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모두가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중요시 여기는 모세오경 안에 주어진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율법의 정신은 어쩌면 바리사이들이 추구해야 할 기본 덕목이요, 나아가 온 이스라엘 민족이 실천해야할 하느님의 가르침의 정수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시험’하는 자들입니다. 사랑이라는 율법을 가지고 남을, 아니 예수님을 옭아매려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자신을 하느님께 투신하는 것이요, 이웃을 제 몸 같이 지극히 아끼는 것입니다. 곧 나 자신의 열림입니다. 나 자신의 개방입니다. 그러나 시험은 나 자신에게 갇혀있는 것입니다.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남의 뜻을 꺾어버리기 위해 시험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나 안에 머물며 남을 업신여깁니까? 아니면 남을 위해, 남과 함께 나를 가꾸는 사랑의 전도사입니까? 시험하는 자는 남과의 단절로 불행할 것이고, 사랑하는 자는 남들과 더불어 행복할 것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으신가요?
* 박병규(요한 보스코) 신부는 2001년 사제서품, 현재 프랑스 리옹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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