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금) 고려대학교 조광 교수 특강내용
천주에 대한 신앙의 박해를 견디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신심은 바로 성모 마리아 신심이었다.
박해시대 천주에 대한 인식은 마태오 리치에 의해 확정되었다. 그것을 오늘날 하느님이라 표현하였다. 당시 다신교적 인식아래 유일신 사상과 삼위일체적 조건 속에서, 조선후기 천주교는 처음으로 새로운 이론을 경험하게 된다.
조선 후기, 천주교의 인식 자체는 하느님과 동등하였다. 천주교신자의 경우 가장 중요한 교리를 천주 공경, 사람 사랑이라 여기며 그 길에 이르는 지름길이 천주교이므로 꼭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다른 이를 입교 권면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이르는 공이라 여겼다. 그야말로 천주교는 천주교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교’라고 여긴 것이다. 정학, 천주교학은 올바른 학문으로 창조주 천주는 가장 큰 인식이었다. 하늘, 땅, 천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
18세기 후반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의 상황은 양반, 중인, 천인으로 나뉘어진 신분제 사회였다. 특히 성리학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다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초기 신자에게는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우리 모두 평등하다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당시 정부 당국에서는 신분제도를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천주교의 그런 생각을 혁명이라 하여 천주교를 탄압해갔다. 하지만 천주교인들은 인간을 보는 새로운 눈을 키워나가게 된다.
조선 19세기 전반기 천주교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강생구속에 관해 배우면서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정통적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또한 여러 기도서에 실려있는 성모 마리아에 관한 기도문들을 통해서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키워나갔다. 사도신경에서도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했음을 믿는다고 밝혔다. 또한 박해시대 당시에 필수적으로 암기해야 했던 가장 기초적인 기도 ‘여섯끝’ 안에는 ‘성모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후 이 여섯끝의 기도문이 열두끝으로 확대되었을때도 성모경은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성모경을 중심으로 하여 제정된 ‘묵주의 기도’는 당시 신도들이 가장 즐겨 바치던 기도의 형식이었다. 이밖에도 당시의 전례력에 따라 봉헌되던 각종의 성모 축일에는 별도의 찬미경들을 마련하였다.
19세기 전반기의 교리서와 기도서에서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는 인간과 천주를 연결시켜주는 일종의 중개자였다. 성모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지혜를 깨우쳐 줄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시 조선 천주교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어려움에 처한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운명의 순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항상 성모 마리아와 같은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박해시대 독신생활을 실천하고자 했던 여러 사람들은 독신생활의 모범을 성모 마리아에게서 찾고자 했다.
18세기 말엽에서 19세기 전반기 조선의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굳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는 위험 가운데 놓여 있는 이들의 보호자였으며, 성모 마리아 신심은 박해시대 당시 교회에서 유력한 신심이었다.
조선교회는 1862년부터 성모성월을 제정하여 한단갈에 걸친 특별 기도를 통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표현하고 강화시켜 나갔다.
특히 천주가 가운데 선종가는 ‘세상을 떠나는 일이 성모님 대전에 나가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으며 사심판, 공심판 때 신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성모 마리아’라고 하고 있다.
조선왕조 18세기 말엽 이래 천주교도들인 가지고 있던 신심의 특성은 천주에 대한 인식, 예수에 대한 인식,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당시 교회는 성모에 대한 합당하고 올바른 신심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신앙생활을 더욱 알차게 만들어줌으로써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바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가르쳐 왔다. 조선후기 조선의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굳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성모께 의지하며 감사드리며 살던 박해시대 신자들의 생활은 여러 자료를 통해 찾을 수 있다. 성모님에 대한 돈독한 신심을 가진 박해시대 신자들처럼 여러분들도 각자가 가진 보화를 주변과 이웃에 함께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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