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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거룩한 독서에 따른 주일복음 묵상


심탁 신부

11월 2일 연중 제31주일, 위령의 날 : 마태 25,1-13 : 열 처녀의 비유
1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첫째 미사 - 욥 19,1.23-27; 사도 10,34-43; 마태 5,1-12
둘째 미사 - 지혜 3,1-9; 로마 5,5-11; 마태 11,25-30
셋째 미사 - 지혜 4,7-15; 로마 5,17-21; 마태 5,1-13


마태 5,1-12
1. 예수님 사랑과 연민(‘눈빛과 말씀과 치유’)으로 보고 듣고 깨달음을 얻자.
예수님은 당신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치유하셨다. 백성 가운데 병자와 허약한 자(마태 4,23),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4,24),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4,25)이 치유를 받았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인생 문제에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그들’(마태 9,36)을 사랑과 연민으로 바라보신다.(ιδων마태 5,1;9,35ㄴ)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우리는 망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의 눈빛과 연민과 눈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병자, 장애자, 실직자, 매 맞는 여성, 가난한 자, 세리와 죄인, 절망에 떨어진 모든 인간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과 눈빛, 말씀 그리고 행동을 닮으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2. 행복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행복하세요!’
예수님의 행복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론’이다. 예수님께서는 행복론에서 세상의 모순과 고통을 배제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에서 불행을 겪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신다. ‘갖가지 불행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길’을 가르쳐 주신다. 인생의 모든 문제점들을 수용하고 통합할 뿐 아니라, 그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행복선언의 말씀을 듣는 순간 이미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복음의 여덟 가지 행복의 주제는 단 한 가지 생각을 드러내어 준다.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3. 예수님의 행복론은 현재로부터 시작하는 미래의 희망 지향적이다.
행복 그것은 현재의 것으로 체험되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의 말씀이 와 닿는다. 세상에서 상처입고 망가진 사람들은 희망의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듣는 바로 그 순간, 현재에 생성되고 체험되는 미래의 희망이 펼쳐진다. 이 행복선언의 말씀을 수용하고 간직할 때, 불행한 과거로부터 치유되고, 고달픈 현재의 문제에 기쁘게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강력한 희망으로 ‘현재로부터 시작하여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말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진정한 희망이 고통스런 현실(현재)를 긍정적인 새 출발점으로 변화시킨다.

세상의 박해나 죽음도, 그것이 현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용하면 ‘하늘나라’의 강력한 희망이 현재로부터 미래로 열린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드는 희망을 가진 자에게는 ‘죽음이 결코 마지막 말이 될 수 없다.’삶의 시작부터 죽음 앞에 선 인간 존재의 가치는 하늘나라 안에서 본래의 가치가 드러난다. 

 

마태 11,25-30

1. 예수님은 부정적 현실 앞에서도 하느님의 뜻의 성취라는 긍정적 비전을 가지신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다소간의 의심을 받고(마태 11,2-6), 게다가 티베리아 호수가 주변 도시들(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불신앙을 만나신다.(11,20-24) 보통 사람 같으면 그 다음 장면에서 불쾌함이 드러나고, 부정적 발언들이 표현되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의 성취를 바라보시며, 긍정적 비전을 포착하시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11,25-26)

2. 부자유친 : 아드님은 전권을 위임받은 계시의 주체이시다.
구약성경과 유다 문학은 하느님께 직접화법으로 ‘아버지’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의 기도에서만 절대적 표현으로 사용된다. 유다인들은 지금도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으며, 완곡한 표현으로 ‘영원하신 분’이라는 표현을 쓴다.  

예수님의 기도 안에서 사용된 ‘아빠’(압바, Abba)는 그야말로 예수님의 작품이며 예수님의 절대적 권위 안에서 표현된 것이다. 이는 또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아빠’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부드러움과 친밀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아버지이신 주님께서 여기서 창조적 사업을 하신다. 첫째, 지혜로운 자들과 철부지들에게는 감추신 아버지의 뜻을 철부지에게 드러내 보이신다.(마태 11,25) 둘째, 아드님 예수님께 전권을 넘겨주신다.(마태 11,26)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계시를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아버지를 알고자 하거나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알려고 하거나 성취하고자 해서는 알 수가 없다. 오직 예수님께로 나아와야 한다. 창조적 능력과 계시의 주도권은 예수님께만 있다.

 

3. 구체적 현실의 어려움을 예수님께 가서 해결하고, 동시에 배움의 길을 걸어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1) 현실의 어려움을 안식으로 바꾸어 주시고, 2)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 배우기를 권고하신다. 많은 현대인들은 인생의 무거운 짐에 짓눌린 채 고통에 허덕이고 있다. 현대인들이 안식을 얻으려면,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하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움의 길을 걸어야 한다.

1) 스트레스를 적절히 관리하라. 2) 예수님을 뒤따라라. 3) 끝없는 배움의 길을 걸어라.

 

 


11월 9일 연중 제32주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 요한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1. 성전은 주님의 현존을 나타낸다.
성전은 주님께서 현존하시고 머무시는 주님의 집이다. 다윗은 주님의 현존(계약의 궤)을 모실 집을 짓고 싶었다.(2사무 7장 참조) 그는 주님의 은혜로 온갖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서도 살아남았고,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1열왕 6장 참조) 바빌론 유배를 통하여 성전의 중요성과 의미가 더욱 영성적으로 발전한다.(에제키엘) 이런 어둠의 시대를 통하여 온 유다 백성은 사제적 백성으로 새로 태어날 준비를 한다.

유배 후 유다는 제2성전을 재건(기원전 515년)하여, 성전을 중심으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으로 탄생하여 새로운 출발을 한다. 그러나 또 다시 그리스 시대에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성전이 유린당하고(기원전 167년), 로마시대에 폼페이우스에 의해 다시 유린당한다.(기원전 63년) 예수님 시대 이후, 유다인들의 반란에 대한 로마군의 진압 과정에서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은 다시 파괴된다.

성전은 주님 현존의 장소이다. 그러나 임금과 백성의 정치적·종교적 타락과 무능은 내적으로 성전파괴의 원인이 된다. 성전 파괴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벌이다. 이 시기는 정화와 쇄신의 시기이다. 성전중심주의가 성사적 형식주의의 폐단을 닮아서는 안 된다. 오로지 하느님 현존의 의미로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것은 하느님의 집을 사랑하는 열정 때문이었고,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제시하신다.(요한 2,13-2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므로 당연히 주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한다.(1코린 3,16-17)

 

2. 주님의 집(주님의 현존)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력과 행동이 요구된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장면은 폭력적이다. 주님의 집을 향한 열정은 뜨겁고 과감하다.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은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때로는 폭력적 도전으로 보여서 때로는 몰이해와 박해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행동 안에 담긴 주님의 집에 대한 열정을 배운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변화를 추구하고, 도전을 시도한다. 거기에 역경과 고난이 닥치지만, 오히려 성공을 위한 열정과 용기로 무장하여, 과감하고 결단력 있게 행동한다.

 

3. 참된 주님의 현존이신 예수님을 깨달아라.

주님의 현존은 곧 생명을 탄생시키는 전제조건이다. 가장 완벽한 주님 현존의 성전은 예수님 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된다.

- 1코린 3,9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 1코린 3,11 “…이미 놓인 기초는 …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1코린 3,16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4. 로마의 주교좌성당은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라, 라테라노의 성요한 대성당이다.  
박해가 끝나는 기원후 32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다. 11월 9일 모든 보편교회 가운데서도 특별한 축성과 봉헌을 기념한다. 역설적이게도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바는, 예수님께서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그 성전 대신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내어 주신다. 그리스도야말로 하느님 현존의 가장 완벽하고 새로운 인격이다. 모든 축성된 성전들의 참된 의미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보물이 있을 때만 드러난다.

 

 

11월 16일 연중 제33주일, 평신도주일 : 마태 25,14-15. 19-21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1. 각자의 능력(탈렌트)에 따라 맡긴다.
1) 주인이 여행을 떠난다.(주인의 부재) : 주인의 한시적 부재는 주인이 종들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는 동시에 종들에게는 주인의 신뢰에 대하여 성실히 응답할 사명을 부여하고, 자신의 능력(탈렌트)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한다.

2) 주인이 종들에게 재산을 맡긴다.(신뢰와 위임) : 주인은 종들을 신뢰하고 재산을 맡긴다. 신뢰경영이다. 현대 교회는 거대 조직을 움직이는 차원에서 합리적 교회운영을 위한 경영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다. ‘신뢰와 위임’의 원리로 탄생, 성장, 완성된다. 교회는 스스로 주님으로부터 신뢰와 위임을 받아서 존재와 사명을 지닌다.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위임하셨다. 베드로처럼 불완전한 종인 자신에게 위임된 탈렌트(능력과 사명)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현대 교회는 친교가 살아나는 소공동체의 힘을 안다. 그러므로 과거 권위주의의 경직된 수직적 구조를 더욱 작고 생기발랄한 작은 공동체를 배려하는 사목 구조로 발전해 가야 한다.

 

2. 곧 가서 그 주어진 탈렌트(종자돈)를 활용하라. 그리하여 더 큰 돈을 벌어라.
1) 즉각적으로 자신의 탈렌트를 사용하라. 투자하라. : 먼저 세상의 필요를 읽고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투자하여  돈을 벌어들이라는 것이다. 돈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주님의 말씀이다. 둘째, 하늘나라를 위한 교회 성장의 카리스마다. 따라서 주님 말씀에 봉사하기 위하여 받은 다양한 능력과 은사를 활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투자가 가능하다. 대신 그 열매를 거두어 들여야 한다.

현대의 기업은 사장으로부터 말단 직원까지 친교로 수평적 일심동체가 되어, 비전과 정보를 공유하며, 팀원 전체가 일체가 되어 각자의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최대의 시너지 효과를 내려고 노력한다. 교회 안에서도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인력들이 최대한 활용되어야 교회 성장의 힘을 발휘하여, 세상에 대한 교회의 복음적 경쟁력이 잘 발휘될 수 있다.

2) 현장에 뛰어들어 생산성을 내라.(현장의 Needs에 맞추어 자신의 Seeds를 제공하라.) :  현대 사목자의 경쟁력은 다름 아닌 평신도 인력과 능력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총체적 시너지 효과를 내며, 성과가 최대화된다. 사목자 개인의 능력은 임지에서 일시적이며 한정적이고, 개인의 능력만큼만 발휘될 뿐이다.(사목자 개인 능력만큼의 사목은 ‘Seeds 경영’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사목자의 능력은 평신도들을 통해서 발휘된다.

교회 내에 복음정신으로 무장된 평신도 인력을 양성함은 장기적이며 확실한 교회 성장을 위한 투자이다. 동시에 사목의 큰 수확과 성취의 비결이다. 사목에서 큰 성취를 이루려면, 위대한 평신도들을 많이 양성하라. 그리고 신뢰와 위임으로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라. 여기에는 사목자와 평신도 모두의 노력과 협력이 필요하다.

3. 결실에 대한 보상(Award)이 있다.

교회의 일에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봉사정신을 강조하는 수가 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마태 6,19-21)라는 말씀에 근거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일에도 생산성에 대하여 ‘복음적인 평가’를 받아야 한다. 복음적인 생산성의 평가는 결코 복음 정신을 흐리거나 불경한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가 그것을 말해준다. 게다가 반드시 평가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첫째 보상은 칭찬이다. 교회의 일을 성공적으로 잘 했을 때는 정당한 칭찬을 해주는 것이 복음적으로 바람직하다. 상찬의 원리로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칭찬은 그 사람의 수고와 업적을 치하하는 의미 뿐 아니라 더욱 크게 동기를 유발시켜주고, 타인들에게 모범이 되어 타인들도 그렇게 동기유발이 되게 하는 장점이 있다.

둘째 보상은 능력의 확대이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교회의 봉사자는 성취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보상(칭찬)에 의해 더욱 분발하여 더 큰 성취를 위하여 정진한다. 반대로 교회의 봉사자들의 성취에 대하여 칭찬에 인색하거나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것은 사람의 의욕을 떨어뜨린다. 물론 참된 신앙인은 그 무관심마저도 주님께 봉헌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를 잘 살기 위하여 동기유발과 사기진작의 기술이 필요하다.

셋째 보상은 주인과 함께 머무름이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생산성이 없는 주님의 종은 밖의 어둠 속에 버려진다. 자신의 최선을 다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누구라도 그와 같이 된다.

 

 

 

11월 23일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 마태 25,34-40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1.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영광의 날에, 모든 민족들은 우측과 좌측으로 분리 된다.
그날에 지상의 모든 것은 새로운 차원을 만난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 있던 지상의 세계는 이제 영원의 관점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평가받는다. 수많은 군중 속에 나도 포함되어 심판을 받는다. 임금이시며 목자이신 하느님의 이미지(에제 34,11-22)가 예수님께 적용된다. 만민은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가 예수님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심판을 받는다. 그런데 무엇이 예수님 심판의 기준인가?

 

2.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다. 예수님의 형제들인 가장 작은 이들에게 특히 잘 해주라.
심판의 기준인 사랑, 그것은 행동으로 표현된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 환대하는 것, 입히는 것, 돌보는 것, 방문하는 것 등이다. 이것은 참 사랑의 겸손한 행위들이며, 무한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이 참 사랑의 행위들은 우리가 처한 상황과 현장에 따라서 얼마든지 더 다양한 형태의 행위들이 있을 수 있다. 나의 자녀를 돌보는 것, 늙고 병든 부모를 봉양하는 것, 우정이 필요한 이웃과 친교를 나누는 것, 대부·대모를 서는 것, 시간이 필요한 봉사를 하는 것, 일거리가 많은 동료를 도와주는 것,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제3세계의 나라들을 돕는데 앞장 서는 것 등도 열거해 볼 수 있다. 나의 직장 동료, 나의 가족들, 나의 친구들 안에서 얼마든지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의 가치들을 실천할 수 있다.

 

3. 일상의 선행을 수행하라
축복과 저주의 심판 기준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일상의 행위들’이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축복을 받는 자나 저주를 받는 자나 공히 심판 때에 ‘주님, 저희가 언제…?’라고 되묻게 된다는 것이다. 평소 일상 안에서 주변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한 것’이 칭찬을 받는다. 또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저주를 받는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저주받은 자들이 타인에게 악을 저지른 자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일상 안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장 작은 이들을 찾아서 선행을 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4. ‘영원한 벌’과 ‘영원한 생명’의 갈림길에 서라. 생사의 벼랑 끝에 서서 선을 행하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일상의 사랑 실천이 구원의 길이다. 또한 현재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결정적인 것은 마지막 순간에 드러나는 법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은 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미래는 현재와 무관한 나중의 어느 순간이 아니다. 결국 우리의 오늘이 바로 심판의 순간인 셈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5. 놀라운 예수님의 현존 방식을 감지하라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현존 방식의 비밀을 보여준다. 이제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나의 일상과 주변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을 섬기고 봉사하자. 일생동안 내가 만난 그 많은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께서 수도 없이 나와 함께 현존하셨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사랑으로 믿고 바라며 기다린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비밀스러운 일상적 현존 방식을 안다. ‘주님, 저희가 당신의 현존 앞에서 깨어있게 하소서.’

 

 

 

11월 30일 대림 제1주일 : 마르 13,33-37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예루살렘에 입성(11,1-11)하신 직후,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11,15-19)를 시도하시고 유다인들과 논쟁을 하시며, 여러 가지 비유로 적대세력들에게 가르침을 주신다.(11,20-12,44) 급기야 종말론적 예언의 말씀을 주시면서(13,1-31), 오늘의 복음에서 ‘깨어있을 것’을 설교하신다. 이 설교가 끝나면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음모(14,1-2)에 휩싸이신다.

 

1.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이 긴박한 말씀의 문맥은 음모가 발생하는 긴박한 상황이다. 또한 ‘조심과 깨어있음’역시도 일종의 전쟁에 대비하는 경계 태세와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주님께서는 ‘위기관리’ 형태의 처신을 요구하시는 셈이다.

첫째,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조심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마르 4,12) 둘째,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마르 8,15;12,38) 셋째, 미래를 아는 것처럼 예언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도록 조심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마르 13,5.23)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이미 잠들었더라도 깨어나야 한다.(로마 13,11) 우리의 의식이 잠들면 안 된다. 바오로 사도 역시 전투적 상황의 긴장감을 불어넣어 준다. :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 13,12; 에페 6,10; 1테살 5,6-8) 그래야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를 극복하고 육신의 욕망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인간을 공격하여 위기에 빠뜨리는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투쟁이기도 하다.  

 

2.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만이 아신다.
2-1. “그 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조심하고(βλεπω, 유심히 관찰하기) 깨어 지켜야(αγρυπνεω, 잠들지 않기) 하는 이유는 첫째, 그 시간을 오직 주님이신 아버지만이 아시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은 그 날과 그 시간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2-2.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시간과 때에 대한 무지 가운데서 특히 지적되고 있는 시간대는 ‘저녁’, ‘한밤중’, ‘닭이 울 때’, ‘새벽’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의하면 해가 떠있는 낮 시간에 주인이 오는 것은 걱정거리가 안 된다.

이스라엘의 밤은 위험하여 실제로 주인이 밤에 여행하여 돌아올 확률은 매우 낮다고 한다. 그러나 확률이 낮다는 이유 때문에 문지기에게 방심이 생기고 잠들게 될 위험이 오히려 높다. 예수님은 이런 방심과 빈틈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비록 밤에 잘 깨어 있었고 새벽이 밝아오는 때라 하더라도 방심은 금물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나서 새벽닭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마르 14,72)

교회가 가진 인간성만큼 교회는 참으로 나약하여, 깨어있기 쉽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민의 자만심을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조심스럽게 염려하되, 잘 깨어 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누구라도 방심과 자만심은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 인생의 밤을 만나서 지독한 고통과 고난의 깊은 어둠에 빠져들 때, 새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은 참으로 길고 어려운 시간이다. 깊은 밤일수록 더욱 새벽을 기다리게 되고, 어두울수록 더욱 빛이 소중하다.

 

3. 종의 입장에서 보면, 주인의 귀가는 속성상 언제라도 갑작스러운 것이다.
주인은 항상 갑자기 돌아오는 셈이다. 왜냐하면 주인은 피조물의 존재와 시간을 무한히 초월하시고, 피조물은 창조주의 뜻과 생각을 절대로 예측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조차 없으며, 주님 스스로 때를 결정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종은 주님의 존재도 계획도 잘 모르기 때문에, 예측하지 못한 시간에 주인의 귀환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안전한 것은 종은 항상 주님의 귀환에 대비해야 한다.

 

4.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인간성의 나약함 때문에, 인간은 항상 주님 앞에서 어느 정도 졸고 있다. 이 영적인 잠과 가수면 상태 내지는 혼수상태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인간은 그러므로 졸음에 이끌려 갈 것이 아니라, 항상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깨어 있으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 안에 항상 현존하신다. 무감각과 미지근함은 항상 우리에게 오시는 현존의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 대림절에 우리는 적극적인 깨어 있음과 주의 깊은 관찰로 주님의 때를 기다린다.

 

심탁(끌레멘스) 신부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전담 사제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2008년 11월호 <사목정보>지에도 실린 내용으로, 본지에서는  좀더 보완하여 쓴 글임을 밝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