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법 차가워진 공기가 상쾌하게 다가오던 11월 5일 오전 7시 30분, 총대리 조환길(타대오) 주교와 사무처장 하성호(사도요한) 신부, 관덕정 서준홍(마티아) 관장 신부와 관덕정 운영위원회, 성지봉사회원들의 묵리 이윤일 성인 유허지 순례에 기자도 함께 하였다.
출발에 앞서 조환길 주교는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일이 악수하며, 오늘 하루 함께 할 이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하고, 다 같이 성무일도를 바친 후 서준홍 신부가 성 이윤일 요한 성인에 대한 설명해 주었다. 미리 준비한 자료를 통해 성인의 일대기와 간혹 잘못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다음 관덕정 순교자현양사업 후원회 최휘철(네레오) 회장의 ‘이윤일 사도 요한 성인의 시신 이동 경로에 대한 조사 보고’와 마백락(클레멘스) 관덕정 운영위원의 ‘이윤일 성인 묘 탐사 보고’가 이어졌다. 그렇게 유허지를 향하는 동안 우리는 이윤일 성인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는 좋은 배움의 기회가 되었다.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달려 여주, 호법, 양지를 지나 용인 IC를 빠져나와 용인읍에서 45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보니 신원컨트리클럽 입구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천리요셉성당을 지나 용덕 저수지 상류 끝에 다다르니 성지 표지가 보였다. 그곳에 도착하니 수원 대리구장 최재용(바르티매오) 신부, 천리요셉성당 박태웅(토마스) 신부와 신자들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함께 유허지로 향했다. 약 500m 정도 되는 산길은 처음 시작과 달리 점점 가파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20여 분 정도 걸어서 유허지에 도착하여 총대리 조환길 주교 주례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강론 가운데 조환길 주교는 성인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주었다. “이윤일 요한 성인은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나 상주 갈골로 갔다가 문경 여우목에서 1866년 10월 18일 체포되어 문경 관하에 끌려가 신문 받고 상주로 압송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 1867년 1월 21일 관덕정에서 순교하여 날뫼(비산동) 뒷산에 묻혔다가 후손들이 충청도를 거쳐 경기도 용인군 묵리에 이장했다. 이때 최재용 신부가 성인의 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조사결과 성인의 묘소는 1976년 6월 24일 미리내 성지의 무명 순교자 묘역에 이장되었고, 1985년 교회사 연구소 최석우 신부의 조사에 의해 성인의 묘소로 확인되어 이문희 대주교가 대구로 옮겨와 1987년 1월 21일 성모당에 안치하고 대구대교구 제2주보성인으로 반포하였다.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축성과 함께 성당 제대에 봉안하여 오늘까지 모시고 있다. 103위 순교자 가운데 대구에서 순교한 성인으로 1988년 이 대주교가 비석을 세웠고, 그 후 김진용 씨가 주선하여 성역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조환길 주교는 “순교 성인들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겠는가. 이 분들이 계시기에 지금 우리의 믿음이 있고, 대구교구에 순교의 씨앗이 뿌려져서 오늘날 우리 교구가 있는 것 같다. 우리도 이윤일 성인을 본받아 주님께 나아가는데 거침없도록 해야겠다.”고 하였다.
 
김진용(마티아) 씨는 미리 준비한 유허지 사진을 액자에 담아 조환길 주교에게 선물하며 “순교자의 묘를 후손된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지낸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싶어 성인의 묘를 개발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중 몇몇 분들의 뜻하지 않은 지원에 용기를 얻어 시작하게 되었다.”면서 “일의 진행 과정으로 볼 때 하느님께서 해 주신 일이지 내가 한 일이 아니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였다. 이어 교구장 최영수 대주교의 감사패를 받은 마티아 씨는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성지 개발에 계속 힘쓰겠다.”고 하였다. 이에 조환길 주교는 “대구대교구의 제2주보성인이며, 대구에서 돌아가셨고, 대구에 많은 믿음의 씨앗을 뿌리신 분으로 공경하고 잘 모셔야 할 우리의 도리를 앞서서 하셨기에 감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성인의 묘지 발견에 큰 역할을 한 최재용 신부는 “신학생 시절, 김대건 신부와 사연이 깊은 신부님들과 교우분들이 여기 와서 기도 바친다는 이야기에 알고보니 이윤일 성인이었다. 신학교 이원순 교수로부터 유해가 관덕정에서 먹뱅이 쪽으로 모셔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리 역할을 한 것밖에 없다.”면서 “어르신들의 입으로 전해오는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며 이번 순례를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유허지를 내려와 점심 식사 후 일행은 한덕골 성지로 향하였다. 넓은 잔디밭에 십자가를 중심으로 김대건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한덕골 성지에 대해 마티아 씨의 설명을 잠시 들어본다. “이곳은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고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사적지이다.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난 와서, 마을 근처 성애골(현재 매몰되었음) 골짜기에 들어가 산(生)나무와 산나무에 칡으로 얽어매고 억새풀을 덮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귀국하여 이곳에서 둘째 큰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눈물로 상봉하였다. 두 분 다 관련되는 곳이기에 두 분의 동상을 함께 모셨다. 한덕골 성지 출신 순교자로는 성 김대건 신부와 부친 김제준(이냐시오) 성인과 김 시몬(1870년 순교, 40세), 김 마리아(1866년 순교, 42세) 등이 있다. ”
천리성당 신부와 신자들의 손으로 꾸며진 한덕골 성지는 골프장 조성으로 매몰된 성애골에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마티아 씨가 603평의 땅을 직접 매입하여 수원교구 소유로 등록하였다.
한덕골 성지를 내려오기 전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들과 그 가족들을 기억하며 모두 두 손 모아 잠시 기도드리며 김진용 마티아 씨는 후배 신앙인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였다. “신자들 가운데 열심한 이들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많다. 우리 순교자들은 진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 버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고문과 형벌도 감수했다. 매사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아서 진리에 살도록 노력하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다.”
하루의 짧은 순례였지만 순교자 정신을 되새기며 우리의 믿음을 이어갈 수 있음에 감사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