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정에는 유난히 은행나무가 많다. 늦은 가을 샛노란 은행잎이 꽃처럼 온 가지를 뒤덮거나 길 위에 수북이 나뒹구는 모습은 조락의 아픔을 떠올리기 보다는 차라리 환호해야 할 것 같은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그마저 지고 나면 겨울은 앙상한 이별의 계절이다. 그동안 잊고 지내왔다고 하더라도 떠나 보내야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는 떠나보냄을 준비해야 하는 계절이다.
최근에 한 원로사제의 장례미사가 있었다. 조용하면서도 철저히 사셨던 분이라 여기긴 했지만, 함께 한 경험이 많지 않아서 다소 데면데면 한 차에, 멀리 다른 교구에서 오신 동기신부님 한 분의 고별사가 있었다.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못하고 있었던 말을 이제는 해야겠다. 동기지만 존경했노라. 이 말만은 꼭 간직하고 가거라.”고 겸손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문을 여신 그분은 함께 하신 경험담을 전해 주셨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배고픔이 큰 문제였을 때, 배식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고인께서는 자신의 것보다 늘 다른 이의 밥그릇에 꾹꾹 눌러 담아 밥을 퍼시더라는 것이었다.
한 평생을 사제로 사신 분의 삶에 그보다 더 큰 업적들이 어찌 없었을까마는 고인을 추모하는 자리에 기억으로 남는 것은 그분이 사신 사랑의 크기였다. 그 모습으로 다른 이가 유불리(有不利)를 따질 때 늘 의연히 정도(正道)를 일러주었노라고 회상하실 때, 좌중은 그분의 삶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었고, 올곧은 그 모습 앞에 감사와 감격의 눈시울을 붉혔다.
지나온 자리의 흔적을 돌아본다. 반가운 만남보다 떠나는 뒤통수가 더 아름다워야 하는 것인데, 그 만남들에 얼마나 성실하게 두려움을 갖고 임했으며, 그 만남이 사랑의 크기를 키우는 데에 얼마만큼 기여하였던가. 행여 조금이라도 오히려 깎아 먹지는 않았던가. 상처 받지 않으려고 상처를 주려고 하지는 않았던가.
만남보다는 이별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그것으로 끝이 아닌, 바라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로 말미암아 떠나보내야 할 것과 맞이해야 할 것을 분간케 한다.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시고 제자들을 떠나가실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 16. 22)
잘 떠나보냄은 잘 맞이하기 위함이다.
* 그동안 <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에서 좋은 글을 써주신 이경수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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