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 - 열세 번째 이야기
미사 때 독서를 봉독하는 올바른 장소는 어디입니까?
위 제목의 물음에 대해 우리는 간단하게 말할 수 있으며 미사 전례서 총지침의 해당되는 항목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본기도가 끝나면 모두 자리에 앉는다. … 독서자는 독서대로 가서 미사 전에 이미 놓아둔 독서집에서 첫째 독서를 선포한다.”(미사 전례서 총지침 128항) 그리고 이는 복음 전 둘째 독서에도 해당됩니다.(미사 전례서 총지침 130항)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은 성당 안에서 그 존엄성에 맞갖은 선포 장소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장소는 말씀 전례 동안 신자들이 자연스럽게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곳이어야”(미사 전례서 총지침 309항) 하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비록 말씀의 선포를 위해 의무화된 장소를 지시한 어떤 시대도 없었지만, 적어도 천 년대에 와서 이 장소는 제단 영역, 그러니까 사제석 앞부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미사 안에서 말씀과 성찬의 관련성은 서방에서는 오랜 세월 속에 신학적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표징으로도 항상 알아보았습니다. 언어적으로 현재까지도 강론대라는 말은 라틴어 칸첼리(cancelli), 곧 사제석을 둘러싸고 있는 제단 울타리(cancellus 칸첼루스) 라는 라틴어 표현에서 생겨났습니다. 강론대는 중세 전성기와 중세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제단에서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가끔은 신자석의 중간부분(원주 기둥 상단 부분)에 자리하기도 했습니다.(중세에 건축된 성당 내부)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때 강론은 전례와 완전히 분리되기도 했으며, 또 어느 때에는 아주 큰 교회 안에서는 청중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음향기기가 전무하였던 시대였으므로) 성경 독서대인 암보(Ambo)의 옛 형태인 우리 시대의 독서대는 원래 제단 가까이에 자리했던, 생겨난 자리에서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에는 신학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전례개혁은 우리에게 하느님 말씀의 품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말씀과 성사는 독서대와 제단의 가까운 자리에서 그 외적인 표지를 가집니다.
제대 가까이에 자리하는 독서대는 그와 더불어 단순히 임의로나 또는 음향적인 문제만은 아닙니다. 올바른 성경 봉독 장소는 모든 음향학적 경험에 따라서 그리고 말하는 자와 듣는 자와 마주하는 지시에 상응하게끔 자리잡게 합니다. 그렇더라도 소리의 음이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보다 쉽게 도달하도록 (더 이상 중세기처럼) 듣는 사람의 머리 위에 높게 자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생한 접촉은 듣는 것과 보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데서 이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지난 시대에 차부제는 서간경(독서)을 신자들과 등을 지고 제대를 향해 노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암시하며 제대는 그리스도를 상징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같은 우의적 해석은 더 이상 자리하지 않습니다.
교회건축의 다양한 단면도들에서도 독서대 자리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독서대는 원칙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책받침대가 아닌 고정된 자리여야 합니다. 독서대는 “성당의 구조에 따라 설치하되 신자들이 서품 봉사자들과 독서자들을 잘 바라볼 수 있고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다.”고 미사 전례서 총지침(272항)은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독서대는 말씀 전례의 본질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독서와 화답시편, 복음봉독, 부활찬송, 강론과 보편 지향 기도가 바쳐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독서대는 하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상징성에서 하느님 말씀의 하나 됨에 가장 잘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 고유한 등급을 가지지만, 그렇더라도 성경 전체가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전례력 - 열세 번째 이야기
대림절에 공동체는 실제로 무엇을 경축합니까?
부활절을 준비하는 준비시기인 사순시기를 본떠 생겨난 서방교회에서만 알려져 있는 대림시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사경문에서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두 가지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 전례 전통에서, 또 다른 하나는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 전례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5세기 이후 로마교회에서 한 주간에서 세 주간의 성탄을 준비하는 시기 때 하느님의 인간이 되심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하느님의 당신 백성을 위한 구원역사 안에서 주님의 어머니의 의미를 강조하는 마리아적 특성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참조.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갈리아 지역에서의 대림시기 전례는 6세기 이후부터 갈리아 - 아일랜드 수도회의 영향으로 로마의 대림시기 전례와는 다소 다르게 발전합니다. 6주간의 성탄 준비시기는 11월 11일 마르티노 날(마르티노 주교 기념일)에 시작하며 종말론적 특성과 최후심판, 그와 더불어 마지막 시간으로 꾸며졌습니다.
중세기에 이 두 가지 관점이 스며들어 왔습니다. 1570년에 비로소 네 번에 걸친 대림시기 주일이 전 유럽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오늘날 대림시기에 교회는 전례 안에서 주님의 두 번 오심을 거행합니다. 곧 인간으로 오신 주님의 오심(탄생)과 세상 종말에 오실 주님의 오심입니다.
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 새 규범에 따르면 대림시기는 이 시기를 위한 고유 감사송(대림 감사송) 1, 2 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각각 두 개의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대림 제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감사송 본문은 종말론적 성격을 드러냅니다.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대림 감사송 1)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의 감사송 본문은 주님의 가까이 오심, 즉 가까운 주님 탄생을 노래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당신 성탄을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대림 감사송 2) 성탄을 바로 앞둔 이 기간 동안은 미사 기도문에 있어 매일 고유 본문을 가지며 시간전례(성무일도)도 고유 기도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림 제4주일은 독서와 복음에서 구약의 선조들과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하느님의 어머니 이야기를 알려주는 주일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와 비교하여 볼 때 대림시기는 이제 더 이상 속죄나 보속의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쁜 기다림의 시기로 그 의미를 굳혀가고 있습니다. 대림시기에 대영광송(글로리아)이 불리지 않는 것은 부활절 속죄시기인 사순시기에 대영광송을 노래하지 않는 이유와는 다릅니다. 이는 목동들의 벌판에서의 천사의 노래인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는 성탄 때 완전히 새로운 기쁜 소식처럼 또 다시 울려 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의 또 다른 특별함은 바로 시간기도(성무일도)와 미사에서의 복음 환호송 알렐루야절에 노래하는 O-후렴입니다. 이 O-후렴은 이 대림시기 둘째 부분 전례의 특별한 풍요로움을 나타내줍니다. O-후렴은 그 본문에서 구원을 가져다 주는 주님의 오심을 간청하는 청원에 각각 다른 찬양하는 호칭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대표적인 후렴으로 12월 19일의 본문을 들 수 있습니다. “이사이의 뿌리,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지신 분, 지체하지 마시고 저희를 구원하러 오소서.”
전체 전례력과 마찬가지로 대림시기도 각각 다른 관점 하에 있다 하더라도 공동체는 그 안에서 주님의 구원을 경축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