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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 길젤라 스타니슬라오 신부
선교사로 지낸 53년 은총의 삶


취재|김명숙(사비나) 편집실장

한국에서의 53년 선교사 삶을 뒤로 하고 본국인 프랑스로 떠나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길젤라(스타니슬라오, 79세) 신부. 1930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두 살때 프랑스로 이주, 1955년 5월 프랑스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그해 12월 한국 선교사로 첫 발을 내딛은 젊은 신부는 어느 덧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12월의 문턱에서 길젤라 신부를 대구대교구청 사제관 응접실에서 만나 뵈었다.

부르심에 순명하며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총장 신부의 뜻에 따라 선교지 파견이 결정된다.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으로의 선교지 결정이 정해지자, 순간 길 신부는 무척 기뻤다. 이미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마리 니콜라 앙토완 다블뤼 주교(1818-1866,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 한국명 : 안돈이)의 고향이 자신과 같은 프랑스 북부지방 아미엥(Amiens)인 까닭에 진작부터 한국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5년 12월, 배를 타고 한 달여 만에 한국에 도착한 길 신부는 대전교구 예산성당 보좌를 시작으로 선교사로서의 첫 발을 떼었다. 그리고 53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짧았던 보좌신부 시절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며 옛일을 떠올린다. “충남 예산본당 보좌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는 봄, 가을에 한 차례씩 걸어서 주일을 제외하고 각 공소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한 달씩 공소에서 먹고 자며, 찰고도 하고 판공성사도 주며 함께 살았는데, 밤이 늦도록 공소의 어른,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고 즐겁게 지냈던 기억이 아직까지 잊혀지지가 않아요. 공소 신자들에게 서툰 한국말로 복음을 전하고 또 예비신자들이 교리를 배워 본당에 와서 40-50명씩 세례를 받을 때, 그 때가  선교사로서 가장 기쁜 날이었습니다.”

 

선교사로서 열정을 쏟은 시간들
1961년, 길 신부는 같은 파리 외방전교회 루이 델랑드(1895-1972, 예수성심시녀회 설립자, 한국명 : 남대영) 신부의 요청으로 대전에서 포항 송정으로 옮겨 온다. 당시 남 신부는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300여 명의 고아들과 40-50여 명의 노인들을 보살피면서 예비수녀 60여 명을 지도하고 있었다. 또 한센인 정착촌과 무료진료소, 수도회 설립건 등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일들을 벌여놓은 상태였으므로 길 신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한다.

포항 송정에서 성모자애원 일과 더불어 남 신부를 도와 대구와 포항에 예수성심시녀회 수녀원 건축에도 관여하였던 길 신부는 1965년부터 14년 넘게 수녀회 지도신부로 활동한다. 그리고 1979년 길 신부는 이전의 건축경험들을 살려 대구가톨릭병원 건립에도 크나큰 공헌을 한다. 돌이켜보면 본당사목보다 특수사목에 더 많은 시간을 쏟으며 지내왔다는 길 신부는 “가끔 건축을 전공했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건축을 전공한 건 아니고, 오랜 세월 수녀원, 시설, 성당 등 교회건축 관련 일에 참여하다 보니 경험에 의해 조금 더 잘 알게 되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한국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길 신부는 ‘언어’를 손꼽으며, 어른 공경을 잘 하는 한국 사람들의 존대어 사용법이 무척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한국에 들어왔던 그 당시에는 아래사람이 어른에게 주의나 지적을 해 줄 수 없는 그런 때였습니다. 그래서 신부인 제가 한국말을 틀리게 해도 바르게 고쳐주거나 조언을 해주질 못하였어요. 그런데다 항상 많은 일들로 너무 바빠서 따로 공부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지요.”라며 겸연쩍게 웃는다. 하지만 한 번씩 프랑스로 휴가를 떠나 가 있으면 매운 김치 맛이 그리워질 정도로 한국을 사랑한다고 덧붙였다.

매순간순간 부르심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길 신부는 1993년부터는 교구 사료를 모으고 정리하며 프랑스어로 기록된 대구대교구 초창기 문헌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해 왔다. “사실 한국말이 서툴러 번역하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또 혼자 하기 힘든 일을 혼자 하려니 생각처럼 잘 되질 않았어요. 아마 연구진을 요청해서 같이 했더라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항상 미안한 마음.”이라며 사료 정리의 부족한 부분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1997년부터 외국인 사목을 맡아온 길젤라 신부는 대안성당과 가톨릭 근로자회관에서 외국인들을 위한 영어 미사봉헌과 세례성사, 혼배성사를 집전하며 외국인 사목에 힘써 왔다. 외국인들의 경우, 95% 정도가 필리핀이고 그 외 캐나다, 미국, 프랑스 순이다. 외국인 사목을 하는 동안 보람 있었다고 기억하는 길 신부는 “외국인 대부분이 교리를 잘 모릅니다. 교리를 잘 모르니 고해성사도 잘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론 때마다 항상 강조한 것이 교리와 고해성사의 중요성.”이었다며 “제가 떠나더라도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 해 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떠남 그리고 오래된 기억들
한국에서의 선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는 것에 대해 여쭈어 보았다. “인생의 대부분을 한국, 그것도 대구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곳은 제 고향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일을 할 수 없는 노인이 된 지금, 더 이상 한국 교회에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본국에 가면 특별히 은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한국에서의 일들을 기억해 내며 회고록을 쓰고 싶다는 길 신부는 양해를 구하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기도’뿐이라며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프랑스에 가면 마음이 많이 아플 것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종교에 관심이 없고 또 기도생활도 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 교회는 참으로 좋은 표양이 됩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지 않으므로 하늘나라의 삶을 준비해야 하는 우리. 그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때 비로소 선교사로서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는 길 신부는 인터뷰 끝에 은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였다. “그동안 저를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 분들을 위해 저도 잊지 않고 기도 드리겠습니다. 항상 기쁜 마음으로 사랑의 복음을 잘 지켜 가시기를 빕니다.”

예산성당 보좌를 시작으로 성모자애원 근무, 예수성심시녀회 영성지도, 가톨릭병원 부원장, 자인성당 주임, 논공가톨릭병원, 지례성당 주임, 교구 사료담당, 외국인 사목 등 선교사로서 헌신적인 봉사를 해 온 길젤라 신부는 1월경 한국을 떠나, 프랑스 루르드 부근의 파리 외방전교회 은퇴신부 공동체에 머물면서 노년의 삶을 보낼 예정이다.